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그게 진짜야 은별아? 누군데? 누구야?"
"야! 은별이가 남자 친구 사귀었대!"
벌써부터 반이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웅성웅성. 여자 모임을 비롯해서 남자 모임의 학생들까지 하나같이 은별이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은별은 일이 순식간에 커지자 어색한 눈웃음을 지으면서 최대한 제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냥 맘에 드는 남자가 생겨서 사귀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제 소개팅은 좀 어려울 거 같아요."
"으, 으음. 그렇구나."
소개팅을 제안했던 남학생은 팔짱을 끼면서 진심으로 난처해하는 모습이었다. 은별은 반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는 여학생이었다.
단순히 예쁘장하기만 한 게 아니라 선배들한테 예의도 바르고 자기 의견을 피력할 때는 확실하게 하는 고집이 있었다. 물론 그것도 당사자가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최대한 에둘러서 배려하듯이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학생들도 은별이를 질투하면서도 필요로 하는 존재였고, 남학생들에겐 당연히 인기 만땅이었다.
근데 그런 은별이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니…! 놀랄 노자였다.
"도대체 얼마나 잘 생긴 놈이길래 우리 은별이를…."
"부자야? 집에 돈 많아?"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평범한 애예요."
들이대는 남자들의 모습에 곤란함을 느낀 은별이가 그리 중얼거린다. 복학생들을 비롯한 여러 남자 선배들이 '으아아'하면서 노골적으로 절규하기 시작했다. 은별은 그런 모습을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만무할 수밖에 없었다.
"은별이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약간 목소리가 걸걸한 듯한 느낌이 드는 한 복학생이 운을 띄어온 것이다. 다른 남학생들도 그 남학생이 등장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금이나마 어두워졌다. 은별은 그 남학생을 보는 찰나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이윽고 선배가 다가와서는 은별에게 묻는다.
"그게 진짜야? 어떤 놈인데?"
"아니… 그냥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던 애예요."
"그래? 한 번 보고 싶네."
은별은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보긴 뭘 봐? 웃기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별은 그 선배에게는 눈웃음을 그리면서 헤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학기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대선배인 사람이었다.
비록 복학생이었지만 나이가 많다 보니 당연히 대우하기도 까다로웠다. 심지어 어릴 때 조금 질 나쁘게 행동을 했었는지 그 불량함이 분위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은별은 그동안 이 선배의 모임에서 추근 당함으로서 자꾸만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것이었다.
"한 번 보여줘라. 응? 은별아."
"아… 어깨는 치워주시고…."
어깨를 에두르면서 기대려고 하는 남학생의 팔을 거부하는 은별. 그녀는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강단 있게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제 남자 친구도 좀 바빠서요… 그건 무리일 것 같아요 선배."
"그래? 그래도 한 번 어떻게든 꼭 보고 싶은데. 선배인데 안 되니?"
사실상 주변 학생들에게도 별로 좋은 대우를 못 받는 사람이었다. 다들 성인이었고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참는 것이었지, 어떻게 이런 찌질한 사람이 이런 수준 높은 학교에 들어올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은별은 짐짓 웃으면서 다시금 거절했다.
"죄송해요. 안 될 것 같아요."
"……."
"그럼 이만 가볼게요! 다들 수고하세요!"
그리고 예의 바르게 꾸벅 동기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한 은별이 가방을 매고 후다닥 반을 빠져 나왔다. 홀로 반에 남게 된, 대선배는 은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정말… 왜 이런 일이 항상 꼬이는지 모르겠어.'
마성의 은별! 그녀의 매력은 알다 가도 모르리! 물론 민국과 얽혀 있는 무수한 여자들을 감안할 때 은별은 어디까지나 독특한 개성을 가진 한 여인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반인 세상에서 일반인 기준으로 따질 때 그녀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워낙 예쁘고 사교성도 좋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호감을 갖는 남자들이 잔뜩 등장할 뿐더러 걔 중에는 당연히 질 나쁜 사람도 있는 법이지. 민국에게 몇 번 도움을 요청하려 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자기 대학 생활이고 자기가 챙겨야 하는 일이니 꿋꿋이 참아왔던 것이었다.
'그 스토커 건도 그렇고.'
오후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터라 당연히 밤은 깊었다. 겨울이다 보니까 오후만 되어도 태양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은별은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전봇대의 불빛에 의지하면서 천천히 길을 거닐고 있었다. 마침 집에 거의 다 왔다 싶을 때였을까.
"……."
어디선가 느껴지는 한기에 은별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매서운 직관력으로 가늠할 때 단순히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뭐…야?'
이윽고 떨떠름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은별.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윽고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면서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우우웅! 휴대폰이 울려온다.
"꺄악!"
일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은별이 쿵쿵 거리는 심장으로 자기 주머니 속을 뒤적거렸다. 휴대폰의 진동 소리임을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한 은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런 한 밤중에 자신을 놀라게 했음에 살짝 화가 났는지 매서운 눈빛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귀에 부착하는 은별이었다.
"…여보세요. 왜."
"아니! 왠지 바깥에서 통화하는 느낌이 드는데. 혹시 나 몰래 바람피고 있소?"
"웃기고 있네! 바람은 무슨 바람이야? 대학교 끝나고 집에 가고 있다! 왜!"
애초에 대학교에서 남자 친구 없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 모를 민국이었다. 은별은 괜시리 화가 나는 기분을 간신히 억제했다.
"그렇군. 괜찮으면 지금 한 번 보려고 했지."
"…지금 보긴 왜 봐? 밤중인데."
"우리 대한민국은 24시간 늦은 새벽에도 놀 수 있는 법. 간만에 술이나 한 잔할까 생각했지."
