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덤벼라! 자식아!>
“정말 이것만으로 충분한 거야?”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다섯 시간 가량의 일상생활 컨텐츠가 막바지에 이르고, 현대왕과 남고딩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캠도 꺼졌겠다 쓰고 있던 가면을 얼굴에서 뺀 강은별이 물었다. 민국은 컴퓨터 전원을 종료하기 위해 마우스를 움직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겠지. 그 녀석은 너랑 알콩달콩 신혼부부처럼 행동하고 싶어 죽을 맛일 텐데, 그걸 내가 따라하고 있으니 말이야.”
“끙….”
강은별은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민국은 그런 은별을 보면서 물었다.
“역시 마성의 은별이여. 본래 그렇게 의도하지 않아도 남자를 끌어들이오? 대학교에서도 나 몰래 남자들 많이 만나는 거 아니야?”
“그쪽이나 걱정이네요. 사귀는 거 말 안하고 다니자고 얘기했던 건 너 아니야?”
민국은 어깨를 또 한 번 으쓱했다.
“이젠 상관없지요. 난 말할까 고민 중인데.”
“뭐?”
은별은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실상 대학교나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사귀는 걸 비밀로 하자고 발설했던 건 민국이 첫 번째였다. 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은별은 사귀는 것을 꿋꿋이 참아왔던 것이다.
“왜 이렇게 왔다리갔다리 한데? …어이없게.”
“왔다리갔다리하지 않기 위해 이젠 정착하려는 것이지!”
‘정착은 무슨….’하고 투덜거리던 은별이었다. 컴퓨터도 완전히 껐겠다, 민국은 ‘은별아아!’하고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은별은 느닷없는 그의 포옹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 놔! 놓으라고!”
“왜? 화장실 급한가?”
“그게 아니라! 오늘 이런 짓할 맘 없거든?!”
민국의 몸무게 때문에 졸지에 침대에 눕게 된 은별이었다. 은별은 민국을 밀쳐내려고 노력했다. 민국은 몸을 뒤로 물린 다음에 은별을 내려다보았다.
“난 오늘 한 몸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 건가!”
“내가 그쪽 발정 났을 때 치유해주는 치유제인가요? 아무튼 난 할 일은 끝났으니까 이제 그만 갈래!”
짐을 서둘러 정리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에헤이 그러지 맙시다!’하면서 그런 은별의 손목을 붙잡았다. 은별이 다시 한 번 저항을 하기도 전에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민국이 침대에 같이 누웠다. 은별이 바둥바둥거리려고 하자 민국이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그럼 오늘 그냥 이러고만 있자.”
“…….”
“아무런 짓도 안할 테니까. 응?”
했던 말에 대한 번복은 없는 민국이었다. 고로 민국은 이렇게 같이 누워 있다 한들 은별에게 어떤 수상한 짓을 할 리 전무하단 뜻이었다. 이윽고 민국의 머리 쓰다듬을 받던 은별이 한참동안 눈을 들어 쳐다보고 있다가.
“칫.”
하고 혀를 가볍게 차면서 저항을 푸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다가 가볍게 포옹하였다.
“…아래에 자꾸 뭐 닿잖아. 치워.”
“이건 내가 치울 수 있다고 해서 치울 수 없는 것. 불가항력이오.”
자꾸만 아래에 뭔가가 닿자 거슬리는 듯 뒤척이는 은별이었다. 그런 은별을 더욱 꽈악 껴안아 못 벗어나게 하는 민국이었고 말이다.
은별은 그런 민국의 포옹이 상당히 불편하긴 했지만, 한 편으론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마음에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와 함께 하노라면 머리가 아플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순간의 감정은 나쁘지 않았다.
* *
그들의 일상생활 컨텐츠를 막바지로 오늘의 생활을 종료하는 예나. 컴퓨터를 끄고 난 뒤 예나는 깊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평소 때라면 적응하긴 어려워도 유익하게 웃고 즐겼을 민국의 컨텐츠. 하지만 이따금씩 선보였던 그의 커플 방송은 예나의 심장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어 왔었다.
때문에 예나는 커플 방송을 하노라면 그 방송은 제외하고 보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 하필이면 커플 방송 중에 가장 장시간으로 진행되고, 그들의 사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컨텐츠가 방송되었다. 시청자들은 닭살 돋는다는 듯 혀를 내두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우스꽝스러운 두 사람의 드립에 [ㅋㅋㅋㅋㅋ]하고 폭소했었다.
