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10화 (210/369)

210화

“사스가 하렘왕….”

“훗. 나처럼 잘난 놈이 한 여자에게 장가를 간다면 나머지 여자들을 울리는 법. 그건 결코 인류의 먼 미래에 좋은 행위가 아니지.”

“인류의 먼 미래까지 걱정하는 사스가 하렘왕.”

장난으로 받아치는 서라였지만 왜일까, 얼굴 가죽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건. 서라는 짐짓 미소 짓다가 말했다.

“설마 폭풍 강간을 하신 건 아니시겠졈? 내가 아는 행님은 그러고도 남을 존재인뎅!”

“아니다 이놈아. 내가 아무리 하렘하렘거려도 진짜 그런 계획을 행동으로 옮길 놈이 아니야.”

‘오올~’하던 서라였다.

“그럼 우째 그리 된 건데염?”

미연시 세계의 기억을 공유 받았을 때 그 사실이 진짜일 리 없다고 조금은 생각했었다. 하지만 흑설 공주라는 작자를 통해 민국은 그런 마법의 세계로 당도했고, 거기서 경험한 것들이 절대 거짓이 아님을 서라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욱더 놀라고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은별이야 민국의 남자친구니까 어쩔 수 없다 쳐도… 한예나는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알아서 뭐하게? 나중에 밤에 상상하면서 위로하려고 하냐?”

“헠헠. 들켜버렸네염!”

어느 덧 밥숟가락도 내려놓고 이야기에 몰두하려는 듯한 서라의 번쩍이는 눈빛에 민국은 ‘훗’하고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스윽 손을 들어 서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대뜸 머릿결을 만지는 그의 손길에 서라는 조금이나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민국이 말했다.

“아무리 나라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여자들의 얘기는 함부로 못하니까 모른 채 해줘라.”

“이잉… 온니찡답지 않게 줏대 있네여…. 하지만 그 줏대! 나쁘지 않아여!”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칭찬하는 서라였다. 민국이 가볍게 미소 짓다가 다시 식사를 하려고 들자, 서라가 ‘아차차차! 가랑이 사이에서 신호가!’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급급해진 발걸음으로 후다닥 화장실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장난삼아 중얼거렸다.

“문 열어두고 볼 일 봐라. 구경하면서 밥 먹게.”

“히이익. 아청 범죄의 유망주!”

그렇게 두 사람 간의 오붓한 식사도 끝이 나고, 민국은 서라의 집에서 오후의 시간을 보내었다. 사실상 서라가 미연시 세계에서 벌였던 민국의 행위를 주변 사람에게 이를 리 전무했다. 또한 그것을 빌미로 민국을 협박하여 노리개로 만들 취미도 없었다.

그저… 궁금했던 것이다. 은별과 예나, 그 두 여자와 있던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렇군여.’

서라는 생각했다.

‘이제 제가 있을 자리는 없겠네여….’

두 여자를 책임지겠다느니 뭐니 하면서, 사실상 한국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부다처제를 선언하는 민국이었으나, 실상 그 자리에 서라가 껴들을 자리는 없을 것이었다. 애초에 은별이나 예나나 서라는 그저 귀여운 동생으로 생각할 뿐… 또 다른 천적이라 감지하지도 않을 테지.

‘…….’

그렇게 슬슬 서라는 마음을 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번쩍! 행님찡! 내가 깜빡깜빡하고 있었는데 한 가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으유!”

“뭔데?”

“내 방으로 올라와 보셈! 아주 중요한 거임!”

그리고 자기 방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서라였다. 민국은 또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벌이려는 것인가 의문을 실고 서라의 뒤를 쫓았다. 이윽고 서라의 방에 당도했을 때였다. 아기자기한 그녀의 방에는 침대 한 개와 책상이 놓여 있었다.

“This!"

This : 이것

손가락으로 책상 위의 무언가를 가리키면서 그리 소리치는 서라였다. 민국의 고개가 자연스레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고등학교 2학기 기말고사 문제집]

이 놓여 있었다.

“…….”

“엇흠흠! 온니찡도 아시겠지만 공부는 매우 중요하지여! 근데 이번 기말이 쪼매 어렵더라구여! 노하우와 경험치가 나보다 높으신 레벨 고수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에여!”