은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너 혼자 하세요…. 난 오늘 피곤해서 집에 가자마자 바로 잘 거야."
"그래? 그럼 잠깐 네 집 근처 갈 테니 얼굴이라도 보자."
"…왜 이러셔 자꾸? 요즘 들어 이상하게 친절하게 구는 거 알아?"
민국은 당연하단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친절해야지요. 하렘왕이 되려면 여자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법인데 그것이 결코…."
"끊는다."
"으아! 잠만!"
민국이 제지했지만 은별은 홧김에 끊어버렸다. 너무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민국도 너무한 것이었다. 책임감이니 뭐니… 나쁘지 않은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좀 뭐하지 않은가?
'그리고….'
은별은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뱃속의 또 다른 생명이 언제라도 꿈틀꿈틀거릴 것만 같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벌써 1개월 이상이 경과했고, 이제 2개월쨰가 다가올 것이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은별이의 배가 불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쯤에는 대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거란 말인가? 대학교도 다녀야 하고…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은 나이였는데….
"……."
풀리지 않는 고민에 은별은 고개를 들고 재차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또다시 그의 전화가 울려왔지만 은별은 받지 않았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기분 나쁜 감정에 대우해주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집앞까지 거의 다 당도했을 즈음이었다.
"……."
그제야 은별은 당면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오늘따라 으스스한 분위기가 풍기는 은별이의 집 대문 앞에 한 남자가 가만히 서 있었다. 은별은 순간적으로 그 남자가 서 있는 곳이 다른 사람의 집인가 의문을 품었지만, 역시나 자신이 사는 집이었다.
'…….'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은별은 집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저도 모르게 주변부터 훑게 되는 은별이었다. 워낙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에, 지금 역시도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은별…이니?"
"……."
민국의 계획은 확실히 들어맞았다. 집착형 스토커는 망상에 빠져 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했던 적이 없는 것을 마치 했던 것처럼 기억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정신병의 일종으로서, 파뿌리 TV를 보는 시청자들 중에서도 분명 그런 습성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할 터였다. 다만… 이 스토커는 해킹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해서 은별이와의 접촉에 성공한 것이겠지.
"당신… 설마…."
"……."
"당신이…!"
은별은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을 지었다. 그 남자는 보기에도 뚱뚱하고 얼굴이 기름져 있었는데, 어지간히 자기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남자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은별이에게로 몸을 돌려 몇 걸음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은별은 본능적으로 다가가면 안 된다는 걸 느끼고 천천히 몸을 물리기 시작했다.
'휴대폰… 휴대폰…!'
이윽고 허겁지겁 자기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을 뒤적이려던 은별이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순식간에 손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은별은 휴대폰을 그만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턱!
"아…!"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으면서 허우적대보지만, 계속해서 걸어오는 남자의 위압감에 결국 은별은 바닥에 있는 휴대폰을 뒤로하고 지속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는 검은 모자까지 움푹 쓰고 있어 누가 봐도 범죄 행각을 저지를 사람처럼 보였는데… 지금 풍기는 분위기 역시….
"남고딩… 하아… 어째서… 어째서 나랑은 안 만나주고…."
"오, 오지 마세요."
"나랑은 안 만나주고 그런 놈이랑 만나는 거야…."
눈빛에서부터 벌써 미친 끼가 보였다. 은별은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강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홱하고 몸을 잽싸게 돌려 도망가려는 은별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걷던 그 남자가 언제 느림보처럼 굴었냐는 듯,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은별의 손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웁!"
비명을 지르려던 은별이의 입도 그의 커다란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은별은 바둥바둥 움직이려고 했지만 역시 남자의 힘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입이 은별이의 볼 근처에서 '하아, 하아.'거린다.
"그 애보다 내가 낫잖아… 그 애보다 내가 훨씬 낫다고 은별아… 응? 은별아…."
"우읍! 으으!"
어떻게든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던 은별이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빼는데 성공한 은별이 그의 팔뚝을 이빨로 와득 깨물었다.
"아아악!"
이윽고 비명을 지르면서 은별이에게서 손을 빼는 남자였다. 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박으면서 주저앉는 은별. 남자는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문 자신의 팔뚝을 어루만지다가 은별을 내려다보았다.
"내 팔뚝을… 팔뚝을 아아아…!
'…도망가야해. 얼른 도망가서…!'
"너어…!"
이윽고 남자가 다혈질이 된 눈빛으로 강은별에게 달려들었다. 은별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가려고 했지만, '읏'하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자기 무릎을 어루만졌다.
'무릎이!'
생각보다 심하게 찐 모양이었다. 은별은 통증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막 달려들어서 은별을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에라이 자식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아!"
퍼억!
"끄억!"
강렬한 일격을 선사하면서 등장하는 한 남자! 겨울에 맞게 치렁치렁한 검은 코트를 입고 등장한 그 남자는, 강은별에게 유난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강은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후훗."
민국은 마치 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폼나게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은별은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옛날의 기억이 저도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래, 처음으로 은별이 그에게 반했던 순간…. 이때처럼 은별이가 위험할 때 도와주었던 그의 모습….
"으아아!"
이윽고 민국에게 한 대 맞고 주저앉았던 남자가 재차 일어나서 무겁게 주먹을 휘둘러왔다. 민국은 키가 큰 덕분에 물러나면서 여유롭게 피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폼나게 소리치길.
"훗, 약하…."
"으아아!"
"잠깐! 타임!"
퍼억! 또다시 날아온 주먹에 결국엔 한 대 맞는 민국이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꽉 넣고 있다 보니까 대응도 제대로 못했다. 결국 한 대 맞고 '으아아 존나 아파.'하며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은별은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