예나는 자문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걸까?’
시청자들조차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모습이 태반이었다. 예나는 그런 채팅방을 보면서 자신이 하염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느껴졌다.
강은별과 서민국…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어엿한 방송인이었다. 인터넷 비제이로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었고 돈도 많이 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반면 예나는 두 사람에 비해 별로 내세울 게 없었다. 또한… 민국과 어울릴 만한 취미도 없었다.
“…….”
그러다 보니 서로 간의 취미를 가지고 공유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예나는 아슬아슬한 질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건 확실히… 예나도 민국과 뭔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함을 깨닫게 만들었다.
“…….”
불끈 주먹을 쥐는 예나였다. 그건 그녀 나름대로의 결심이라고 볼 수 있었다.
* *
하루가 흘렀다. 정말 아무런 짓도 안하고 잠만 잔 은별과 민국. 은별은 따뜻한 햇살이 자신의 얼굴에 비추자 ‘으음….’하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별로 떡지지 않은 머리카락으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은별이 눈을 비빈다.
“…….”
옆에서는 민국이 눈을 감고 아직 잠에 들어 있었다. 은별은 멍해 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자 그런 민국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잠자는 모습도 잘 생겼다.
‘…일어나자마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은별은 고개를 홱홱 저은 다음에 자기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민국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화장실로 곧장 향하려던 은별이었다.
“꺄악!”
돌연 느껴진 반동의 힘에 은별이 진심으로 깜짝 놀라면서 비명을 질렀다. 몸이 다시 침대 쪽으로 기울어지자 은별이 홱 고개를 돌려 민국이 있는 쪽을 보았다.
“…야!”
“허허.”
은별의 강렬한 한 마디였고, 민국이 허허 하고 웃었다. 그 역시 지금 막 일어났는지 눈을 비비고 있었다. 이윽고 은별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로 민국이 물었다.
“깨어났소 은별 낭자?”
“일단 잡고 있는 옷부터 때시죠? 나 세수해야 하니까.”
“넌 세수 안 해도 예쁜데.”
“…헛소리 말고 빨리 손 때.”
그리고 민국이 손을 때자 천천히 화장실로 향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면서 개운하게 기지개를 했다.
“아침은 먹고 갈 거지?”
“…그래.”
연예를 하는 커플답게 같이 잠을 잤다고 해서 큰 감정은 안 느끼는 두 사람이었다. 이윽고 얼굴을 청결하게 세안하기 위함에 화장실로 서둘러 들어가는 은별이었고, 민국은 떡진 머리로 곧장 부엌으로 향하려 했다.
“으어어.”
그러다가 또 개운하게 하품을 한 뒤에 고개를 홱 컴퓨터 쪽으로 돌리는 민국이었다. 컴퓨터의 캠은 확실히 껐으니까 아무 이상도 없는 거겠지. 하지만 민국은 캠을 보는 순간 그 스토커의 이야기가 뇌리 속에 다시금 스쳐 지나갔다.
“…….”
녀석이 언젠간 찾아올 것이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민국이었다.
* *
“지는 온니찡이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지여.”
“방송 봤냐?”
“이응이응!”
은별이를 돌려보낸 뒤 대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서라의 집으로 온 민국이었다. 기말고사를 앞둔 서라에게 협박을 당해 항상 그녀의 집으로 찾아와 공부를 가르쳐주는 실정이었다. 서라가 볼펜을 흔들다가 민국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어떻게 야동을 찍기 전의 모습을 방송으로 담을 수가 있져? 시청자 중에는 유아들도 있을 거임여!”
“그러네. 너도 유아였지.”
“부들부들! 이렇게 가슴 큰 유아 보셨음?”
확실히 유아 치고는 큰 편이었다. 그러나 굳이 가슴을 강조할 필요는 없으리라. 서라가 대담하게 가슴을 펴보이자 민국이 은근슬쩍 만지려는 손짓을 하였다. 당연지사 ‘히이익’거리면서 몸을 물리는 서라였다.
“변태의 마수에 덮침 당할 뻔함! 하마터면 하렘덮밥 찍을 뻔했네요.”
