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흑설 공주는 민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인터넷 방송 비제이를 하는 것에 별반 흥미도 가지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비단 민국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유독 특이한 면모가 있어서 제안을 해오는 것이라 보긴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계에서 현계로 넘어온 마법사로서, 이미 현계에서도 즐길 수 있는 모든 취미들을 전부 경험해본 지 오래였다.
오히려 민국보다 이 사회의 숨겨진 무수한 것들을 더 많이 경험해보았다고 감안해도 충분했다.
'이렇게 해주면 되는냐.'
흑설 공주는 흑마법사를 떠올리면서 그리 생각했다. 실은 민국을 뒤로하고 이 세상을 뜨기 전, 흑마법사가 흑설 공주를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혹시나 당신에게 찾아오는 일이 생긴다면 그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남남인 사이에게 그토록 부탁을 하는 것인지 흑설 공주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단순 그의 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건 그를 만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
"그때 꿈속에서 봤던 그 마법사…."
흑설 공주가 돌아간 직후였다. 이래저래 계약을 맺은 민국은 예나에게 자초지종 이야기를 해주었다. 민국의 부름으로 늦은 시각 그의 집에 찾아온 예나는 차마 못 믿을 이야기를 들은 표정이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신을 늦출 수 있는 약이라니 말이다.
"정말… 이 약을 먹으면 임신이…"
"그래."
흑마법사도 도무지 흉내내지 못할 괴상한 마법들도 구사하던 여자였다. 입고 있는 옷에서부터 고급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것으로 가늠할 때, 실력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구나…."
예나는 민국에게서 받은 약을 내려다보았다. 민국이 건네준 그 알약은 흑설 공주가 건네준 약으로, 달랑 한 개였다. 하지만 그 한 개만으로도 기간을 늘릴 수 있는 뛰어난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기는 다치지 않고, 뱃속에서 잠시 사라진 것처럼 보이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의학으론 불가능한, 오로지 마법으로만 가능한 기술!
"1년에서 2년 정도 늦춰줄 수 있대. 정확한 기간은 측정하기 어렵고. 입덧을 다시 하게 되면 그때부터 약의 효능이 끝난다고 보면 된다고 하더라."
"으응…."
예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낙태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민국에게서 버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임신을 한 것은 민국과 예나를 이성으로서 연결시켜주는 확신의 연동선이 되어주었다. 다만 그 연동선을 짓기 위해 예나는 커플이었던 은별과 민국… 두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지. 예나 역시도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
때문에 사건을 수습할 수 있는 해결책이 등장했음에 예나는 그간의 미안함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민국아…."
"응? 왜 그래 예나야?"
기쁜 듯한 얼굴로 민국이 질문했다. 휴대폰으로 막 은별에게도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는 실정이었다. 예나는 잠시 알약을 잡고 있는 팔을 바들바들 떠는가 싶더니, 곧 뜻도 모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
"나 때문에 계속… 이런 일이 생겼었잖아… 흐윽…."
"……."
"나 때문에… 흐윽…."
민국이 받아주었다는 게 기쁘긴 했지만 미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건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그녀였으니까. 요 몇 개월간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자신의 이기적인 행보조차도 받아준 민국의 모습에 예나는 얼마나 고마우면서도 한 켠으론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민국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예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예나야."
"흐윽…."
"다행이다. 정말."
다시금 마법사에게 도움을 받게 된 민국이었다. 하지만 아직 예나에게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 *
"…이게 어제 통화할 때 들려줬던 그 약이라고?"
"그렇소만. 어떻소 은별양?"
"으음…."
은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지하게 그 알약을 살펴보는 눈빛이었다. 민국은 뿌듯한 성과를 낸 것처럼 가슴을 피고 만족한 얼굴을 지었다. 맞은편에는 예나도 있었다.
"…평범한 알약 같이 생겼네."
소감은 그게 다였다. 하지만 이전에 서로의 심리를 무의식적으로 읽게 만들었던 약. 그 약 역시도 겉보기에는 일반 약과 다를 게 없었다. 실상은 현대 의학으로 불가능한 진귀한 마법이 보유되어 있었으나 말이다.
