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흑설 공주의 개입>
"따라와."
"어? 으어어어."
이윽고 민국이 좀비처럼 소리를 내면서 은별이에게 끌려갔다. 은별은 민국의 옷깃을 잡고 그대로 집까지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민국은 주변을 살폈는데, 이상하게도 평소에는 보이던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
"오늘 아버지가 근무 쉬셔서 두 분끼리 데이트하러 갔어. 빨리 와 좀."
괜시리 신경질을 내면서 은별은 민국을 2층까지 끌어당겼다. 민국은 그런 은별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슬슬 칼에 베인 손이 시큰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상처가 깊진 않았어도 꽤 길게 베였다. 소독도 안 하고 놔두면 독이 될 게 뻔했다.
'정말….'
자신을 구해준 건 고마웠지만 그래도 자기 상처는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경찰서에 동행할 때까지도 자기 손이 그 꼴이었는지 모를 수 있단 말인지… 은별은 도무지 납득이 안 갔다.
"들어와봐."
그리고 은별은 자신의 방으로 민국을 인도했다. 그리고 그를 침대에 걸터앉게 한 다음에 서랍 속에서 치료에 쓰이는 물품들이 담긴 상자를 꺼내들었다. 오랜만에 다뤄보는 거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소독할 때 쓰는 물건과 소독 후 써야 하는 물건은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다.
"팔 이리 내."
"이렇게?"
"그래. 잘했어."
마치 강아지 훈련하듯 대우하면서 은별은 민국의 상처가 난 곳에다가 소독약을 톡톡 뿌렸다. 은근 짜릿짜릿한 통증에 민국이 '허억'하면서 가볍게 신음냈다.
은별은 무슨 소독할 때의 신음조차도 저토록 변태스러운지 한심스럽게 쳐다보다가 면봉으로 약을 발라서 그것을 민국의 손에다가 발라주었다. 최대한 잘 스며들도록 정성스럽게 바른 은별이 다음으로는 데이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두 겹으로 만들어서 민국의 상처난 자리에다가 붙여주는 모습이었다.
"이제 어때?"
"정성스런 손길 덕분에 나의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지는구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넌 상태는 어때? 무릎은 괜찮아?"
이제 민국의 차례였다. 민국의 질문에 은별도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는지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자기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남 걱정이나 해대던 건 은별도 매한가지였다. 은별의 무릎 역시 이미 퍼렇게 물들어서 보기 흉할 정도였다.
"이번엔 내가 해줘야겠구만."
"…바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이쿠, 됐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그리고 이번엔 민국이 침대에서 내려와서 걸터앉아있는 은별의 무릎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냥 손으로 쿡 갖다댔을 뿐인데 은별은 작게 '읏'하면서 신음을 했다. 어지간히 아픈 모양이었다. 마치 의사처럼 심오한 표정으로 관찰하던 민국이 사뭇 진지해진 손놀림으로 노련하게 은별의 무릎을 소독해주기 시작했다.
"이게 소독약이지?"
"…그래."
끄덕하고 고개를 이동하는 은별을 뒤로하고 그녀의 무릎을 치료해주는 민국. 은별은 그런 민국의 성심성의있게 치료해주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가만히 침묵했다. 이윽고 치료를 하던 민국이 흘긋 은별이의 핫팬츠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핫팬츠와 허벅지의 묘한 틈 사이로 무언가가 비추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어딜 보는 거야?"
은별이의 으름장에 홱하고 '아무것도 안 봤습니다요.'하면서 다시 치료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은별이 재차 한숨을 내쉬고, 민국이 치료를 완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다시금 걸터앉는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뱃속의 아이는 괜찮소?"
"……."
사실 그게 가장 궁금한 질문이겠지. 은별은 혼자가 아니라 사실상 둘인 셈이었다. 은별은 자신의 배를 의식적으로 만진 다음에 중얼거렸다.
"…괜찮겠지. 이쪽이 아프진 않았으니까."
넘어질 때 배부터 닿았더라면 아파 크게 위험했을 것이었다. 그러지 않았음을 정말 다행이라 여겨야 할 터였다. 민국이 말했다.
"앞으로 그런 녀석들이 업신대지 못하도록 항상 곁에 있어야 겠구만."
"……."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님을 은별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책임지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번 스토커 사건을 통해 확실히 확신할 수 있었다.
칼을 들고 있는 남자였다. 그것도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해도 납득이 갈 정도로 이상한 사람. 그런 사람이 칼까지 들고 은별을 위협하고 있었으나 민국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수단을 써서라도 은별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었다. 겉보기에는 치사한 수단들로만 싸워서 굉장히 볼품 없어 보일 수도 있었으나, 그 내면적 마음으로만 따지면 민국은 정말이지….
"……."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이윽고 민국이 은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오늘 밤까지 혼자 있는 건가? 나 집에 돌아가도 혼자 있을 수 있겠어?"
"……."
은별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평소 때라면 상관없다느니 얘기하겠지만, 확실히 스토커 건으로 인해서 오늘따라 혼자 있기 영 어려울 것 같았다. 민국은 그런 은별의 묵묵부답에 머리를 쓰다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내가 곁에 있어줄게. 그래도 되지요 은별양?"
"……."
'그….'하고 말을 멈추는 은별이었다. 때때로는 진솔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지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그런 은별의 어깨를 안아주었고 은별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한 번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분위기인데, 민국은 오늘 무서웠을 은별을 배려해서인지 그런 부분으론 건들지 않았다.
"……."
은별의 마음을 요래조래 흔들리게 만든 하루였다.
