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진정한 시작>
끼이익, 쿵!
민국은 서라의 집에 당도했다. 문을 열어준 서라가 토끼처럼 총총 걸음으로 소파로 향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라의 말대로 부모님 전부 오늘 늦게 오시는 모양이었다.
고로 서라가 민국을 집안에 들인 목적도 따로 있을 것이었다. 민국은 꿀꺽 침을 삼켰다.
상대는 강서라…. 민국보다 어린 일개 고등학생! 하지만 평범한 그 또래의 학생들과는 달리 특별한 기질을 가진 학생으로서 매우 방심하면 안 됐다.
"행님, 나님이 먹고 싶다고 했던 건 사오셨나여?"
"옛다."
민국은 검은 봉투에 있는 그것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소파에 앉은 서라는 두 번 당돌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여기 책상 앞에 놓으시졍!"
"……."
본래라면 말을 듣지 않고 어떻게든 드립을 치면서 대응했을 민국이었지만, 오늘 그랬다간 민국의 목숨이 달아날 수가 있었다. 사실상 목숨줄은 서라에게 달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테이블에 봉투를 툭하고 내려놓는 민국이었다.
"툭?"
"……."
"행님! 지금 테이블이 '아야!'하는 소리 못 들으셨어여? '아야!'하는 소리 못 들으셨냐구여! 어떻게 사랑스럽고 장인들이 한땀한땀 노력해서 만든 테이블에게 그런 행폐를 부릴 수 있는 거져? 테이블이 형님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여? 테이블이 형님을 그렇게 마음 아프게 했나여?"
민국은 다시 봉투를 들어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서라가 '에흠흠'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랑스럽게 대우해주는 온니짱의 자셋!"
"용건이 뭐냐…."
민국이 꽤나 자신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죄를 저질렀으니까… 당연히 서라를 보고 있기 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서라가 '읭?'하다 물었다.
"용건이 뭐냐니여. 온니짱,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의 용건만을 따지는 비지니스 같은 사이였나여. 아니지 않나염."
"……."
"에공. 온니찡 우유가 마시고 싶어여!"
서라가 자기 다리를 주무르면서 그렇게 중얼거리자 민국은 테이블의 봉투를 개봉하여 곧장 우유를 들었다. '읭? 서울 우유가 아니네염? 부들부들….'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래도 그건 가볍게 용인해주는 모양새였다.
이윽고 민국이 부엌의 전자레인지 쪽으로 후다닥 향했다. 컵 한 개를 꺼내들어 우유를 따르려고 하자….
"행님! 지는 유아용 컵이 좋아염~♥."
"……."
"전자레인지에는 딱 32초만 돌리세염! 너무 많이 돌리면 뜨거뜨겅해서 내 손이 데어염!"
"저 옥수수 수염차 같은…."
"콜록 콜록!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에두른 협박에 민국은 후다닥 전자레인지에 컵을 넣고 32초 돌릴 따름이었다. 정확히 32초를 맞추려고 하니 어지간히 고생을 했다. 이윽고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보자니 서라가 소리쳐왔다.
"온니찡 전자레인지 돌리고 있음여?"
"그래."
"아! 32초의 시간은 소중한 법이에여! 1분마다 사람들이 고달파하고 힘들어한다고 들었어여! 그럼 그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여? 고로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 하나만 가져와주세여!"
"……."
"정확히는 냉동칸이에여! 빨링빨링!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목이 너무 아이스크림을 바라고 있어염!"
우유에 아이스크림이라…. 뭔가 이상했지만 민국은 일단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냉동칸 문을 열고 이곳저곳을 뒤적이다가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다. 그것을 곧장 꺼내들어 후다닥 남은 32초 동안 서라를 대우해주기 위해 소파로 향하는 민국이었다.
"여깄다…."
"으아앙! 행님! 아이스크림이 너무 차갑잖아염! 거기다가 우유까지 먹으라니! 행님은 그렇게 로리를 괴롭히는 아청아청 범죄자였나여?"
"……"
"고영욱의 제자로 들어갈 심보인가여!"
철저한 농락이었다. 민국은 부들부들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민국이 '그럼 갔다 놓는다….'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서라가 '타임!'하고는 민국의 손아귀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잽싸게 빼앗아 봉투를 개봉하고 물었다.
