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생각해보면 은근히 사람 약 올린단 말이지!’
소매까지 걷는 남고딩이었다. 돌이켜보면 민국은 몇 번이고 은별을 농락하거나 말로 자극한 적이 있었다. 다만 원래 그런 놈이었고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닌 지라 은별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고 노력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거기에다가 이젠 여자 둘을 책임지겠다?’
사실 제일 큰 앙금은 그것이었으나, 남고딩은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방송 중에 사적인 문제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좋은 결과도 없을 것 같고 말이었다. 이윽고 남고딩과 현대왕이 반대 쪽 손을 내밀어 깍지를 꼈다.
엄지만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깍지를 착용한 두 사람. 각오를 다지고 있는 남고딩에 반해 현대왕은 여유 만만이었다. 그 미소가 심히 맘에 안 들었던 남고딩이 소리쳤다.
“각오하세요 현대왕 씨. 그 여유 만만한 모습은 금방 사라질 거예요.”
“기대되는 구나 낭자여. 어디 한 번 덤벼 보거라.”
여유 있는 현대왕의 모습에 집중하는 남고딩.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현대왕의 엄지 손가락에만 집중되었다.
‘시작하는 즉시 눌러버릴 거야! 아주 꾸욱!’
진짜 온 힘을 다해서 꾸욱 눌러버릴 것이다. 남자인 현대왕조차도 경악을 할 정도로, 말이었다. 이윽고 현대왕이 스타트를 위해 동전을 위로 던졌다. 책상 위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동전. 그것을 확인한 현대왕이 고개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딸랑! 책상으로 떨어진 동전이 소리를 냈고 그것이 스타트의 신호였다.
[오오오오오!]
[시작!]
그리고 두 사람의 실제 엄지손가락 배틀을 구경하는 시청자들은 열정 어린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커플 방송이라면 이런 게임을 한다고 가정할 때 ‘어머 자기야, 약하게 해줘~.’,‘아잉 우리 자기, 당연히 봐줘야지~.’하면서 게임을 하기 마련이다.
그럼 닭살이 돋은 시청자들이 열등감에 부들부들 떨면서 야유라도 보낼 텐데… 현대왕과 남고딩은 타 커플들과는 다르게 진지하게 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가면을 쓴 남고딩의 눈빛은 그 무엇보다도 살벌했다.
‘지금이야!’
스타트 신호가 울려 퍼지는 순간 남고딩이 집중하면서 엄지를 내렸다. 그녀의 엄지가 향한 곳은 현대왕의 엄지손톱 위였다.
현대왕은 여유로운 미소로 그 공격 패턴을 읽은 듯 엄지손가락을 뒤로 확 뺐다. 졸지에 허공을 젓게 된 남고딩이 엄지를 다시 회수하면서 좌우로 까딱까딱거렸다.
공격은 않고 뒤에 멀찍이 물러나서 지켜보는 현대왕의 엄지손가락에 남고딩이 도발했다.
“뭐하세요 현대왕 씨? 자신 있다면서 왜 도망자 행세를 하시는 거죠?”
“우리 고딩이 엄지손가락 길이가 긴 지 아닌지 측정 중이랍니다.”
현대왕은 남자 중에서 유독 손가락이 긴 편이었다. 고로 엄지손가락도 당연히 타인에 비해 훨씬 길 수밖에 없었다.
반면 남고딩은 여자 중에서 평범한 수준의 길이었다. 손가락이 예쁘고 손톱도 예뻤지만, 그건 길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여유로운 현대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맘에 남고딩은 다시금 ‘씨이….’하면서 달려들었다. 엄지손가락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남고딩이었다.
그에 반면 개미를 피하듯 가볍게 피해 보이는 현대왕의 엄지손가락이었다.
“호이호이!”
“…….”
“아따, 여유롭구만.”
제대로 자극하는 현대왕이었다. 대놓고 엄지손가락을 완전히 아래로 내려서 잡아볼 테면 잡아보라는 듯이 도발까지 한다. 남고딩은 또 그것에 낚여서 건드렸다가 허공에 헛손질을 하고만다. 부들부들 어깨를 떨며 남고딩은 솟아오르는 화를 식혔다.
“으으….”
“설마 고딩아. 이거 가지고 화내는 건 아니지? 우리 어른인데! 이거 가지고 화내는 건 아니지?”
