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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08화 (208/369)

208화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대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은별은 오늘 아침의 일이 여전히 심기에 거슬렸는지 여러모로 씩씩대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여자 친구는 다름아닌 은별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자신과 함께 소꿉친구였던 예나까지 책임지겠다고 나서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낙태를 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민국의 말대로 은별은 예나와 헤어지는 걸 바랐지, 그녀가 품고 있는 새 생명의 싹을 거두는 건 원치 않았다. 하지만 예나와 떨어지게 된다면 결국 그녀는 아기를 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스무살 초반이란 어린 나이에 아기를 홀로 키운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고, 보통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절대 태어날 아기에게도 좋을 행동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은별은 혼란스러웠다. 본래 그녀는 민국의 그런 발언에 심히 굳은 얼굴로 대응하곤 하였다. 하지만 미연시 세계에서의 기억을 공유 받아서 일까? 그가 고생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머릿속으로 공유 받게 되었다.

모든 기억들을 전부 받은 건 아니었지만, 그 기억들을 토대로 그가 그 상황에서 느꼈을 감정이나 고통, 깨달음 같은 것을 많이 느낀 것이었다. 그래서 민국의 감정이 한 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

사실상 그도 은별에게 맘이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그러나 소꿉친구라는 명분 하에, 그리고 예나의 아기를 낙태시킬 도덕적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머뭇거린 것이었다. 은별도 민국의 줏대 없는 행동에 몇 번 화가 나긴 했지만 그 심정을 이해 못한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용케도 참았던 것이었고 말이었다.

어찌 보면 그런 책임감 있는 선택이 훨씬 나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걸 역지사지의 문제로 볼 때… 결코 불만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내가 허락해줄 리 없잖아.'

그리 생각을 웅얼거리면서 은별은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뱃속의 아기에 대한 느낌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입덧을 하거나 요리 냄새를 맡으면 심하게 구역질을 하는 경향은 짙었다. 안 그래도 은별도 요즘 끼니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아…."

그래도 일단 오늘의 할 일은 마치는 게 좋겠지? 그것이 은별이의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말이었다. 이윽고 집에 당도한 은별이 대문 앞의 우채통을 뒤적여 보았다. 우채통을 항상 뒤적여 보는 것은 그녀의 당연한 버릇이었다.

"…응?"

대문 앞의 우채통을 뒤적이던 은별이 무언가 손에 잡히는 이상한 걸 느꼈다. 일반적인 편지와는 질감이 조금 달랐다.

이윽고 우채통에서 그것을 꺼내 보인 은별은 편지 봉투에 돌돌 매인 분홍색 끈을 보았다. 부드러운 촉감의 평범한 끈이었는데, 그것을 이유 없이 편지에 매달아두니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편지 봉투 앞면에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

받는 이에 그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뭔가 깨름칙한 감촉이 등을 타고 지나갔지만, 그래도 은별은 한 번 읽어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천천히 편지 봉투를 개봉하여 안의 편지를 확인한 은별이었다.

'사랑하는 당신이여, 안녕히 잘 있으십니까. 당신이 부디 행복하게 잘 있길 기도하며 이 편지를 씁니다.'

첫 문장은 그러했다. 은별은 천천히 다음 문장을 계속해서 읽어가기 시작했다. 지극히 평범하게 사랑을 하는 남자의 러브레터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언젠간 내 손으로 당신과 함께 하는 날이 오길.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장난…하는 건가?"

편지를 다 읽고 난 소감은 그것이었다. 보낸 이가 누구인지 성함도 없을뿐더러, 정식으로 우편 발송을 통해 온 편지 같지도 않았다.

은별은 깨름칙한 느낌과 더불어 어쩌면 편지를 다른 집에 잘못 붙인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는, 내용물을 편지 봉투에 고이 넣고 끈을 다시 매서 우채통에 넣었다. 홱 몸을 돌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는 은별이었다.

"……."

그리고 그런 은별의 자취를, 먼 곳 전봇대에서 몸을 숨기고 지켜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  *

"일단 어떻게든 수습은 완료한 셈이로군!"