"냠."
"……."
"으음, 딜리셔스. 익스프레젼스."
언제 아이스크림과 우유를 동시에 가져다주려는 민국에게 핍박했냐는 듯이, 서라는 맛나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전자레인지로 향하여 우유까지 꺼내고 오자, 서라가 '조심조심. 우유가 다치지 않게 내려놓아여!'하고 말하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부들부들 떨었으나 끝까지 인내했다.
"좋아염! 잘했어여. 보답으로 제가 덕후들의 모에 포인트라 불리는 모에 소리 한 번 내줄게여. 니코니코틴!"
"……."
"엇, 어어어엇, 어라라랏, 안 따라해주시는 건가염 지금? 나님이 지금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온니찡에게 애교를 부리는데 안 따라해주시는 건가염 지금?"
"따, 따라하지 암 당연히 따라해야지."
"헤헤, 니코니코틴~."
"니코니코티인~."
"아나따와하트에 니코니코틴!"
"아나따와하트에 니코니코틴!"
"움~다메다메다메~ 니코니코니는~ 민나농거예여~."
"움~다메다메다메~ 니코니코니는~ 민나농거예여~."
"어휴, 또 그걸 진짜로 따라하심. 노답."
"……."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서라였다. 그녀의 철저한 농락에 부들부들하면서도 민국은 끝까지 인내했다! 안 그랬다간 민국의 생사가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말할 거냐…?"
"무엇을여?"
"그, 미연시 세계에서의 일 말이다."
따끈한 우유를 두 손으로 고이 마시던 서라가 그것을 내려놓고 소리쳤다.
"아앙! 내가 마신 우유보다 더 진한 우유가 푸슛푸슛! 나를 범해버렷!"
"……."
"그 사건 말하시는 건가연 행님?"
와, 이거 생각보다 얼굴이 붉어진다. 민국은 한 때 자신이 흑화 소주로 얼마나 미쳤었는지 실감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말하지 말아주라! 그거 다른 사람들이 알면 나 진짜 죽어!"
"온니찡은 지에게 없는 것도 달려있으면서 어찌 그리 비굴하실 수가 있져! 사나이라면 사나이답게 전장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염!"
"아군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다가 칼 맞을 전장 따위 좋지 않다!"
서라가 '오오~'하고 중얼거렸다.
"온니찡…. 정말 너무하시네여."
"……."
"나님의 몸을… 그렇게 탐닉하다 못해 발정나게 하고는 흑흑…."
"야! 인마! 내가 언제 거기까지 갔어!"
"하지만 프로토스 쉴드가 없었으면 나는 그 지경이 됐겠져?! 부들부들!"
어, 거기에 대해선 확실히 할 말이 없었다. 왠지 그때의 민국이라면 그런 미친 짓을 하고도 남았을 것 같다. 허나 민국은 한 번 부정해보였다.
"나는 부카게를 하고 싶은 욕구만 있었을 뿐, 합체를 할 욕구는 없었다."
"2D 피규어에 아기씨를 뿌리는 닝겐들이 과연 2D 캐릭터와 하나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까여? 행님은 모순 덩어리!"
오늘따라 정확한 그녀의 표현에 민국은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런 행위까지 해놓고 합체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민국은 하는 수 없이 솔직해지자고 다짐했다. 소파에 앉은 민국이 깍찌를 끼면서 어둡게 말했다.
"후훗… 그래.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하마. 난 사실 널 범하려 했다."
"어, 어멋? 갑자기 솔직해지시넴."
민국은 더 강렬하게 소리쳤다.
"널 범하다 못해 널 가지려 했다! 너에게 내 아기를 임신시키려 했다!!!!!!"
"어머낫!"
두 뺨에 두 손을 올리면서 토끼 눈을 뜨는 서라였다. 어디까지나 과장되게 오바하는 구석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 편으론 얼굴이 진심 붉게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더욱 과장되게 표정을 짓자니, 민국이 대범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양팔을 펼치면서 민국은 최대한 뻔뻔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냐! 나이 어린 영계를 좋아하는 건 모든 남자들의 진실! 어째서 그 뽀얀 피부를 만지작만지작 부비작 부비작 하고 싶지 않단 말이겠냐!"
민국의 선언은 계속되었다.
