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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06화 (206/369)

206화

다행인 점이 있노라면 서라는 아무래도 미연시 세계의 기억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아침 일찍 민국의 집에 방문하지 않거나, 문자 메시지를 남기지 않은 이유도 그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국이 현실 세계에서 데드 루트를 찍는 일에 변함이 있는 건 아니었다. 민국은 분명 죽을 것이었고! 무지하게 구타 당할 것이었으며! 사는 것이 후회되는 고통을 맞볼 것이었다!

"끄어어어, 요,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스미마셍…."

"마지막에 왜 잘 먹겠습니다 라는 소리가 나와? 그렇게 또 먹고 싶어?!"

"아, 아니무니다… 소인은 그런 소리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저 입버릇처럼…."

'그런 식으로 변태 같은 생각만 하니까 그 모양이지.'하면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젓는 은별이었다. 현재 민국의 집 내부에는 은별, 예나, 유이. 총 세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민국의 집에 아침부터 방문한 까닭은 단순히 단 하나…. 미연시 세계의 기억을 공존했고, 그 기억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분노를 느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겠지! 은별과 예나 같은 경우는 그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암캐처럼 다루는 민국을 보았으니까. 심지어 자기 스스로 흑화 소주를 퍼마시고 그런 행위를 저질렀으니! 평소에 그렇게 하고 싶단 욕구를 내심 숨기고 있던 게 자명했다.

"……."

물론 그 둘에 비하면 유이가 당한 건 양반이었다. 그녀는 고작 얀데레화된 예나와 전투씬을 벌이거나, 성드립을 치는 민국의 통화를 들어준 게 전부였으니까.

'그 가슴 사이에 시원하게 끼고 부비부비하고 싶다니까 이 여자야 푸헤헤헤헤!'

허나 미연시 세계의 유이가 민국을 철저하게 혼쭐내주었다 한들, 현실 세계의 자신에 대한 기분이 말끔해지는 건 아니었다. 고로 유이는 미연시 세계의 자신이 못한 복수를 대신 해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라고 볼 수 있었다.

"정말 그러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오! 흑설 공주 그 사디스트 양반이 으어어!"

"어찌 됐든! 결국 그 세계에서 자유 분방하게 네 쾌락을 즐기려고 했던 건 엄연한 사실이잖아! 맞지? 아니야?"

"아, 아니무니다!"

"…유이 씨."

또다시 유이에게 부탁하는 은별이었다. 유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승낙했다.

사실상 유이는 미연시 세계의 영향을 통해 은별과 예나가 현실 세계에서 민국과 어떤 관계가 되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흑설 공주가 민국이 미연시 세계에 갈 수밖에 없던 모든 이유도 다 머릿속으로 주입해주었으니까. 이윽고 유이가 저벅하고 앞으로 발을 내딛자 무릎을 꿇고 있던 민국이 시퍼렇게 부은 눈으로 '아, 아니돼!'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 유이는 왠지 모를 분노에 또 한 번 발차기를 날렸다.

투다다다다다닥!

"끄어어어어어어!"

"…스톱! 거기서 멈추시면 되요. 더 했다간 죽을 테니까."

"끄어어…."

"일찍 죽으면 안 되니까요. 좀 더 고통을 느끼다가 죽어야죠."

"……."

민국을 배려해서 말린 게 아니라, 좀 더 많은 고통을 느끼게 하려고 말린 것이었다. 민국은 퍼렇게 부어버린 양쪽 눈으로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어중간한 자세로 다시금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마침 정면에는 예나가 서 있었다.

"예, 예나야…."

"……."

'넌 아니지 예나야? 아무리 내가 그런 짓을 저질렀어도 그래도 용서는 해줄 수 있지? 아까 현관문 너머에서도 그렇게 말했잖아! 죄는 있되 용서는 할 수 있다고!'

눈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민국이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곧잘 받아 이해하는 예나였다.

예나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응… 용서할 수 있어 민국아….'

'여, 역시 예나!'

'하지만… 그래도 나도 은별 씨 의견에 조금은 찬성해….'

'히이익!'

예나가 스윽 유이에게로 고개를 돌린 것이 공격의 신호였다. 투다다다닥! 또다시 하늘을 나는 민국이었고 이젠 자칫하다간 진짜 죽을 지도 몰랐다. 각혈…은 아니고 천장에 침까지 튀기면서 날던 민국은 철푸덕 바닥에 쓰러졌다. 꿈틀꿈틀거리는 그의 좀비 같은 모습에 은별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정말이지 내쉰 숨조차도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미연시 세계의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해서… 그렇게 자기 욕구를 풀기 위해 함부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결과적으로 그건 남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행한 행위인데!

"흑설 공주인가 뭔가 하는 그 여자한테서 수습 받으려고 했던 거야?"

"그, 그렇습니다…."

은별의 질문에 곧장 대답하는 민국이었다. 부들부들 떠는 민국을 내려다보던 은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수습하려고 했던 건 어찌 됐든 좋네…."

"…헤헤."

"웃지마, 정들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는 민국이었다. 철푸덕 몸을 완전히 숙인 민국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예나.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사실상 미연시 세계의 기억들을 공유 받았다고 해서, 예나가 은별과 민국이 있던 기억까지 공유받은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말하면 미연시 세계의 예나와 민국이 나눈 대화까지 은별이 알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로 예나가 소유하고 있는 기억 중에는 민국과 단 둘이 나눴던 대화들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는….

'미안해, 그동안 이해하지 못해서.'