“화 안내!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처럼 재롱을 떨며 도발하는 현대왕. 화 안 낸다면서 내고 있는 남고딩. 두 사람의 모습에 그저 시청자들은 [ㅋㅋㅋㅋㅋㅋㅋ]웃을 수밖에….
“이얍!”
“똑바로 해…! 이!”
이윽고 현대왕의 빈틈을 발견한 남고딩이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의 패턴을 어느 정도 읽어낸 남고딩이 궤적을 그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휘익! 찰나의 방심을 기회로 노린 남고딩이 마침내 현대왕의 엄지손톱을 꽉 누르는데 성공했다.
“…됐다!”
“오오! …아야아야!”
도발에 대한 앙금을 풀듯 있는 힘껏 누르는 남고딩이었다. 현대왕은 졸지에 엄지손톱이 허옇게 될 정도로 크게 짓눌리고 말았다. 이윽고 3초간의 카운트가 끝나고 게임에서 승리한 남고딩이 진심으로 두 팔을 벌리면서 좋아했다.
“이겼어! …바보야 부럽지? 이겼다구! 내가 이겼어!”
‘시청자 여러분들! 저 이겼어요!’하면서 기쁨의 세레나데로 두 손을 입술에 붙였다가 뽀뽀하듯이 쪽쪽 보내는 남고딩이었다. 시청자들은 [오ㅋㅋㅋㅋㅋ]하면서 웃음과 동시에 축하를 보냈다.
“어떻게 남자인데 저한테 진대요? 네? 현대왕님? 어떻게 저한테 진데요!”
“…….”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진심으로 좋아 죽겠다는 남고딩. 하지만 현대왕은 가만히 그것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한참을 좋아라 하던 남고딩은 뒤늦게 조용해진 분위기를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
돌이켜보니, 자신이 너무 생각 이상으로 오바했단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얼굴이 조금씩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현대왕은 그런 남고딩을 보다가 ‘하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보면서 정색을 하고 말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여자입니다.”
“뭐, 뭐가 이런 여자야?!”
“저랑 게임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여자… 참으로 귀엽지 아니할 수가 없군요.”
애초에 그녀를 게임에서 진심으로 이기겠단 생각도 안한 현대왕이었다. 당연지사 조금 봐준 것도 있었다. 남고딩도 뒤늦게서야 그것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심하게 붉어진 남고딩의 얼굴에 현대왕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역시 남고딩은 저 없이는 못 사는 여자인가 봅니다.”
“누가 무슨…! 빨리 벌칙이나 받으세요!”
잽싸게 화제를 돌리려고 노력하는 남고딩이었다. 원형 필통을 손에 쥐면서 현대왕에게 보여주는 남고딩. 그 안에 담겨 있는 무수한 막대기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벌칙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현대왕은 그 중에 아무거나 손으로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막대기 아래부분에 숨어 있던 글자를 읽는다.
“뭐라 적혀 있어?”
남고딩이 묻자 현대왕이 ‘훗’하면서 막대기의 글자를 보여준다.
“볼에 뽀뽀하기.”
“뭐어?”
장난인 줄 알았으나 진짜로 볼에 뽀뽀하기라 써져 있었다. 남고딩은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누가 누구한테?”
“내가 너한테겠지?”
“…무슨 벌칙을 이런 거로 했어? 이런 게 벌칙으로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우우우우!]
[노답이다 현대왕! 어떻게 벌칙을 그런 닭살 돋는 거로 하냐!]
남고딩의 말에 철저히 동감한다는 듯 야유를 보내는 시청자들. 하지만 현대왕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늘은 이런 벌칙이 나을 거 같아서 말이야.”
“…….”
그리고 현대왕의 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낸 남고딩이었다. 그렇다. 오늘의 방송은 시청자들의 재미는 둘째, 스토커를 자극하기 위함이 첫째였다. 고로 현대왕은 스토커를 최대한 자극시키기 좋은 벌칙으로 만든 것이었다. 유독 커플들만이 할 수 있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첫 번째로 나온 벌칙이 이런 식이라는 건, 다른 벌칙들도 하나같이 이렇게 달달한 느낌이 나는 것이란 뜻 아닌가? 이 부분은 전혀 짐작하지 못한 남고딩이었기에 꽤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당황하는 그녀를 향해 기습 뽀뽀를 하는 현대왕이었다. 쪽!