"진정한 남자라면 때때로 금기조차 거스르고 싶어하는 법! 너는 진정한 로리다! 그것도 수준급 SSS 랭크의 로리!"
서라를 가리키는 민국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충분하고 지적인 면도 있는데 눈치까지 잘 살피니 너 같은 여자를 안 범하고 싶을 남자가 세상 만사 어디에 있겠냐!"
"부…왁!"
너무 노골적인 칭찬에 상당히 얼굴이 붉어졌던 서라였으나, 그래도 현실을 말하는 건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행님은 아청아청 교도소에 가도 할 말이 없는데염?"
"……."
"온니찡은 그런 선언으로 이 상황을 탈출하기에는 너무 큰 중범죄를 저지르셨음!"
"그래.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라."
양손을 엑스자로 만들며 '지~.'하고 얘기하는 서라였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민국은 언제 불끈 주먹을 쥔 사나이처럼 포효했냐는 듯, 무릎을 꿇고 서라에게 엎드려 빌 듯이 얘기하고 있었다.
"엉엉 야 인마. 엉엉 너도 알다시피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이미지 메이킹까지 하고 고생하고 살았는지 넌 알잖냐. 엉엉. 그러니까 좀 한 번만 봐줘."
"지이!"
또다시 엑스자를 그리는 서라였다. 민국이 이내 단호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슈밤! 좋다! 이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지!"
"읭?"
"이 상황을 역전시킬 유일한 비기! 이걸 사용해서 입장을 역전시켜주겠다! 각오해라 강서라!"
민국은 결코 사용하기 싫었던 필살기를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대뜸 상의를 탈의하면서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서라는 그걸 보다가 '어멋!'하고 소리쳤다.
"설마 그 기술은! 먼저 탈의를 하고 바깥에 나가 소리를 지름으로서 자신이 성폭행 피해자인 것처럼 굴기!"
"그렇다! 주로 여자 범죄자들이 많이 사용했던 수법이지! 이번엔 남자가 최초로 사용해주지!"
"으으! 질 수만은 없지여! 나도 강단있게 나가겠으여!"
그리고는 서라도 대뜸 단추를 풀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이거 미친 놈년들이 아닌가 생각할 것이었다. 그렇게 옷을 벗던 민국이 대뜸 테이블의 우유를 대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서라는 지지 않겠다는 듯 남은 아이스크림을 어푸어푸 입가에 묻도록 삼켜버렸다.
"크아아!"
"키아아!"
서로 느닷없는 썡쇼 파티를 벌이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역시 서로 간의 도리는 있던 지라, 속옷은 벗지 않는 모양새였다. 서라도 입고 있는 옷이 꽤 있었기 때문에 벗었다 한들 와이셔츠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와이셔츠에 팬티 차림이던 민국이 소리쳤다.
"한 번만 봐줘 임마!"
"뇌물 없는 봐줌은 무의미한 것!"
"새끼! 현실에 너무 일찍 빠져버려가지고는!"
봐달라, 안 봐주겠다, 봐달라, 안 봐주겠다, 몇 번이고 반복되던 말 싸움 끝에 서라가 '온니짱!'하고 소리쳤다. 민국이 '왜!'하고 소리치자 서라는 진지하게 얘기했다.
"밥 먹었음?"
"아니."
"밥 먹져."
"그래."
그리고 언제 다퉜냐는 듯이 곧장 옷을 들고 부엌으로 후다닥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이내 옷을 다시 입고 부엌의 밥상에 식사를 차리고 끼니를 먹기 시작하는 두 사람. 서라가 가볍게 운을 띄었다.
"근데 온니찡, 그건 정말 사실이에염?"
"뭐가 말이냐?"
아직 갑의 자리는 서라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사이좋게 말을 이어 나갔다. 서라는 미연시 세계의 기억들 중 중요한 정보를 몇 가지 공유 받은 상태였다. 고로….
"빈유찡이랑 부드럽찡이 온니짱이랑 으쌰으쌰했다는 거염!"
빈유찡은 은별을 의미할 테고 부드럽찡은 예나를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 말에 민국은 잠시 침묵했다. 서라는 짐짓 웃음 지으며 묻고 있었다. 민국은 진솔하게 얘기하자고 생각했다.
"맞아."
"……."
진지하게 답하는 민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