흑화 소주를 마시고 이성을 잃은 자신을 처음으로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던 민국이 있었다. 처음에 그 기억을 공유 받았을 때 예나는 차마 믿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장 그릇된 모습이었고, 오로지 욕구에 매달려서 행동하는 예나의 모습에 경기를 일으키기만 하던 민국이었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운명에서 벗어나려던 민국의 행위가 한 편으론 기억으로 공유 받을 떄마다 씁쓸하고 울적한 마음을 들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과거를 계속 반복하면서, 결국엔 민국이 깨달음을 얻고 예나를 보듬어주었다는 것이었다.

{빠아아앙! 쿵!}

도중에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어떠한 계기가 있던 것 같긴 하지만, 트럭 한 대가 후레쉬를 빛내면서 다가오는 것을 제외하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큰 트라우마를 안길 수 있는 기억은 최대한 배제시키겠다는 듯이 말이었다.

"…됐어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은 맘도 없으니까."

세차게 뒤돌아서는 은별이었다. 그래도 그녀 역시 민국이 필사적으로 과거를 수습하기 위해 노고를 치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임신했던 기존의 사실을 지움으로서, 임신이라는 결과를 사라지게 하는 것. 그것이 비록 낙태와 같을 수도 있었으나 실제로 아기를 지우는 행위는 아니었다.

고로 민국도 은별이 이해해줄 거라 생각하고 정한 행위였다. 은별도 사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조금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끝내 결과를 바꾸지 않았다는 건.

"……."

그건….

"가, 가시려는 겁니까? 은별 낭자?"

"그래…. 이미 볼 일도 끝났으니까."

"시, 식사라도 한 끼하고 가시는 게…."

은별이 반쯤 고개를 돌려 노려보았다. 민국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엎드린 자세로 눈을 내릴 따름이었다. 예나는 그런 민국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만… 먹고 갈까?"

"……!"

예나의 물음에 은별이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그녀에게로 돌렸다. 예나는 그런 은별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민국을 바라보았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용기 있는 물음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곧 기분 좋아라 하면서 고개를 당차게 끄덕였다.

"그러십시오! 암! 그래야지요! 예나찡! 역시 뭘 좀 아십니다!"

"이씨…."

"으, 은별 낭자도 그렇게 으르렁거리지만 말고 저와 한 끼 식사 합시다! 오해된 갈등도 좀 풀겸!"

"오해는 무슨 오해야! 다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래도, 예나가 민국과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자신은 배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은별도 끼기로 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유이 씨도 낍시다! 하하! 따, 딱히 고소는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요!"

"……."

유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눈길을 돌려 예나와 은별을 훑었다. 사실상 이 관계에서 가장 애매한 것은 유이였다. 그녀는 예나나 은별처럼 민국의 아기를 배고 있지도 않았고,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예나가 눈웃음 지으면서 유이를 설득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요 유이 씨…. 잠시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일도 조금은 해결된 거 같으니까…."

"……."

가만히 있던 유이가 찬찬히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민국은 언제 신명나게 구타를 당해 몸을 못 움직였냐는 듯, 화들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 일어나는 그의 모습에 황당해하던 은별. 민국은 기운차게 이두박근을 보여주다가 말했다.

"그럼 당장 음식을 준비해서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님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잘한다 아주…."

"하하하하."

오바스러운 웃음과 함께 부엌으로 뛰쳐가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또 다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 바뀐 느낌이 드는 은별이었다.

미연시 세계의 일이 있을 때까지는 뭔가 줏대 없이 휘둘리는 감이 있었는데 말이었다. 이윽고 부엌에서 한참동안 음식을 준비하면서 씨름을 하던 민국이 큰 밥상을 들고 거실로 다가왔다.

"웃차차차차!"

탁! 하고 그것을 내려놓는 민국이었다.

"자, 엄밀히 말해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식사입니다! 다들 수저를 드시지요!"

돌이켜보니 미연시 세계의 기억을 공유 받자마자 후다닥 민국의 집으로 뛰어왔던 은별, 예나, 유이였다. 세 명은 아직 식사를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민국이 차린 식사가 본능적으로 달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먼저 식사를 먹기로 말을 했던 예나가 수저를 들더니 해맑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잘 먹을게 민국아."

"으응 예나야. 잘 먹어. 다 먹어도 돼. 밥 또 있으니까."

자신이 한 죄가 있노라니, 마냥 배려를 하면서 맞춰줄 수밖에 없는 민국이었다. 물론 예나에겐 성심성의껏 배려를 해주던 민국이었으나 말이었다.

"……."

"은별 양도 드시지요."

"말 안해도 먹을 거야…."

그런 민국을 노려보다가 그의 말에 곧장 시선을 내리면서 수저를 드는 은별이었다. 마지막으로 유이를 돌아보는 민국이었다.

"어, 그, 세계에서의 드립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드립입니다 드립. 하하, 너무 과하게 반응하실 필요 없습니다 유이 씨."

"……."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쪽이 가슴이 큰 건 엄연한 사실이고 가슴으로 상대를 때려 죽이는 것도 분명히 가능한 사실이니 아니아니!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습니다!"

'드십시오.'하면서 식사를 양손으로 가리키는 민국이었고, 유이도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수저를 드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이렇게 네 사람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흑마법사가 준 신 제품을 통해서 일일히 하루마다 만날 필요성이 없어졌으니까 말이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하던 네 사람이었다.

은별은 끝까지 참으려 했으나, 결국엔 참지 못하겠는지 수저를 잠시 내려놓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엔 어떻게 할 거야?"

은별의 물음이었다. 예나의 시선과 유이의 시선이 은별에게로 돌아갔다. 은별은 상당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엇을?"

"뱃속에 있는 아기."

은별에겐 그것이 커다란 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만날 일어날 때마다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했고, 어떻게 해야 할 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예나의 고개도 자연스레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유이는 여전히 세 사람이 그런 관계를 가졌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세 사람의 시선을 전부 받게 된 민국이 곧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 작품 후기 ============================

민국이 곧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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