[으아아아아!]
[ㅅㅂ! 내 눈! 내 눈!]
[남고딩니늄 ㅠㅠ]
“…….”
그녀가 방심하는 사이에 볼에 뽀뽀를 한 현대왕이 몸을 물렸다. 몸을 물리던 도중 입가에 그려졌던 그의 소년 같은 미소에 남고딩은 잠시 벙이 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두 사람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고로 뽀뽀를 한다 한들 가면의 차디찬 감촉에 하는 느낌밖에 들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스토커에게 자극을 주기엔 충분할 듯싶었다.
“여러분, 지금은 가면을 쓰고 했지만 평상시에는 맨 얼굴에다가 합니다.”
“…….”
“뽀뽀는 기본이고 입술 접촉도 기본이지요. 혀로 할짝할짝 키스도….”
“조용히 해.”
가볍게 그의 이마를 톡 건드리는 남고딩이었고, 그렇게 다른 게임이 진행되었다. 발씨름부터 팔씨름, 혀로 팔꿈치 닿기 등등… 주로 남자인 현대왕에게 유리한 게임이었으나 대놓고 패배해주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 현대왕의 배려가 눈꼴 시렸던 시청자들의 강한 야유도 빗발쳤다.
[아 나갈래 현대왕 노답이다.]
[커플이라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궁시렁거리는 시청자들. 현대왕이 한 마디 했다.
“야 이것들아. 야동 볼 때나 소설 볼 때는 대리만족 느끼면서 왜 커플끼리 쌰바쌰바하는 걸론 대리만족을 못 느끼냐? 어리석은 놈들.”
그리고 여러 차례 게임을 진행하면서 남고딩은 얼굴이 자꾸만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같이 벌칙들이 애인이 애인에게 선사하는 따뜻한 스킨십 종류였기 때문이다.
“진짜 벌칙 이런 거밖에 없어?”
“어차피 이게 마지막 판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번 게임에서도 남고딩이 승리했다. 그리고 벌칙을 고르자니….
[사랑한다고 멘트해주기]
지금까지 나왔던 스킨쉽 벌칙에 비하면 그나마 쉬운 편에 속하는 벌칙이었다. 하지만 그 벌칙을 본 남고딩은 왠지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사랑한다.
어찌 보면 정말이지 하기 쉬운 말이었고, 어찌 보면 정말이지 낯부끄럽고 보통의 용기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현대왕은 남고딩에게 몇 번이고 사랑한단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남고딩은 현재 혼란스러운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남자친구인 서민국이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는 두 여자를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그건 어찌 보면 강은별만을 사랑하겠단 소리가 아니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사랑한단 소리를 듣고 받아주는 게 과연 올바른 행위일까? 지금 그와 이렇게 합동 방송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기 신념에 어긋나는 실로 우스운 행위인데….
“…….”
그때였다. 남고딩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돌린 현대왕이었다.
상념에 잡혀 있던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그의 행동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현대왕은 그런 남고딩을 상당히 진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캠으로 방송을 구경하는 시청자들은 그런 현대왕의 눈빛을 완전히 판단하진 못할 것이었다. 당면에 있는 남고딩을 제외하고는….
“사랑해.”
“…….”
“사랑한다 은별아.”
그리고 굳이 할 필요 없는 포옹까지 하는 현대왕이었다. 그런 현대왕의 스킨쉽에 시청자들은 야유를 퍼부었고, 모태솔로인 4분의 2가 방에서 나갔지만, 그래도 오늘 방송에 만족하는 현대왕이었다.
남고딩은 그의 갑작스런 고백과 더불어 또다시 찾아온 포옹에… 혼란스러운 자신의 입장을 느끼면서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꼈다.
* *
“크으으! 나쁜 노무 새끼!”
쿵! 강하게 책상 서랍을 발로 밀치는 남자. 그는 격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현대왕의 방송을 보면서 말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고딩… 자신만이 알고 있을 남고딩…. 그녀를 위해 편지까지 준비하여 우체통에 넣기를 세 번! 자신의 자존심이 산산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개자식! 부셔버리겠어!”
그러나 현대왕의 계획은 얼추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일정을 좀 더 빨리 앞당기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