은별을 돌려보낸 뒤, 예나와 유이에게도 배웅을 해줘 돌려보낸 민국이었다. 집에 홀로 남은 민국은 어질러져 있는 거실을 보면서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고개를 내리 숙인 민국이 이마에 손을 갖다대면서 고독하게 중얼거렸다.

"힘든 하루였어… 우훗."

벌써 오후로 저물고 있었다. 민국은 일단 벙커를 짓느라 거실에 들여놓았던 상자들을 다시 제자리로 옮기기 시작했다. 유이에게 거하게 쳐맞아 심각한 데미지를 입긴 했으나, 사람은 만능 적응의 생물이라고… 슬슬 아픔을 쾌락의 경지로 느낄 수 있게 된 민국이었다.

"유이 씨도 결국엔 알아버리게 되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민국은 철회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책임을 지려면 확실히 지는 게 남자로서의 자존심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은별이가 상처를 입을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때문에 민국은 그것 역시 어떻게든 채워주고 싶었다.

'그래, 우선 내 부모님에게 연락 좀 드리고. 한 번 뵈러가야겠군.'

이외에도 두 여자를 챙기려면 돈이 더 많이 필요할 테니, 일도 더 열심히 해야 할 터였다.

'내 반드시 인정 받고 말리라!'

그렇게 투혼을 다지면서 청소를 끝마친 민국이었다. 이마의 싱글싱글 맺혀 있는 땀방울을 닦아 보인다. 이제 화장실로 가서 세수 좀 하고 쉬려는 찰나에…. 우우우우웅.

"……."

급작스레 휴대폰이 진동했다. 민국은 순간적으로 행동을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휴대폰의 발신자 이름으로 향했다.

'강서라.'

일시적으로 패닉에 빠지는 민국이었다. 이상했다…. 분명히 서라는 미연시 세계에서 큰 역할을 한 적이 없었다.

비중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억이 공유될 가능성은 굉장히 적었다. 그 증거로 아침에 서라는 찾아오지도 않았을뿐더러, 연락도 없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왜 하필 지금 이 때에! 연락이 오는 것인지 심히 의문이었다.

'슈, 슈밤. 아니겠지?'

은별이나 예나 같은 경우는 그래도 이미 관계를 맺어본 사이였고, 그런 짓을 해도 혼쭐만 나는 선에서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강서라는 아니었다. 일단 그녀는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청소년의 나이로서, 아청아청 패시브 스킬의 소유자였다.

심지어 민국과 아무런 접전이 없던 사이였기 때문에 그런 해괴한 짓을 했단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 민국은….

은별 : 너 진짜 최악이구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용서 못해! 헤어져!

예나 : 민국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역시 나도 이건…….

유이 : …….

{투다다다다닥!}

"끄아아…."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하필이면 미연시 세계라는 이유만으로 미쳐 버린 게 잘못이었다.

적어도 결과를 바꾸지 않으면 어떤 과정이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우우우웅! 휴대전화는 얼른 받으라는 듯 줄곧 울리고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킨 민국이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이윽고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통화 버튼을 꾹 클릭하는 민국이었다. 잠시 후… 통화를 받은 민국이 그것을 귀에 부착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려고 했다.

"여, 여보세…."

"형님 무슨 일로 전화하심? 나 바쁜 몸이거든여 빨리 말해주시져!"

"네, 네가 전화했…."

"목소리 떨리는 거 보소! 역시 온니찡은 쯔쯔쯔쯔쯔쯔쯔! 야구2014보고 기력 다 하신 거예여? 그런 거셈여?!"

서라의 활기찬 목소리에 민국은 떨리던 목소리를 멈추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가슴을 짚으면서 한 켠으로 안도했다. 민국은 생각했다.

'모른다!'

그러하다. 통화하는 서라의 목소리만 들어도 척이면 척이었다. 그녀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로 민국에게 연락한 것이 자명했다.

"똑똑똑~ 두유워너빌드어파이어벳?"

"스타크래프트 언제적꺼인데 아직도 그거 가지고 드립을 치냐."

"헉! 행님 시대 유감이시네여! 지금 스타크래프트를 매도하시는 건가여!"

"됐고, 전화한 이유가 뭐냐?"

"데헷 데헷. 시, 실은여… 온니찡의 시, 심장이 두근두근거릴 만한 제안을 하려고 하거든여!"

