221화
홀짝하고 와인을 마시는 그녀의 자세는 일반인들과 별 반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와인을 오랫동안 다루어본 경험이 있었는지, 와인잔의 끄트머리를 잡는 손가락이 정말이지 바람을 타듯 산뜻산뜻했다.
"현대의 장점은 이계에 없는 와인의 기품이라 생각하는데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하느냐?"
지금 이곳은 민국의 집. 그러니까 민국이 집의 내부다. 앉아있는 사람은 은별과 예나, 그리고 흑설 공주와 서민국. 서민국은 또다시 예전처럼 죄인의 자세로 무릎을 꿇고 눈치만 보는 상태였다.
왼쪽에는 은별과 예나가 일심동체처럼 한 팀이 되어 맞은편의 흑설 공주를 보고 있다. 흑설 공주는 와인잔을 슬그머니 계속해서 훑다가 내려놓았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봐도 실로 예쁜 미소였다.
단순히 예쁘기만한 게 아니라 고품격한 귀족의 느낌까지 풍부하게 풍기고 있었다.
'…또 예쁘잖아.'
은별은 속으로 그리 투덜거렸다. 좌측으로 봐도 예쁘고 우측으로 봐도 예쁘다.
어떻게 보든 예쁜 그녀는 심지어 은별이 가지지 못한 마성의 어른스러움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단순히 스무살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가질 수 없는 신비함이라고 할까…. 은별은 왜 민국에게 붙는 여자들이 늘 이렇게 예쁜 것인지 정말이지 화가 날 지경이었다.
"참 예쁜 여인이구나. 은별이라고 했느냐?"
"……."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들 결국 일반인과는 달리 마법을 다루는 무서운 존재다. 심지어 민국이 귀띔을 해준 바로는 흑마법사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를 느닷없이 자극하는 행위는 절대 좋지 않음을 은별도 짐작했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는 은별이었다.
"…그래요."
"참으로 눈이 똘망똘망한 게 예쁘게 생겼구나. 굳이 이 남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남자들을 만날 수 있는 복 있는 여자야."
뜬금없는 칭찬이었다. 하지만 마법을 다룬다는 까닭 하나만으로도 그 멘트에서 은근히 신뢰가 느껴졌다. 물론 은별도 예쁜 편이었다.
민국의 지인인 여자들 중에 서라의 바로 아래라고 보면 되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와는 다른, 끌어들이는 강렬한 매력이라고 할까. 흑설 공주는 단 번에 은별의 그런 장점을 파악했다. 이윽고 흑설 공주의 고개가 예나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를 마주하고 있던 예나는 시선이 자신에게로 오자 흠칫했다. 이윽고 왠지 모를 지지 않고 싶은 마음에 뚫어져라 조심스레 쳐다보자니.
"이 여자가 술 마시고 널 덮쳤다는 여자냐?"
"……."
"으억."
"……!"
은별은 그 날의 치욕이 떠올랐는지 말문을 닫았고, 민국도 순간 당황했으며, 예나는 얼굴이 화악 붉어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예나의 시선에 흑설 공주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오해하지 말거라. 남성이 내게 알려준 것이 아니니. 다만 마법을 다루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단다."
"네…에…."
하긴 절대적인 마법을 다루는 여자인 이상, 예나가 숨길 수 있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장 크나큰 추태를 또 다른 이가 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예나는 상당히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들 무슨 일로 이곳에 찾아왔느냐? 설마 아직 남성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느냐?"
남성이라면 서민국을 지목하는 것이리라. 은별과 예나의 고개가 민국에게로 일제히 돌아갔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던 서민국은 그녀들의 시선을 받게 되자 어깨를 흠칫하더니 어색하게 기침을 했다.
"험험…."
"……."
"어음… 그래. 이미 들켰으니까 어쩔 수 없겠지. 저기 그러니까 은별아, 예나야…."
"……."
"……."