* *
두 사람의 방송 컨텐츠를 보고 난 뒤로 예나는 혼자 많이 고심했다. 돌이켜보면 민국과 나눌 수 있는 취미라는 게 하나도 없었다.
사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없을뿐더러… 즐기고 나눌 대화 주제도 별로 없었다. 어찌 보면 민국과 나누는 대화 컨텐츠에 너무 소홀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저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이런 지경이 온 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은별 씨를 따라서 뭔가를 만들어야 할 듯도 싶고….'
은별은 민국과 비제이를 함으로서 서로의 직업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 같이 단합 방송도 할 수 있고, 같이 게임을 하면서 시청자들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예나는 그런 비제이 같은 취미에는 자신이 없었다. 워낙 의사소통하는 사람들도 한정되어 있었고, 사교성이 있긴 하되 밝은 타입이 아니라 비제이를 하면 여러 악플을 먹고 정신적으로 멘탈이 부수어질 지도 몰랐다.
'민국이는… 비제이말고 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을까…?'
소꿉친구 시절을 함께 해왔다는 게 우스울 정도로, 민국의 취미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요리를 좋아하고 어떤 영화 장르를 좋아하는지 그런 건 잘 알았는데… 진짜 민국이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으니까 말이었다. 분명히 변태(?)적인 그의 성향에 맞는 취미가 있을 것이었다.
'…….'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고민만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는지, 예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참으로 기가 막히게도 우우우웅…. 민국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 민국이?'
깜짝 놀란 예나가 허둥지둥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하다가 가까스로 붙잡으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휴대폰을 귀에 부착하고 목소리를 낸다.
"응… 민국아…? 무슨 일이야…?"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질문을 하자니, 민국이 기쁜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예나야! 잠깐 내 집에 올 수 있어?"
"응…? 무, 무슨 일인데…?"
민국이 소리쳤다.
"임신을 늦출 수 있어!"
* *
그러니까 때는, 은별이의 스토커와 맞짱을 뜨고 은별이를 안심시킨 뒤 밤 늦게 집에 돌아와을 때였다.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오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던 민국은 상당히 지친 몸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는데,
"밤하늘은 항상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엇?"
"마음이 더러울 땐 그 무엇도 더러워보이는 법이건만, 적어도 하늘만은 그러지 않은 것 같구나."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민국은 고개를 들었다. 설마 이 분위기는… 하고 흑마법사를 내심 떠올렸으나,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을 때 민국은 그 기대와는 다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악마다!"
검은 코트의 흑마법사와는 다르게, 귀품이 나는 귀족스러운 털가죽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흑설 공주였다. 스물 초반으로 민국보단 연상으로 보일 듯한 성숙한 이목구비. 그리고 등에서 풍기는 강렬한 기운…. 도무지 일반인은 낼 수 없는 지조 있는 카리스마에 민국은 그리 소리쳤다.
여인은 귀엽다는 듯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조차도 굉장히 분위기를 풍겼다.
"실로 독특한 아이구나. 그 세계에서 선보인 모습들도 상당히 신선했었지."
흑마법사를 대할 때하고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민국은 조금은 퉁명스럽게 계단을 올라서 현관문으로 향했다. 열쇠를 꺼내면서 물었다.
"그런데 제 집에 어연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위치야 마법이 있으니 알아서 알아내실 수 있을 테고, 흑마법사느님처럼 제 팬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신선함은 항상 살아가는 동물들을 매료시키고 흥미있게 만드는 재료이지 않느냐? 너에게 흥미가 생겨서 말이다."
"앵? 흥미?"
민국은 설마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설마 저 좋아하십니까?"
"당돌한 물음이구나. 그동안 그런 식으로 많은 여자들을 홀려 왔느냐?"
"엇흠. 이건 홀린 게 아니라 저의 성격일 뿐입니다. 제 성격에 매료된 것이 여자들이지요."
가볍게 웃음 짓던 흑설 공주가 그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막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민국은 그녀가 갑작스레 내뻗는 손에 물음표가 생긴 얼굴로 쳐다보았다.
"뭡니까? 갑자기?"
"아기를 낳는 걸 지우는 건 그릇된 행위인 셈. 서민국, 자네는 지금까지 그거 때문에 혼란을 겪다가 결심을 한 것이 아니느냐?"
"……."
"하지만 내 그 결심을 좀 더 뒤로 미룰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가 있지."
그 말에 민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뜻인지 아직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무슨 말씀인지 제가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느냐? 그럼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해줘야겠구나."
지조 있는 분위기를 풍기면서 그녀가 민국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임신을 1~3년간 늦춰줄 수 있는 약을 제공해주도록 하지. 몸 상태에도 문제가 없고 부작용도 없어. 진찰을 하면 아기가 없는 것 같지만, 나중에 알아서 지금의 아기가 추후에 생기는 약이지."
"헐?"
민국의 눈이 토끼가 되어버렸다. 세상에 그런 약이 있다고? 흑마법사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신세계 같은 제품을 감안하면 도무지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민국은 언제 흑설 공주에게 얄팍하게 굴었냐는 듯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꾹 쥐면서 말했다.
"주십시오! 아니, 주시면 좋겠습니다 누님!"
"후후."
흑설 공주가 웃음을 털면서 말했다.
"하지만 난 자네 말처럼 자네의 팬이 아니지. 자네의 비제이 노릇보단 자네라는 인간의 독특함에 흥미를 가진 인간이라서 말이야."
아무리 다른 세계라고 해도, 그런 정액 발사 난무를 하면서 쇼를 할 인간은 서민국밖에 없었다.
"내가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자네의 집에 들려서 자네가 하는 행동을 관찰하면서 놀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새로운 마법사 흑설 공주. 하지만 그녀는 오로지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