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11화 (211/369)

211화

“민국아~ 요즘 많이 바쁘니? 학교 끝나면 빨리 돌아가네.”

“맞아 맞아! 그러지 말구 우리랑 좀 놀아주라~ 왜 그렇게 바빠?”

이곳은 서민국이 다니고 있는 대학교. 오늘도 많은 여학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민국이었다. 민국은 짐짓 영업용 미소를 지으면서 여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도 너희들이랑 같이 놀고 싶은데 일이 자꾸 생겨서 말이야.”

“치~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진짜인 걸 어떡하겠어. 하지만 너희들이랑 놀고 싶은 것도 진짜 내 마음이야.”

그리 말하면서 여학생들을 향해 미소 지어주는 민국. 그러자 여학생들의 면면이 홍조로 일음과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꺄아!’하고 좋아하는 여학생들. 민국은 그런 여학생들을 향해 줄곧 미소 짓다가 몸을 돌렸다. 교수님이 강의를 하기 위해 앞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교수님 들어오셨네. 일단 수업하자.”

“응! 알겠어!”

“나중에 꼭 약속 없을 때 얘기해줘야해!”

“그럼 그럼.”

여학생들의 그런 노골적인 제안에 민국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민국은 그녀들의 파티에 초청을 받는다 한들 조금도 갈 생각이 없었다. 방송하랴 여자친구 만나랴 바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민국이 고심하고 있는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여자를 책임지기 위해선 내가 그만한 능력이 되어야 한다.’

요즘은 맞벌이를 해도 한 가정을 먹여 살리기가 굉장히 어려운 시대였다. 물론 민국이나 은별이나… 솔직히 직원들의 몇 배는 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래 하나의 분야에서 랭킹 1위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으면 무수히 벌 수 있는 게 사실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더 능력이 있어야 은별이도 납득이 갈 터!’

단순히 물질적으로 풍부하다고 해서 은별이를 납득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필수적인 조건은 분명했다. 고로 민국은 요즘 들어 어떻게 돈을 더 벌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상태였다.

‘땅을 사봐? 아니면 사업을 해? 스폰서를 더 구할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으나 확실한 건 없었다. 땅을 사려고 한다면 일단 부동산 공부를 해야 하는 건 백퍼 중에 백퍼였다.

사업 또한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실패를 하면 정말 큰 낭패를 볼 게 불보듯 뻔했다. 투자 없는 사업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뭣도 모른 채로 투자만 하면 망하는 건 분명한 사실! 민국은 안 그래도 요즘 스폰서 제안이 계속해서 들어오는데 스폰서나 쫙쫙 받아버릴까 고민했다.

툭!

“…….”

그때였다. 어디선가 민국의 책상으로 쪽지가 날아왔다.

민국은 쪽지가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여자가 웃음 지으면서 민국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딱 봐도 민국에게 호감이 있어서 말을 거는 모양이었다.

민국은 그 쪽지를 확인했고, 오늘 시간이 있냐는 그 물음의 내용을 보자마자 혀를 내둘렀다.

‘인기가 많은 것도 참.’

물론 인기가 많기 때문에 아쉬울 건 없었다. 여자들이 먼저 대시를 걸 정도로 민국이 비주얼도 능력도 가치가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민국은 이제 슬슬 자신이 여자 친구가 있음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말할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넌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거잖아!’

예전에 은별이와 다퉜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은별이도 대학교에 남자 친구가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민국이 먼저 자기 대학교에 당당히 발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제 이런 질 나쁜 짓도 그만해야겠지.’

아기가 생기니까 철이 든다고 해야 할까! 서민국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어른으로서 더 성숙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 물론 스스로 그리 생각하는 것이었다.

민국은 쪽지를 던져준 사람에게 내용을 써서 전달해주었다. 내용은 당연지사 거절의 내용이었다.

약속이 있어 바쁜 관계로 진심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적혀 있었다.

‘그럼 공부나 해볼까.’

칠판에 강의를 하는 중인 교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린 민국이었다. 볼펜을 쥐고 공책에 내용을 요약해서 간결이 적어 나가려고 하자니,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

등 뒤였다. 민국은 고개를 돌려 교실 뒷문을 보았다. 그러자 늦게 들어온 학생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차마 앞줄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기 싫었는지 맨 뒷줄에 앉았는데, 하필이면 민국의 뒤였다.

‘처음 보는 학생이네.’

민국은 흘긋 곁눈질하면서 그 학생을 살폈다. 자신의 뒷줄에 앉은 학생은 여학생이었는데 머리가 굉장히 길고 꽤재재했다. 머리를 감기는 감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부스스했고, 눈까지 가릴 정도로 길어서 도무지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았다. 옷도 어찌나 싼티가 나던지… 정말 가난한 느낌을 내기도 했다.

‘이런 학생이 우리 반에 있던가?’

그런 의혹이 들 정도로 존재감이 어지간히 없는 학생 같았다. 벌써 1년이 지나가는 중인데도 민국이 모를 정도였으면 말이었다.

민국은 왠지 흥미가 생겨서 그 학생을 줄곧 지켜보았다. 겨울이라 다들 하나같이 점퍼나 두꺼운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여학생은 그것도 없었는지 가벼운 점퍼에서 핫팩을 꺼내 호호하고 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막연히 지켜보던 민국은 순간 그녀와 눈이 맞는 걸 느꼈다.

“……!”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그녀의 눈빛이 민국과 맞닿는다. 민국도 일시적으로 시선이 맞닿았음을 느꼈다.