어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지 보자는 듯 진지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은별이었다. 예나 역시도 매우 궁금한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아까 흑설 공주와 조우했을 때 그녀의 발치에 있던 두 개의 가방들. 커다랬던 것으로 가늠할 때 보통 가방이 아니었다.
"이분은 말이시지…. 아까 전에 너희들 임신 기간 늦춰주는 약 있잖아? 그거 개발하신 분이고, 그리고 예나가 마셨던 그 흑화 소주 개발자셔."
"흑화 소주…를 제작하신 분…?"
예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꿈속에서 많은 정보들이 주입되긴 했지만 흑화 소주의 개발자라는 것은 모르던 상태였다. 이윽고 예나의 고개가 흑설 공주에게로 돌아갔다. 흑설 공주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사과부터 했다.
"내 제품으로 그런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남성이 나에게 찾아와서 해결책을 달라 부탁을 한 것이었지. 그때의 일은 나 역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니 사과를 하겠다. 미안하구나."
흑설 공주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사과한다. 예나는 '아, 아니에요.'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화 소주라는 건 아직 비정식 발매 제품이었고, 예나 친구 삼촌의 클럽에서만 특별하게 사용되는 물품이었기 때문에 속세에 유출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나 친구가 그것을 어기고 행한 것이니 사실상 따지고 보면 친구의 잘못이 제일 컸다. 이윽고 민국이 이외 여러가지 설명도 곁들어주었다.
미연시 세계 마법도 이 여자가 다 해주었다는 둥… 그런데 미연시 세계의 기억을 너희에게도 공유해준 아주 악독한 여자라는 둥….
"잠깐만."
그런 설명을 이어가는 찰나 갑자기 은별이 끼어들었다. 예나와 흑설 공주의 고개가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은별은 다소 진지해진 얼굴로 민국에게 물었다.
"내가 묻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닌 거로 아는데. 내가 물으려는 건 지금 저 여자분이 왜 네 집에 찾아왔냐는 거야."
돌이켜볼 때 민국은 아까 전 흑설 공주와 만나는 것에 대해 두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단순히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 해서 입을 다물 민국이 아니었다. 워낙 인기가 많던 민국이니까 여자 만나는 거야 항상 있는 일일 테니. 은별은 민국이 다른 까닭으로 숨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 그, 그거야 잠시 보려고…."
"잠시 보려고 오는데 왜 큼직한 가방을 두 개씩이나 가져 오는데? 진짜 너 계속 그럴 거야?"
이제 강하게 추궁하는 은별. 초면인 사람이 있어 상황을 악화일로로 만들고 싶진 않았으나, 민국이 자꾸 이런 식으로 회피하려 든다면 별 수 없으리라. 이윽고 민국이 '으아아'하고 소리치고는 말했다.
"알았어! 알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여자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민국이 소리쳤다.
"임신 기간을 늦춰주는 약을 받는 대신 그 대가로 이 여자분이 제 집에 얽혀살기로 했습니다!"
"……."
"약 일년 동안!"
흑마법사가 돌아오기까지 약 일 년 동안 말이었다. 당차게 흑설 공주를 가리키는 민국. 두 여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흑설 공주를 돌아보았다.
흑설 공주는 그 시선에 그저 산뜻한 미소를 피울 따름이었다. 이윽고 예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은별은 헝크러지려는 피부 가죽을 가까스로 유지하면서 민국을 노려보았다.
"그건 지금…."
"……."
"동거를 하게 됐다… 이 말이야?"
"그렇다!"
어차피 망했겠다 뻔뻔스럽게 자포자기하는 민국이었다. 그래, 어차피 숨겨봤자 언젠간 들킬 일이었다. 지금 말하는 게 차라리 낫겠지!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라 흑설 공주가 원한 일이라는 거야! 나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러니까 살려줘!"
비굴하게 구는 서민국. 은별과 예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민국과 사귀고 있는 사이인 강은별. 그리고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미래의 아내(?)로 선언된 한예나. 두 사람 입장에선 느닷없는 다른 여자의 개입으로 일이 더 풀리기 어려워진 것처럼 보였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인가요?"