"……."
맞은편에 앉은 예나는 두 손을 다소곳이 하고 앉아있었다. 지금 이곳은 식당. 어제 예나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눈 뒤, 민국은 다음 날인 오늘 두 사람을 만나 정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직 흑설 공주에 관한 건을 완전히 얘기하지 못했으니까.
"지금 먹으면 되는거지?"
"그래. 예나도 지금 먹으면 돼."
"응…."
이윽고 은별이 물컵 한 개를 들고 알약을 삼켰다. 예나 역시 알약을 입속에 담고 삼켰다. 동시에 꿀꺽하고 삼키는 두 사람의 모습에 민국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둘 다 몸상태에 변화가 있거나 한 거 있어?"
"……."
"……."
그 말에 즉각 반응하듯, 은별과 예나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놀란 빛을 띄면서 각자의 배를 만졌다. 마치 이제 막 불어오를 준비를 해야 할 배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몸이 가벼워."
"정말이네요…."
뱃속에 생명이 자라나는 상태에서 여자의 몸은 서서히 무거워진다. 은별과 예나는 그 증상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느끼고 있던 실정이었다. 그런데 약을 삼키자마자 그 감각이 사라짐과 동시에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길거리를 펄펄 뛰어다녀도 크게 걱정할 거리가 없을 것 같았다.
"훗, 이로써 2년 동안은 아기 없는 신혼을 겪는 셈이로군."
"……."
"누가 신혼이야?"
팔짱을 끼고 대담하게 말하는 민국의 발언에 예나는 몹시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못 마땅한 표정으로 반박하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볼 일도 끝났겠다 민국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제 가봅시다 여러분."
뭔가 좀 서두르려야 하는 민국 같았지만 은별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볼 일도 끝났고.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이 축적되어서 피로로 닥쳐 왔기 때문에 은별은 집에 가서 얼른 쉬고 싶었다.
이윽고 맞은편의 예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던 찰나였다.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이 '아…'하고 탄성을 짓더니 민국을 바라보며 묻는다.
"민국아… 저기, 어제 집에 들렸을 때… 내가 썼던 모자 놓고 온 거 같은데 받으러 갈 수 있을까…?"
"……."
어제 밤에 들렸을 때 그만 쓰고 왔던 모자를 그의 집에 두고와 버렸다. 거짓이 아닌 진짜였기 때문에 예나는 말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는 은별 입장에선 좀 평탄치 않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목 마르네. 나도 너네 집 가서 잠깐 물 좀 마시고 갈래."
어떻게든 핑계를 대면서 두 사람이 있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은별이었다. 아무래도 민국과 예나는 더 이상 '소꿉친구'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말이었다. 흑화 소주 탓이라 한들 결국 관계를 맺었고, 둘이 있다 보면 또다시….
'절대 안 돼.'
강단 있게 생각하면서 민국에게 질문했던 은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질문에 민국은 평소답지 않게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어, 아, 하하!"
"……?"
"?"
당황하는 그의 모습이 신선할 뿐더러, 낯설기까지 한 두 사람. 이윽고 민국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짐짓 어색하게 웃음을 보였다.
"어, 어, 그러니까 허허허."
"민국아…?"
"…뭐야? 왜 그러는데?"
어색하게 항변하는 민국이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왠지 오늘은 유독 집에 혼자 있고 싶은 날이라서 말이지! 허허허허, 미, 미안하지만 나중에 뵙기로 하지요 다들!"
"……."
"……."
"원래 사람이란 게 때로는 고독을 즐기고 싶어하는 동물 아니겠소? 왜 속담 중에서 '혼자 있고 싶습니다. 모두 나가주세요.'라는 말도 있지 않소?"
"…그건 애초에 속담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퍼진 문장이지. 그리고 너 좀 이상해."
"응… 민국아. 좀 이상한 거 같아."
