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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07화 (207/369)

207화

민국의 반응은 이전과 달랐다. 줏대없이 물러나는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의미심장한 미소에 예나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두근하는 걸 느꼈다. 왠지 직감상, 그가 아기를 버리자느니 그런 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원래부터 민국도 생명을 중요시 하는 타입이니 그런 불건전한 선택지는 선택하지 않겠지만….

"책임져야지."

"뭐?"

"다 내꺼다! 으하하!"

다짜고짜 만세 자세를 취하는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의 발언과 더불어, 그의 갑작스런 행세에 예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은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지하게 임했다.

"책임지겠다고? 우리 둘을?"

"그러하다."

민국은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대응했다. 은별이 잠깐 '후우…'하고 숨을 내쉬다가 말했다.

"내가 이전에도 분명히 말했었지? 현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건 은별이 네가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손에 넣고 싶은 것도 존재하는 법이다."

민국은 단언했다. 그런 그의 단언은 좀처럼 보기 드문 법이었다.

"하늘에 있는 별을 세계 최초로 따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갈래."

"어딜 가."

밥맛이 없어졌는지 수저를 내려놓는 은별이었다. 사실상 그가 하는 말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민국은 그런 은별을 붙잡았다.

"애초에 난 그런 식으로 내 미래를 그릴 생각은 없어. 그리고, 부모님들이 허락해줄 리도 없는 것이고."

"그거야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지요 낭자."

민국은 말을 이었다.

"은별이 네 말대로, 분명 부모님들은 대부분 반대하겠지. 하지만 나의 진심과 더불어서 내 열정과 믿음을 보여준다면 얘기는 달라질 터다."

"…한국에선 일부일처제만 허락됩니다만? 그건 어쩔 건데?"

"중동가자."

"쇼하고 있네!"

"정 뭐하면 어떻게든 재판 받아가지고 우리 셋이라도 결혼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민국은 진짜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은별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은별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그런 마법까지 겪어놓고, 한다는 결론이 그거야?"

"그런 마법을 겪었기 때문에 이런 결론을 내놓는 거야."

은별이의 눈이 정말이냐는 것처럼 가늘어지고 있었다. 예나는 둘 사이의 상황을 막연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심장 박동수가 알게 모르게 높아지고 있었다. 유이 역시 담담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일은 내가 원인이야. 그런고로 나만이 수습할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이런 선택을 했다는 건 정말 진심으로 책임질 맘이 들었다는 거지. 은별이 네가 내 선택을 얼마나 유치하게 보든 상관없어. 하지만 난 진짜로 널 책임질 거니까."

"하……."

은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 좋아. 무슨 소릴 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 맘이 그걸 원하진 않아."

"그럼 낙태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건 아니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거봐. 그럼 나랑 결혼해야지."

"이…."

"그리고, 난 은별이 널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나랑 헤어지게끔 놔둘 생각은 없어."

은별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의 느닷없는 고백 멘트에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민국의 대처 방안이 올바르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윽고 은별이의 고개가 홱 예나에게로 돌아갔다. 그녀의 날카로워진 시선에 예나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들썩였다.

아직 사건을 만들어낸 이전의 책임이 예나에게 존재했던 것이었다.

"…그럼 저 여자도 함께 사랑하겠다 이 말이지?"

"엇흠, 물론이지요."

"역시 안 돼."

은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역시 이건 아니었다!

"난 애초에 두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원치 않아. 그리고! 네가 입장이 반대였어도 내 심정은 이해됐을 거야."

"그건 당연하지. 은별이 네가 다른 남자랑 짝짝쿵하고 있는 거 보고 있으면 나도 속이 우글우글 거릴 테니까."

"그럼 대체 왜!"

은별이 으르렁거리면서 소리쳤다. 그 말에 민국은 진지하게 정색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만일 예나랑 내가 헤어지고, 예나의 아기를 낙태시키면, 너는 그런 날 좋아할 수 있겠어 은별아?"

"……."

"사랑하면 그 무엇이든 받아준다고 하지만, 적어도 은별이 넌 도리라는 걸 중요시 여기잖아. 아마 못 참아줄 거야."

"으…."

그 말에는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예나랑 헤어지는 걸 원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나가 아기를 낙태하길 바라진 않았다.

은별이는 생명을 몹시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었으니까. 이윽고 은별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우물거리자 민국은 은별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당겼다. 그리고는 그대로 주저앉으면서 예나의 어깨에도 팔을 둘렀다. 지켜보던 예나와 은별을 자신의 얼굴 곁으로 끌어 당기는 민국. 은별이 '앗…!'하고 당황하며 소리쳤고, 예나는 '……!'하면서 심쿵할 따름이었다.

민국은 해맑게 웃었다.

"까짓것 남자가 책임지려면 다 책임져야지요! 도망가면 안 되지요!"

"……."

"음허허!"

이것이 민국의 결정이었다. 회피하고 도망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국엔 답은 둘 중 하나였다. 아기를 버리던가, 아니면 낳던가.

버리면 버리는 선에서 끝날 게 아니었다. 분명히 예나와 은별 둘 다 평생 그 기억을 안고 가야 할 테고, 지옥 같은 감정을 느껴야 할 터였다.

민국은 힘겨워하는 두 사람을 데리고 가길 원치 않았다. 가능한 한 그녀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그 바램을 위해선 까짓것 자기가 이기적인 남자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납득이 안 가면 납득이 가게끔 좋은 모습을 보여줄게. 결혼해서 아기 낳으면 까짓것 지금보다 열심히 일해서 더 돈 많이 벌면 되지!"