민국은 피하지 않고 쳐다봤지만, 여학생은 마치 사람과의 접촉이 익숙지 않는지 고개를 푹 내리 숙이면서 머리카락을 완전히 내렸다. 그 모습에 민국은 뭔가 꺼름직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씨익.’

하고 묘한 미소를 피우는 그 여학생의 입술을 가까스로 포착하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와 소름.’

사람의 첫인상으로 전부를 판단하는 건 올바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첫인상을 꾸미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올곧게 평가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가난해도 머리 손질이나 손톱 손질은 가능할 텐데… 지저분한 느낌과 더불어 방금 전 피어오른 입가의 미소에 민국은 뭔가 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나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앞에 보고 공부나 해야겠다.’

이윽고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는 민국이었다.

“허허, 이 노답인 인간들 보게나.”

민국은 대학교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가 현재 보고 있는 것은 파뿌리 TV 홈페이지였는데, 비제이 막장 랭킹 1위에 도달하는 민국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많은 비제이들이 막장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막장 짓을 한들 민국의 위치를 뺏어올 능력은 현저히 부족한 것 같았다.

“고작 하는 거라곤 라면 먹고 토하기, 요구르트 먹고 토하기뿐이로군. 후후후후. 보살핌 받아야 마땅한 녀석들.”

코웃음밖에 안 나오는 민국이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한 때 민국은 파뿌리 TV에서 제일 논란이 가는 비제이로서 수많은 여성 비제이들, 남성 비제이들을 우후죽순 괴롭혀 왔었다.

논란을 만들고 키워드를 만들기 일쑤였던 인물로서… 단 한 번의 방송으로도 수많은 여파와 악영향을 가져왔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철이 들어 자제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많은 막장 비제이들은 민국의 능력을 따라오기 어려워 보였다.

‘후후, 이 녀석은 너무 자신을 보호하는군. 그래서야 방송인이 될 수 있겠어? 자고로 진정한 방송인이란 방송을 위해 자기 수치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심심풀이로 막장 비제이들의 실력을 보면서 평가를 하던 민국이었다. 여러 방송 홈페이지를 들어가면서 일일이 확인하고 있자니… 돌연 어떤 방송 비제이의 게시판이 눈에 띄었다.

[아이디 해킹 당한 건으로 고소하고 왔습니다.]

“해킹이라.”

비제이가 올린 그 게시글의 제목을 보는 순간, 민국은 예전에 해킹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은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든 손에 넣겠다며, 민국에게 온갖 협박을 하던 해킹범. 그날의 사건에서 승리자는 민국이었으나, 그래도 꺼림칙한 면이 적잖이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장난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네.’

우선 해킹을 당한 건 진실이었으나, 해킹범이 했던 발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일 진짜라면 그런 놈은 은별이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적잖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인물이었으니까.

‘만일 그에 관한 일이 생긴다면 내 진짜 혼신의 힘을 다해 밟아주리라.’

은별이에게 찝적거리려고 했던 해킹범을 떠올리면서 민국은 그리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였다. 우우우웅.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 것이다. 민국은 느닷없는 울림에 ‘응?’하면서 휴대폰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오오!”

희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임신 건에 대한 결정을 한 이후로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한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민국은 좋아라 하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은별 낭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오! 혹시 나랑 한 몸이 되고 싶어서?”

“…무슨 전화만 하면 한 몸이야? 됐고.”

은별은 퉁명스러웠다. 사실상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 애매한 관계를 지속하기도 뭐한데, 민국은 둘 다 책임지겠다고 하고 있었으니까.

“할 말이 있어.”

“뭔데? 헐, 설마 헤어지자는 건 아니겠지? 그건 죽어도 안 된다!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책임지는 능력남이 될 거야! 그러기 위해서 난 지금 진짜 여러모로 열심히…!”

“닥쳐! 지금 그런 거 말하려는 게 아니거든?”

은별의 윽박에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저자세로 나오는 민국이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요….”

“…문제가 생겼어. 너랑 내가 하는 일에 관련해서.”

“너랑 내가 하는 일?”

“그래.”

은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장소는 집앞 대문 우채통이었고, 또 다른 편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에 적힌 내용을 보는 순간 바로 민국에게 전화를 건 것이고 말이다.

“아무래도 그 해킹범… 나에 대해서 다 알았나봐.”

“…….”

“3일 동안 편지가 세 통이나 왔어.”

“지금 바로 갈게.”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국이었다. 입고 있는 옷에서 점퍼만 더 입고,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 *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도, 당신의 몸도, 당신의 마음도, 모두 다 사랑하고 있어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비제이로서 잘 나가고 있지요. 당신도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전 그런 당신도 사랑합니다.]

[그 녀석은 좋은 녀석이 아니에요. 그 녀석보다 제가 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겁니까?]

[언젠가 찾아가겠습니다. 당신 앞에.]

“대충 이런 내용이야.”

편지를 전부 보여주면서 은별은 그렇게 말했다. 손으로 쓴 글씨로 보이는 편지들을 하나 하나 읽어보던 민국은 진지하게 말했다.

“이 새끼가….”

“…….”

“은별이 예쁜 건 알아가지고….”

퍽!

“지금 그게 문제야?!”

“아이고 내 정강이야.”

씩씩거리면서 한 대 때리자 민국이 솔직하게 소리쳤다.

“야 하지만 너 예쁜 건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이런 병순들이 꼬이고 난리지!”

“…내가 예쁘고 자시고 전에! 우리 신상을 알았다는 게 더 중요하잖아!”

붉게 물든 은별이의 말에 민국이 고개를 내려 다시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그렇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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