은별의 대사에 예나도 거들었다. 민국은 '내, 내가 뭐가 이상하지?'하면서 어색하게 머리를 또다시 긁적인다. 어느새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모습. 워낙 직관력이 높은 은별답게 틈을 놓치지 않고 추궁한다.
"오늘 너네 집에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보네?"
"콜록 콜록!"
"있구나."
"없습니다."
사례가 들렸는지 기침을 하던 민국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완고한 표정을 지었다. 기습적으로 닥쳐온 물음에 많이 당황한 표정을 짓던 민국이었지만, 역시 이미지 메이킹의 천재답게 즉각 진지함으로 포장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그것이 은별의 레이더 망에 안 걸릴 리가 전무했다.
"말해. 뭐야?"
"어, 없습니다요."
"안 말하면 집에 쳐들어간다?"
"엇흠! 은별아. 때때로 남자는 말이지. 여자의 실체적인 살갗을 만지는 것보다 모니터 속의 2D 캐릭터를 보면서 딸을 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야. 오늘 나에겐 그런 날이…."
"안 되겠네."
더 이상의 변명과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미 촉이 온 은별이 거칠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민국이 '으아! 은별아!'하면서 그녀의 옷깃을 잡았으나, 은별은 내치면서 곧장 그의 집으로 전진하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살떨리는 표정으로 예나를 돌아보았다.
은별에 반해 아직 가만히 있는 예나. 하지만 그녀도 얼마지 않아….
"미안해 민국아."
"……."
"나도 확인해봐야겠어. 뭘 그렇게 숨기는 건지…."
"으아아."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민국의 집으로 전진하는 두 사람이었다. 민국은 그런 둘을 말리다가 가로막으면서 소리쳤다.
"사실 오늘 집에 괴물이 있어! 그 괴물에게서 너희들을 지키고 싶어! 그러니까 집에 오지 말아줄래?!"
"웃기는 소리하네."
당차게 무시하면서 은별은 걸음을 지속했다. 예나도 싱긋 웃으면서 마찬가지로 언동했다. 민국은 이외에도 여러 방식으로 두 사람을 말려보려고 노력했다.
"사실 오늘 내가 급똥이 마려워서, 너희들이 똥싸는 소리 들을까봐 좀 그렇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좀…."
"눈앞에서 트름도 했던 양반이 잘도 그런 소리를 하시네요?"
"민국아… 다른 세계에서 했던 네 행동이 있는데… 그걸 창피해한다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단합하는 은별과 예나. 이럴 때만큼은 죽이 맞는 사이였다. 민국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단합해서 목적을 행하려고 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제발 부탁합니다! 오늘만큼은 넘어가주세요!"
"오늘만큼은 안 돼."
"미안. 안 될 것 같아…."
"으아아아아! 차라리 이럴 거면 나를 밟고 가라!"
이젠 바닥에 드러누워서 등을 보이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당연지사 그의 등을 밟고 지나갔다. '으악!'소리를 내는 민국. 아래를 내려다보던 예나가 싱긋 웃으면서 폴짝 민국을 뛰어넘는다. 민국은 머리를 박박 긁다가 둘을 다시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한 것이다.
'대체 뭘 숨기고 있길래 그러는 건데?'
마치 도둑이 제 발저린 것마냥 난감한 표정을 짓던 민국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리는 둘이었다. 이윽고 1층 문을 열고 2층 계단으로 차근차근 올라가는 두 사람이었다. 민국은 뒤에서 바짝 쫓아오면서 그 둘을 말렸으나… 이제 답은 없는 것 같았다.
"가지마! 가면 누군가가 정액으로 너희들을 오염시킬 거야!"
"너?"
"민국이…?"
또다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으어어!'하고 소리치는 민국. 저벅 저벅. 이윽고 계단 끝자락에 도착한 은별과 예나가 정면을 쳐다보았다.
"응?"
"……."
"……."
현관문 앞에 놓인 두 개의 큰 가방. 마치 동거를 위한 물품들이 들어가 있는 가방 같았다. 그리고 그 가방 앞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는데, 고품격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와인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