은별의 눈이 독사처럼 바뀌었다. 그녀는 언제라도 집어삼킬 듯이 흑설 공주를 바라보았다. 흑설 공주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사실이란다."
"……."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나는 저 남성에게 잡아먹힐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무엇보다 애인들이 있지 않느냐?"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닐 텐데요."
은별은 이제 적개심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예나만으로도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또 다른 여자의 개입이다. 이대로는 은별도 스트레스가 쌓이다 죽다 죽어! 흑설 공주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문제를 푸는 상대가 나라면 그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고 봐도 된단다."
"그럼…."
예나가 운을 띄었다. 그녀도 나름대로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흑설 공주를 마주하면서 예나가 물었다.
"어째서 민국이의 집에… 동거를 하려는 거죠…?"
"……."
입고 있는 옷만 봐도 돈이 많아 보였고, 물질적으로 절대 여유가 없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무슨 까닭으로 민국의 집에서 동거를 하려는 것일까? 분명 심심한 이유는 아닐 것이었다.
"그거야 이 남성에게 흥미가 있어서란다."
"!"
"……!"
은별과 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흥미! 그 단어가 뜻하는 바는 굉장히 여러가지였다. 하지만 이성이 남성에게 흥미를 갖는다고 하면 당연지사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일 터!
"후훗, 나란 녀석."
'맞을래? 맞고 싶어? 맞고 싶지? 어? 어?'
"……."
은별의 눈빛 공격에 잘난체를 하다 말고 입을 다무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고개 돌려 말한다.
"방금 전에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그래놓고 흥미라니, 저희랑 장난을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네요."
"그대가 생각하는 흥미랑은 많이 다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단다."
흑설 공주는 조금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미소를 띄었다.
"나는 이계에서 온 마법사로서 흥미라는 것도 현대인이 갖는 흥미로 정의하기는 어렵단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의가 가능하지."
"그래도, 역시 이건 좀 아닌 것 같네요."
역시 불안한 건 불안한 것이었다. 온전히 찬성해줄 만큼 은별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너그로움이면 충분하지, 대체 무엇을 또 바란단 말인가? 은별이의 강단 있는 모습에 흑설 공주가 웃음 지으면서 물었다.
"그럼 그대도 이참에 같이 동거하는 게 어떻겠나?"
"……."
"그대도 함께 한다면 나에 대한 신뢰도도 충분히 쌓을 수 있겠지. 그렇지 않나?"
흑설 공주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은별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건…."
"그건 어려운가? 하긴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니 말이지."
동거라는 게 쉬운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여자 입장에서 동거를 한다는 건 여러모로 기분이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안 좋은 이야기도 많았고 말이다.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는 것도 문제지만 내적으로도 문제였기 때문에, 은별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윽고 흑설 공주가 '그럼.'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동거를 하는 건 어떻겠나?"
"…그건 또 무슨 소리죠?"
"……?"
은별이 반문했고 예나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흑설 공주는 '한 번 봐주거라.'하면서 어느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민국의 집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문을 열지 않고 느닷없이 대치한 흑설 공주가 대뜸 손을 뻗어서 그 문을 만졌다. 이윽고 뻗었던 손을 회수한 흑설 공주가 그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
"!!!!"
"호옹이."
은별과 예나의 휘둥그런 눈이 한층 커졌다. 마법을 익히 봤던 민국은 그저 적당히 놀라는 선에서 그쳤다.
흑설 공주는 '어떠느냐?'하면서 물음을 던졌다. 그녀가 선보인 마법은 공간 변화 마법이었다. 아니, 공간 변화라기 보단 공간을 연결시켜주는 마법에 가까웠다.
민국의 집 화장실은 없어졌지만, 대신 그곳엔 흑설 공주의 집인 높다란 방이 드러났다.
"이거면 동거를 해도 편하지 않겠느냐?"
마법의 힘은 위대함을 그녀가 증명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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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하루 2편 연재입니다.
제정신이 아닐 때 1편 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