참고로 지금 시각은 여섯 시. 아침부터 죽도록 몸을 날렸던 민국인지라 결코 피로가 없진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민국이 돌아보며 물었다.

“나보고 공부 가르쳐달란 거냐?”

“이응.”

“흠… 오늘은 내가 너 공부 가르쳐준다고 해도 잘 못 가르쳐줄 것 같은데. 몸도 별로 안 좋고 해서 말이야.”

어차피 민국은 서라에게 몇 번이고 공부를 가르쳐준 전적이 있다. 그녀의 공부를 성장시켜주는 일에 기피할 이유가 없었다. 허나 이번에 서라가 제안한 건 달랐다. 검지손가락을 들어 ‘쯧쯧! 온니찡! 세상의 등가교환은 정당한 법이에영!’하면서 소리쳤다.

“매일 와서 가르쳐주셔야져! 공짜로 이빠이 잔뜩이여!”

“뭐? 야 인마 그건 아니지. 나도 내 대학교 일이 있고 그런데.”

“이잉? 그럼 어려우시다는 뜻인가여?”

민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대학교 1학년 시험이 뭐가 그리 어렵겠냐만은, 그래도 서라의 집은 민국이 아는 여자들의 집중에 가장 먼 편에 속했다. 만날 왔다갔다하면 기력 소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리라.

“이이잉~! 기말고사까지 앞으로 2주밖에 안 남았는뎅! 이번에 잘 못 보면 어무니가 피규어 안 사주신다는뎅!”

“피규어 모으는 취미도 없는 놈이 뭔 놈의 피규어냐.”

“이잉, 어쩔 수 없지여.”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스윽하고 휴대폰을 꺼내드는 서라였다. 동시에 자기 방에 있는 전화기 한 대도 들어 보인다. 전화기록부를 뒤적이던 서라가 이윽고 번호 두 개를 발견하고는, 각자 다른 번호를 전화기 두 대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민국은 그것을 보면서 불현듯 불안감이 몰아치는 걸 느꼈다.

“너 설마….”

“흐규흐규! 나님은 어떤 하렘왕의 폭풍 아기씨에 오염당한 가녀린 아이에여! 이젠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어여! 아니! 사랑을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거 같아여! 엉엉,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이 세상의 악당을 물리친 정의의 히어로다운 선택을 하겠어여. 마왕과 함께 자살해버리겠어여!”

뚜루루루루! 신호가 울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민국은 화들짝 놀라서 후다닥 달려가 서라의 휴대폰을 꺼버렸다.

동시에 전화기도 강제로 내려놓게 하였다. 금세 땀이 싱글싱글 맺혀버린 민국의 얼굴을 보면서 서라가 ‘헤헤’하고 웃음 짓는다.

이마의 땀을 소매로 훔치던 민국이 그런 서라를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하아’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았다 인마. 해줄게. 까짓것 해준다 이것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여!”

역시 사람은 약점을 잡혀서 살면 안 된다. 해주지 않아도 될 일을 해주게 되기 마련이었으니까. 쩝하고 입맛을 다시는 민국의 모습에 서라는 마냥 두 손을 뒤로 모으고 웃음 지을 따름이었다.

‘어차피 이게 마지막이 될 테니까여.’

하지만 민국은 몰랐다. 서라가 진정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사실 그를 향한 마음을 끊기 전에 선물을 한 번 받고 싶은 어리광이었음을.

* *

“…….”

집에 돌아온 유이는 또다시 혼자 컴퓨터를 두들겼다. 집안에는 어질러진 서적들이 가득 있었고, 깨끗한 거실과 부엌에 비해 그녀의 방안은 그야말로 바퀴벌레가 돌아다녀도 할 말이 없을 더러운 소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유이는 오로지 모니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괜히 방을 어둡게 해두고 빛나는 모니터를 쳐다보니… 시력이 안 좋아지진 않을까 염려가 될 수도 있겠으나 유이는 신체적인 면에선 전부 타고난 여자였다.

“…….”