과장되게 애교를 부리는 서라였다. 민국은 담담히 들었다.

"온니짱~ 오늘 내 어무이랑 파파가 늦게 들어오셔여!"

"오~ 가서 뭐 한 번 거친 레슬링이라도 하자고?"

"어, 어멋! 어떻게 숙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져? 저는 그냥 어무이랑 파파가 늦게 들어온다고만 말했을 뿐인데 너무 진도를 앞서 나가려는 건 아니신가여!"

"에휴."

민국은 완전히 안도를 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야, 인마. 나 오늘은 아무래도 바쁠 것 같으니까 그냥 나중에 보자."

"이잉! 왜여!"

"안 되면 안 돼 이것아. 난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바쁜 몸이야. 빌게이츠가 내 친구인 것에서부터 답이 나오지 않냐."

"네 다음 빌게이츠 노예."

"이놈이?"

서라는 평소답지 않게 때를 썼다.

"이잉! 그럼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까 과자 하나만 사주세영 오빵! 오빠앙?"

"미친? 야, 너 오늘따라 왜 그래? 그렇게 과장되게 애교 부리는 놈은 아니었잖아?"

"행님은 그렇게 빈유 찡이랑 사귀었으면서도 여자를 모르시는 건가여? 원래 여자가 날아오르는 마법에 걸리기 전 며칠 동안은 이래여!"

"발정했단 거냐?"

"발정이라녀! 천박하시네여! 발정기라 해주시졍!"

직설적인 드립의 선구자, 강서라였다. 민국은 쯧쯧하고 혀를 찼다.

"본래 발정기에는 혼자 집에서 위로를 하는 게 그 나이 때에 알맞는 행동이야. 성인이 아니면 잠자코 있어라."

"우왕! 고작 두 살 차이인데 파들파들…. 애초에 행님이 지한테 그런 말할 입장은 아니지 않나유?"

"응? 뭐가 말이냐?"

서라가 털어놓았다.

"미연시 세계에서 지한테 강렬한 부카게를 선사하려 했으면서 어떻게 성인이라는 논리를 들먹이시져! 온니짱의 빈유찡에게 콱 말해버릴랑!"

"……."

"온니찡은 설마 모르실 거라 생각했음? 온니찡! 난 어둠의 사역마조차도 거들떠 '보지' 못하는 아를켄타우로스의 화신을 깃든 인물임! 나의 패시브를 절대 무시하지 마셈!"

평온하게 휴대폰을 쥐고 있던 민국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마치 느끼기라도 한 듯이 '온니짱 지금 손 떨리지여? 그렇지여? 헤헷.'하고 꿰뚫는 서라였다. 민국이 한참동안 입을 못 열다가 간신히 물었다.

"너… 너 어떻게 그걸…."

"히히히히, 지는 온니짱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슴다."

"……."

마치 심리학과를 전문적으로 나온 사람처럼, 서라는 연구를 하는 사람의 말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현재 진행형인 온니짱의 상태는 음… 라면을 먹으려다가 알고 보니 전 날에 끓인 거라서 인상을 찌푸리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듯한 심리군여? 하지만 그 라면은 알고 보니 온니찡이 평생 동안 먹을 수 없는 가치의 천원짜리 라면!"

'…강서라 이 자식!'

민국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서라는… 서라는 이래보여도 상당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재주를 가진 여자 아이였다. 어리다고 해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때때로는 민국을 언변으로 지게 만드는 개구쟁이 같은 여인! 그런 여자애가 기억을 공유 받았다고 해서 다른 여인들처럼 다짜고짜 다가와서 화를 낼 리 없었다. 그렇다! 그녀라면 필시! 주변 사람들과의 수습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행님. 오늘따라 날씨가 매우 춥디춥디하네여! 겨울이라 그런 가봐여 으시시시시! 따뜻한 우유 한 잔이 마시고 싶은데 어떻게든 구해주실 수 있겠어여?"

"……."

"엇흠 엇흠! 갑자기 목이 왤케 칼칼하징… 마치 무언가 숨겨진 비밀을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다려라. 내가 당장 간다…."

"오킹오킹!"

뚝하고 통화가 끊겼고, 민국은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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