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05화 (205/369)

205화

예나는 자고 일어나자마자 믿을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묘한 실망과 함께 찾아온 분노였다. 하지만 잠을 잘못 자서라던가, 대학교에 늦어서 자괴감에 빠져 자신을 대상으로 한 분노 같은 게 아니었다.

믿을 수 없지만 그 분노의 대상은… 어제 그렇게 좋은 감정과 함께 대화를 마쳤던 상대, 서민국이었다.

"……."

분노와 더불어 알 수 없는 야릇함이 감겨왔다. 예나는 이상한 감촉에 잠시 다리를 배배 꼬다가 진정했다. 아픈 이마에 손을 올리던 예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진실을 본 것마냥 충격적이었다.

"아…니야… 민국이가 그럴 리가…."

'빨아라 암캐여.'

"……."

아닌 것 같아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단순히 꿈이라고 포장하기에는 너무 많은 기억들이 주입되었다. 그와 더불어 그 기억들이 어떻게 주입되었는가, 그리고 꿈속에서 왜 서민국의 그런 모습이 들어왔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와 설명도 정확하게 예나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들어왔다.

'그러니까 예나야 으하어라너 @*!*(#@(!'

그와 더불어 왜 어제 민국이가 통화를 할 때 그토록 말을 더듬거렸는지, 까닭을 알게 된 예나였다. 본래 민국이는 아무리 캥기는 게 있어도 뻔뻔스럽게 굴기 1인자였다.

예나에게 평소 보여주던 서민국의 모습이 아닌, 숨겨진 또 다른 모습… 현대왕의 모습으로선 말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현대왕의 본래 성격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라 생각했는지 민국이는 어지간히 안절부절 못했었다.

"……."

그리고 진짜로 안절부절 못할 만한 문제였다. 예나는 극도로 다운되는 기분에 천천히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상의 휴대폰을 손으로 쥔 그녀가 이윽고 전화기록부의 서민국을 보았다. 왠지 당장에라도 연락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하지만 통화를 한다 한들 무슨 소리를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는 예나였다. 애초에 화가 나도 그게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라면 참는 게 그녀의 특징이었다. 은별이에 비하면 부드럽고 착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너무 답답할 지도….

'너의 그 현모양처 같은 부분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너무 답답하단 말이지 이 암캐야!'

부들부들…. 돌연 미연시 세계에서 민국이 예나를 보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예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걸 느꼈다. 설마 민국이 자신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냥 참는 게 좋은 줄 알았는데… 쓰디쓴 한 마디라도 하기를 때때로 민국은 원하는 모양이었다.

"……."

고로 예나도 처음으로 쓴 소리를 한 번 해보자는 용기를 먹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현재 누군가와 통화 중이라는 알림 신호만 뜰 따름이었다. 예나는 아침 일찍부터 민국에게 계속 전화를 걸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받아아아아아!!!!!!!!!!!!!!!!!!!!!!!!!!!!!!!!!!!!!!!!!!!!!!!!!!!!!!!!!!!!!!!!!!!!!!!!!!!!!!!!!!!'

여기, 예나와 마찬가지로 격분한 여인이 한 명 더 있었다. 왜 늦은 밤 중에 말을 더듬으며 전화 통화를 걸어왔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게 되니 더 괘씸하여 은별은 용서할 수 없었다.

강은별! 오늘 그녀는 학교 수업 가는 것도 미뤄두고 민국을 아예 냄비 그릇에 삶아 먹을 작정으로 굴었다. 한 편 이 시각 민국은….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으어어 안 받아 안 받아 안 받아 안 받아 안 받아 안 받아 안 받아.'

받으면 안 된다. 받았다간 무슨 지경이 일어날 지 모른다. 안 그래도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에서도 엄청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받는 것만으로도 민국은 공포에 그만 심장이 정지되어 죽어버릴 지도 몰랐다. 이것은 그만큼 큰 문제였다.

'하하하하하! 조임이 덜해졌구나 암캐여! 어디 한 번 신나게 미쳐봐라!'

'…….'

'뭐하냐? 고작 이 정도냐! 만날 나한테 화만 내고 츤츤거리기만 일쑤였던 여편네 주제에! 어디 한 번 허리를 더 힘차게 놀려보란 말이다! 이렇게! 이렇게!'

'읏… 아흥!'

"이이이이이! 죽여버릴거야 서민구욱!"

미연시 세계의 기억이 통째로 머릿속에 들어오자 은별은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이를 갈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다른 세계의 은별이라 해도 결국엔 자기 자신이었다. 흑마법사가 준 정력제를 이용해서 그따위로 자기 쾌락을 위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이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임이 어쩌고 어째? 허리가 어쩌고 어째!!!!!'

한참 통화를 시도해도 받지 않자 은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집밖을 뛰어갔다. 이른 아침에 가방도 안 들고 나가는 은별의 모습에 어머니가 '가방 들고 가야지 은별아~.'하고 말했으나, 은별은 '민국이 죽이고 올 거예요! 가방 필요 없어요!'하고 직행이었다.

"마, 마, 마마, 마마마, 마돈나 돈나! 마 돈나 돈나 돈나!"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려던 것은 이게 아니었다.

"막아야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안에 벙커를 지어야 한다!"

핵미사일이 날아와도 막을 수 있게 단단함으로 철저히 무장해야했다.

"빠, 빠빠, 빨리!!!!"

참고로 민국은 밤을 새버렸다. 어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한 번 가위에 눌려버렸고, 이대로 자봤자 결국엔 악몽만 꾸겠구나 싶어서 그냥 새벽까지 버틴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 버틴들 절대로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리 전무했다. 고로 민국은 살기 위한 시간이라도 조금만 더 늘려보자고 다짐했다.