키보드를 몇 차례 두들기던 유이는 곧 손가락 놀리던 것을 멈추었다. 돌연 스쳐간 생각이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만든 것이었다.

“…….”

생각을 떠올리고 나니 또다시 믿을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인생은 때때로 영화보다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요소가 자신이 아는 사람에게도 등장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서민국… 그 남자.

“…….”

미연시 세계에서의 기억을 공유 받았을 때 유이는 여러모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론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녀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상당히 당황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미연시 세계에 민국이 참가했던 까닭에 대해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었다.

- 여자 둘과 잠을 잤다.

- 그리고 아기를 뱄다.

그리고 아기를 밴 그 두 사람은 유이도 알고 있는 두 여자… 강은별과 한예나. 유이 입장에선 어디 중동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황당한 것은, 민국이 그 두 여자를 어떻게든 책임지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은별과 예나 역시 크게 부정하는 모습은 아니었고 말이다. 아니, 은별은 제외하는 게 올바를까?

“…….”

사실 유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건 아마 한국에 현존하는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게 무슨 만화 영화도 아니고… 어떻게 두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가 가능하단 말인가? 설사 그런다 한들 두 여자와 평생을 살면서 겪게 될 사건들이 다른 부부보다 훨씬 많을 텐데….

‘내가 책임지겠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이는 왠지 모르게 신뢰가 생기기도 했다. 아니… 사람이란 건 애초에 믿어선 안 되는 것임을 강철남을 통해 알게 된 유이인데도 불구하고, 오늘의 서민국은 뭔가 사람을 설득시키려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다 책임진다! 난 비열하게 도망가는 놈이 아니야!’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었으나, 오늘 민국의 모습이 그런 의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더불어 유이는 그에게서 책임감이란 걸 느꼈고, 상반되는 이미지인 무책임한 강철남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을 비교하게 된 유이…. 그리고 첫 인상이 달랐던 두 사람과, 그 인상과는 반대였던 두 사람의 면모….

“…….”

유이는 믿고 싶지 않았다. 진짜로 서민국이 두 여자를 책임지는 그 모습을, 가슴 한 켠으론 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은 사람을 믿지 않았기에. 믿음을 완전히 놓기로 작심한 유이였기에.

“…….”

키보드를 저도 모르게 세게 붙잡는 유이였다. 만일, 만일 민국이 정말로 그 두 여자를 책임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여자를 등에 지고 움직이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믿음이 가득한 그런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 나면 유이는 과연 어떤 맘으로 서 있을 수 있을까?

“…….”

더 이상의 생각은 머리만 아프게 할 따름이다.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하기 싫던 유이였다. 그녀는 얼마지 않아 다시 모니터로 초점을 돌렸다. 타다다닥. 키보드 치기에 열중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 *

“으헤헤헤헤….”

곰팡이가 든 벽과 더불어 음료수가 떨어져 있는 더러운 방바닥. 다리털도 관리하지 않아 몹시 더러운 모습으로 한 명의 남정네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안 감은지 오래 돼 부스스했고, 치아는 누렇다 못해 충치가 몇 가닥 있는 모양새였다.

“강은별… 강은별이구나 강은별… 으헤헤헤헤….”

그는 현재 모니터 앞에 앉아 어느 영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책상과 의자가 보였는데, 침대 쪽이 보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허나 그것으로도 족했다.

(…더 늦기 전에 방송 해야겠지?)과제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한 은별이 컴퓨터를 만지면서 방송을 킬 준비를 한다. 그것을 몰래 도찰하고 있던 남정네는 최대한 들키지 않게 조심했다. ‘으헤헤헤….’웃음꽃이 접어둘 생각을 않는다.

“내 사랑… 남고딩….”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녀의 컴퓨터를 해킹하는데 성공했다. 더불어 그녀의 실물까지 직접 목도하게 된 남정네는 더욱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비록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었고, 도찰을 하고 있단 사실도 은별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그래도 족했다. 이렇게 멀리서 볼 수만 있으면….

“내 사랑… 강은별….”

하지만 언제고 이렇게 지켜보기만 해선 안 되겠지. 전해준 편지도 읽은 것 같고, 이제 슬슬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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