"이, 이이!"

"허허, 은별양. 그렇게 얼굴을 찌푸린들 그대가 나의 여자친구라는 건 변함이 없소."

은별의 찡그린 볼을 만지는 민국이었다. 참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그의 발언이었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믿음과 듬직함이 담겨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은별은 왠지 모르게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입은 열지 못했다. 이젠 예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민국이었다.

"예나야."

"…응."

"너도 책임지고 내가 보살펴줄게. 그게 남편으로서의 도리니까."

"……."

확실히 민국은 달라졌다. 이젠 예나를 외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녀까지 끝까지 안고 가려는 모양새였다. 예나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예나였다. 민국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

유이는 그런 세 사람을 맞은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

뭐라고 할까? 강철남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음을 주었으나 결국엔 그 믿음을 이용해먹으려고 했던 남자…. 그는 끝내 유이를 사람조차 못 믿게 만들었다.

고로 그녀는 지금은 남자든 여자든 관계 없이 누구도 못 믿는 상태였다. 하지만….

"하하하하!"

"이거 놔! 이 바보야!"

"못 놓겠습니다! 내 손이 놓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시퍼렇게 눈이 부은 상태로 웃는 그의 호쾌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유이는 혹시 자신이 실수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겉모습으로 매너 있는 척하는 강철남에게 넘어가 그에게 믿음을 주었으나, 알고 보니 그는 몸만을 탐닉하는 짐승이었고….

"움하하하하!"

정작 짐승에 변태일 거라 생각했던 민국이야 말로, 자신이 그토록 찾던 믿음직스런 남자가 아닐까 하는….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호쾌한 웃음을 계속해서 남발하는 민국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리던 은별이 툭하고 그의 갈비뼈를 옆구리로 건드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찌 됐든! 난 절대 받아주지 않아! 아니! 그런 건 안 원해!"

"어디 가요 은별 낭자!"

"학교 간다! 왜!"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그리 소리치면서 돌아서는 은별이었고, 민국은 은별을 붙잡으려다가 잠시 자기 곁에 있는 예나를 돌아보았다. 예나는 그가 재차 돌아보자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웃으면서 그녀를 호명했다.

"예나야."

"응…?"

"나 잠시 은별이랑 얘기하고 올게. 그래도 되지?"

이상했다. 분명 이전이라면 예나에게 허락을 맡는 일은 없었을 텐데. 오로지 은별이만을 바라보며, 은별이의 의사만을 따랐을 텐데. 지금은 줏대 있게 행동할 뿐더러 예나의 의사조차 묻는 모습이었다. 예나는 일말 달라진 그의 진짜 배려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갔다 와도 돼."

"고마워."

예나의 허가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민국은 일어났다. 예나는 평소대로라면 은별이에게로 향하는 민국의 모습에 괴로움을 느꼈어야 할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그의 선택에 너무나도 고맙고 든든했다.

"……."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예나였다. 유이는 그런 예나의 진심 섞인 미소를 유유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후다닥 은별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는 민국이었다.

"배웅해줄게!"

"배웅 받기 싫거든? 저리 가!"

"어허, 이러지 맙시다 좀. 우리 그래도 사귀는 사이 아니오?"

은별이의 손목을 붙잡는 민국이었다. 은별이가 돌아서서 민국을 향해 반문했다.

"사귀는 사이? 여친이 원하지 않는 걸 하는 게 사귀는 사이예요?"

"암 그래도 사귀는 사이지! 네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결국 내가 널 위한 선택을 해도, 넌 그게 인간적으로 원치 않는 일이란 걸 알고 있을 걸?"

예나의 낙태를 선택해도 결국엔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단 의미였다. 정곡을 찔린 듯 얼굴을 붉히던 은별이 어거지를 썼다.

"몰라! 아무튼 절대 안 돼! 절대 안 해줄 거야!"

"그래? 그럼 되게 해야지."

"하! 네가 뭐 어떻게 할 건데!"

민국이 씩 웃으면서 은별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은별은 입 근처까지 가까이 온 그의 얼굴에 상당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뒤로 뺐다. 민국이 웃음 지으면서 말했다.

"네가 맘에 들게끔."

"……."

"지금도 날 좋아하지만 너무 좋아해서 내가 하렘 나라를 차려도 나에게 오게끔 만드는 것이지! 어때? 좋은 계획 아니야?"

"이 뭐 병…."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주겠어! 강은별! 각오해라!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만들어버릴 테니까!"

버터 같은 대사였으나 그 대사가 상당히 진심이 담겼기 때문에, 은별은 황당해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더욱이 괴로운 건, 그런 그의 진심에 조금씩 흔들리는 자기 마음이었다.

"몰라! 몰라! 몰라아아!"

더 이상 민국과 같이 있다간 이상해질 거라 감안했는지, 손을 내치고 후다닥 도망가는 은별이었다. 그런 은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민국은 허리에 두 손을 얹었다.

실로 좋은 광경이었다. 역시 남자란 믿음직하고 듬직해야 하는 법이다.

앞으로 여러 관문이 있고 고난들이 참으로 많겠지만, 이제 민국은 피하지 않고 맞부딪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이 날을 위해서 준비되었던 것.'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버리겠다, 이제 민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버림으로서 둘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 소냐! 이기적인 남자 서민국! 하지만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원한다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해피엔딩을 이룩할 수 있는 루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가는 은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민국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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