"끄어어어어! 13층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아기를 100미터 전속으로 달려가 받은 아기 어머니도 있었다! 나라고 못할 건 없어!"

그 주제와 이 주제는 달랐지만 그래도 엄연히 생명이 걸린 건 동일했다. 민국은 필사적으로 벙커를 설계했고, 그건 미연시 세계에서 제작했던 것과 비슷했다. 얀데레화 된 예나를 막기 위해 설치했던 벙커! 창고에서 상자 꾸러미들을 꺼내서 일단 현관문부터 틀어막는 민국이었다.

"와, 와와, 완벽하다! 완벽하다고!!!!"

장차 몇 십분 동안 박스 꾸러미들만 옮기던 민국이었다. 어느 정도 그럴 듯하게 방어 태세가 되자 민국은 어설프게 허리에 두 손을 얹었다.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틸 수 있지 않을까? 10분은 무리더라도 1분은…!

'결국에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 으아아아!'

피할 수 없다! 진정한 데드루트!!!!

{저벅 저벅}

"……!!!!!"

그리고! 그 찰나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민국은 그 소리에 그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 계단을 올라와봤자 있는 것이라곤 민국의 집밖에 없었다. 윗층 옥상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외에는…….

{똑똑}

'히이이이익!'

민국은 경기를 일으켰다. 이건 얀데레화 된 예나가 노크를 두드릴 때와는 또 다른 공포였다. 상자에 숨어서 현관문을 공포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민국이었다. 아침 햇살이 번쩍이는 현관문 너머로, 익숙한 여인의 실루엣이 보이고 있었다.

{똑똑}

"……."

"……."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던 민국이었다. 이윽고 노크를 하던 여인의 실루엣이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았다. 익숙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국아…."

뜨끔!

"거기 안에 있지…?"

"……."

"잠깐 나와보지 않을래…?"

예나였다! 역시 그녀도 이 건에 대해서 추궁을 하진 않곤 어려운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그 미연시 세계에서 예나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민국은 상자 뒤에 몸을 숨기고 바들바들 떨었다. 예나는 어미 같은 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내거나… 그러지 않을게. 그러니까 나와줘…."

"……."

마치 대화로 해결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석연찮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도둑이 제 발저린다는 말이 있는 이유가 다 있다.

"민국…아?"

"으아! 미안하다 예나야! 내가 진짜 그러려고 한 게 아니고! 으아아!"

상자 뒤에 숨어 있던 민국이 죄악감을 못 참겠는지 그렇게 사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한참동안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던 예나는, 그의 대답이 들리자 그제야 갸웃하던 고개를 원상태로 돌리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으응… 아니야. 민국이 네가… 나한테 그런… 걸 한 것도 조금은 이해되니까……."

"으아아! 아니야! 미안하다 예나야! 으어어어어!!!!"

"잠깐 문 좀 열어주면 안 돼…? 민국아…?"

예나가 온전히 질문했다. 민국은 본래 정당하게 벌을 받으려면 열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서도! 너무나도 밀려오는 공포감에 눈을 찔끔 감으며 상자에 몸을 더욱 숨겼다.

"미안하다 예나야! 나도 그래도 사람인지라 죽는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밀어보고 싶어! 으아 내가 널 못 믿는 건 아니고 예나야! 내가 그만큼 너에게 잘못을 했다는… 으아아!"

"……."

확실히… 암캐라던가 빨아라 라던가 그런 말은 너무 심하긴 했다. 특히 현대왕이 면모보단 서민국의 예의 바른 면모를 더 좋아하던 예나였기 때문에 당연했다. 하지만 예나는 그런 현대왕의 면모를 이젠 알고 있었고, 그러했기 때문에….

"괜찮아…."

"……."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그가 미연시 세계에서 예나를 대상으로 보여줬던 진심이, 예나의 심금을 울린 것도 있었다. 그렇다. 그 세계에서 마냥 예나를 덮쳐서 노리개처럼 대한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연거푸 같은 위기가 찾아오는 그 세계에서, 민국은 처음으로 예나에게 진심으로 부딪혔다. 더불어 그녀가 안고 있던 두려움을 처음으로 이해해주었다.

왜 자신이 흑화 소주를 마시고 그런 짓을 했는지, 왜 독차지하고 싶던 그녀의 질투가 본능이었는지… 말이었다.

"그 세계에서… 민국이 네가 날 처음으로 이해해줬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용서할 수 있어…."

"예, 예나야?"

상자에 몸을 숨기고 있던 민국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도 역시 예나답게… 은별이와는 뭔가 달랐다. 은별이라면 정말 부티나게 달려와서 킥이라도 한 대 갈궜을 것 같은데! 예나는 일일히 다 생각해보고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민국아, 문… 열어줄 수 있어?"

"그, 그래! 예나야! 내가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만은…!"

여러모로 감동한 민국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상자들을 치워댔다. 그래도 예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그녀만은 믿을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고 민국은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

그러자… 눈 앞에 보인 것은….

"……."

뚜둑, 뚜둑.

"나왔네."

"……."

"……."

"……."

현관문 옆 벽면에 등을 기대고 주먹을 우득우득 소리내던 은별과, 끝자락 계단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유이. 그리고 현관문 당면에 서 있던 예나였다. 예나만 있을 줄 알고 문을 열었던 민국은 땀이 뻘뻘 흐르는 얼굴로 세 명을 둘러보았다.

"예, 예나야… 이, 이건…?"

"……."

예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천사였다. 하지만 때때로는 악마가 될 필요도 있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마냥 천사인 건 재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조금만."

"……."

예나가 검지와 엄지의 사이를 조금 벌리고는 보여주었다.

"조금만… 용서해주려고…."

"……."

그 후, 민국은 작살나게 죽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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