“현실의 하렘덮밥은 상당히 위험한 법이지. 서라 너는 예쁜 편이고 덮치고 싶지만 아동청소년 위반 법에 의거해서 내 끝까지 참아주니 고마운 줄 알아라.”
“처음으로 여성부에게 고마움을 느낌!”
어찌 됐든 간에 민국은 계속해서 서라의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서라는 공부를 하거나 어떤 특정 분야의 일을 진행할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높은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외모만큼 내적으로도 타고난 면이 없다면 사실상 거짓말이겠지.
“요즘은 학교생활 어떠냐? 애들에게 아직도 질투 받냐?”
“히로인은 항상 시샘을 받는 법이지여. 온니짱의 친척 오빠 쉴드로 조금은 살림살이가 나아졌지만여.”
확실히 민국이 그때 거짓말을 쳐준 게 유효한 모양이었다.
“근데 간혹 온니찡 소개시켜달라고 얘기 들어오는데 그건 어떡함여?”
“후후,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헐! 무책임하시네여 온니찡! 만나서 바람이라도 피우다가 칼에 찔리셔야 하는 거 아닌 가여? 어찌 그리 무책임하실 수가 있져!”
“바람 피우다가 칼에 찔리는 게 더 무책임하다 자식아. 빨리 문제나 풀어.”
“먼저 질문하셔놓고 화제 돌리기라니 읭읭.”
다시금 공부에 몰두하는 서라였고, 민국은 그런 서라를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서랍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눈에 밟히는 공책이 한 개 있었다.
“야 서라야.”
“읭? 왜 그러셈여?”
“이거 한 번 봐도 되냐?”
민국이 꺼낸 것은 빨간 공책이었다. 그 공책에는 ‘나님의 일기장데스요!’라고 적혀 있었는데, 딱 봐도 서라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일기첩 같이 보였다. 그것을 본 서라가 화들짝 놀라면서 일기장을 두 손으로 콱 움켜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됩니다 데스요! 행님찡 이거 보시면 지 진짜 죽을 거임요!”
“뭐야? 대체 뭐가 적혀 있길래 그래?”
“보면 헨타이! 언니찡들에게 말해 버릴거임!”
완강한 고집으로 나오는 서라의 면모는 실로 낯선 것이었다. 민국은 그녀의 그런 행동에 ‘쩝’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붙잡고 있던 공책을 놓았다. 서라가 안도한 듯이 그 공책을 자기 품안에 꽉 붙들어 매는 모습이었다.
“나한테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써져 있나 보구나 아무래도.”
“의잉….”
서라는 말은 않고 그저 그렇게 중얼거렸다. 보여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공책 안에는 서라가 그동안 생각하고, 그동안 느껴온 감정들이 직설적으로 전부 적혀 있었으니까 말이었다. 이 솔직한 내용을 민국이 보기라도 한다면 아마 지금 두 사람의 사이는 달라져도 크게 달라질 것이었다.
서라는 그가 보지 못하도록 책상 맨 서랍 아래 속에 넣었다.
“안 뺏어가 이놈아.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지의 처녀막 같은 보물단지에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게 할 겁니다여.”
“와, 그럼 나 방금 네 처녀막 만진 셈이냐?”
가벼운 성드립이 난무하는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라가 ‘엇’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무니찡 오셨나 봐여.”
“그래? 나가서 인사해야겠네.”
“헤헤, 나도 같이 가져!”
그리고 밖으로 나간 민국과 서라가 돌아오신 서라의 어머니께 인사를 할 따름이었다. 서라의 어머니는 이미 민국을 한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자상하게 대우해줄 따름이었다.
* *
그로부터 이틀이 흘렀다. 은별은 대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소개팅을 받으라는 사람들의 제안을 받고 있었다. 완강히 거절해도 자꾸만 제안을 해오니 그녀도 슬슬 미칠 지경이었는데….
‘이젠 말해도 상관없어.’
불현듯 합동 방송이 끝나고 민국이 무심코 던졌던 그 말이 떠올랐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은별. 그런 그녀를 향해 계속 제안하는 대학교 선배.
“응? 은별아.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한 번 소개 좀 받아줘라. 정말 너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죄송해요.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아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은별은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 사귀게 되었거든요.”
“나, 남자친구?”
“네.”
은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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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한 편 못 썼네요....
양해 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