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흩날려라....>
"후훗, 그래. 이건 꿈이다. 꿈인 거야.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건 지나친 악몽일 뿐이다."
어쩌면 서큐버스에게 가위를 눌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런 가당치 않은 악몽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후후후후… 그래, 빨리 꿈에서 벗어나자고. 이 더러운 꿈에서!"
집으로 돌아온 민국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세안대에 차디찬 물을 틀고 검지와 엄지로 코를 막았다. 물 웅덩이 속에 얼굴을 깊이 넣는 민국이었다.
"코르르르르…."
손가락을 때고 물속에 한참을 있자니, 민국은 입에서 슬슬 거품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허겁지겁 죽을세라 세안대에서 얼굴을 뺀 민국이 '푸확!'하면서 말했다.
"크큭! 이로써 난 현실에 돌아온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현실도피였다. 부디 아니길,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빌고 빌었으나 결코 현실이 그의 뜻대로 돌아갈 리 전무했다. 이미 돌이키기에는… 그는 마지노선을 넘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이외에 애꿎은 방문을 때려보기도 하고 일부러 서랍 모서리에 새끼 발가락을 부딪혀보기도 했으나, 아프기만 할 뿐 현실은 현실이었다. 꿈에서 깨어날 리 전무했다.
"씨바아아아아아알!"
절규하며 날뛰던 민국이었다. 미치광이처럼 굴기를 어연 십 분…. 이렇게 해봤자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은 희미하다고 느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민국은 중얼거렸다.
"그래, 침착해지자. 일단 침착해지자고!"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심장은 자꾸만 두근두근거리고 있었다. 얼마지 않아 찾아올 엄청난 위기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민국을 괴롭게 만들었다.
"흡!"
결국 민국은 최후의 수단! 딸딸이를 애용했다. 탁탁탁탁! 찍!
"휴우… 이제 좀 진정되는데?"
은별이가 찾지 못하도록 내 컴퓨터의 시스템 폴더 안에 숨겨놓은 민국은, 그 야동 파일을 통해 쾌락을 얻고 나자 더불어 머리도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이 순간을 많은 사람들은 현자 타임이라고 불렀다.
"후후후후후."
이제 냉철해진 머리로 이 상황을 어떻게 간파해나갈 건지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는 개뿔."
현자타임은 성욕으로 미쳐 있던 머리에 여유를 주는 것일 뿐, 그외에 효율적인 효과는 없었다. 고로 민국은 강렬한 절망감에 좌절했다. 침대의 이불 속에 들어간 민국이 바들바들 떨었다.
'어떡하냐! 어떡하냐고 이거! 쓔바아아아아알!'
흑설 공주는 말했다. 미연시 세계와 관련된 인물들은 하룻밤 자고 나면 꿈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 민국이 흑설 공주와 교류했다는 사실과, 미연시 세계에 대한 시스템의 정보. 그리고 그 미연시 세계에서 민국이 저질렀던 천박한 행위들…!
'주, 죽을 거야. 죽어버릴 거다으아아아아!'
해답은 없었다. 결국 도망가는 것이 최후의 방도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찰나였다.
'아니지 잠깐! 만일… 만일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 잠을 자지 않는다면?'
그럼 꿈을 꾸지도 않고 정보가 들어오지도 않았으니, 미연시 세계와 관련된 내용은 하나도 기억을 못하지 않을까?
'는 쓔바아아아알! 결국 언젠간 자게 될 텐데 그럼 좆 to the 망이잖아!'
언제까지고 못 자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에게 수면욕이란 3대 욕구 중 가장 강한 욕구로서, 없어선 안 될 욕구였다. 계속 못 자게 했다간 여인들에게 어떤 신체 문제가 벌어질 지도 몰랐고, 그것을 그녀들이 이유 없이 행해줄 까닭도 없었다.
"훗."
민국은 결론을 내렸다.
"인생 씨벌."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데드 루트. 어떤 필사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더라도 결국엔 똑같은 결과만이 존재할 것이었다.
민국도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처절한 발버둥은 치지 않았다. 이윽고 냉장고에 오랫동안 보관해두었던 맥주 한 개를 꺼내들었다.
뚜껑을 개봉하고 한 차례 꿀꺽꿀꺽 마신 민국은 '캬아!'하면서 의자에 폼나게 앉았다.
"훗… 갈 땐 가더라도, 맥주 한 캔은 나쁘지 않잖아?"
은별과 예나에게 부디 봐달라고 메시지라도 보내볼까 했지만, 아직 잠도 못 잔 그들이 민국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리 전무했다. 그리고… 미연시 세계에 관련된 사람은 단지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예나 어머니야 잠깐 출연이었으니 큰 문제가 안 된다지만, 유이와 서라는 어찌할꼬."
서라도 예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단 시간 출연이었으니 잘만하면 기억이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유이는 어찌할까? 분명히 유이의 머릿속에는 모든 기억들이 사르륵 들어갈 터였다. 그럼 민국은 은별이랑 예나에게만 맞아죽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죽겠지.'
흑화 소주를 마시고 미쳐 날뛰던 유이를 떠올리자니 민국은 포기의 미소만이 떠올랐다.
"그래도 동정은 땠으니… 갈 땐 가더라도 마법사는 아닌 셈이로군…."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어.'라며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 민국이었다. 후우우웅~. 물론 겨울 바람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금세 문을 닫아버렸지만.
"그리고 이 야동도 삭제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죽고 나서 이 야동이 내 부모와 동생에게 발각 당한다면 후후후후…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리고는 은별이의 눈을 피해 헌신 있게 쌓아두었던 야동 폴더도 삭제해버리는 민국이었다. 파일 폴더가 너무 커서 영구적으로 삭제하겠다는 표시창이 뜨고, 민국은 예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흩날려라… 야동 폴더…."
그렇게 야동이 영구 삭제되고, 민국은 침대에 대자로 몸을 눕혔다. 눈을 감은 그에게 다음 날의 아침은 지옥과도 같으리.
"으아아아아아아! 너무 두려워서 잠이 안 와!!!!!!!!!!!!"
하지만 잠을 못 자는 지금도 지옥 같으리! 머리를 박박 긁고 밤에 미친 놈처럼 춤도 춰보았지만 답은 없었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은 민국은 OTL 자세로 눈물을 엉엉 흘렸다.
"으헝헝… 내가 왜 그딴 도 넘는 짓을 저질러서리 으헝헝!"
그러자 돌연 은별이의 연락처가 떠올랐다. 믿져야 본전이지만… 그래도 내일을 위해서 몇 가지 변명이라도 미리 늘어놓는 게 좋지 않을까? 못 알아듣더라도 말이었다!
'옛말에 성공한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로 잡았다고 했다. 나도 내 인생의 대 위기를 기회로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진정한 성공자가 아닐까?'
어디까지나 자기 변명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민국은 그 변명을 토대로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은별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그 미연시 세계에서는 통화의 신호음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는데… 현실에서만큼은 그 어떤 때보다도 1분이 1년 같은… 괴로운 시간이었다. 밤이라서 많이 바쁜 모양인지 한참동안 전화를 받지 않던 은별이 마침내 받았다.
"무슨 일이야."
"어, 으, 으, 으, 으, 으으으으, 으으으으, 으 은별낭자!"
"……."
참고로 은별은 그토록 지겹던 과제 모임의 끝마무리에 슬슬 도달하고 있었다. 허나 임신과 더불어 여러 문제들이 재앙처럼 겹치니, 은별도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하하하하! 아, 아니 그, 그 뭐시냐. 잘 지내나 해서! 보고 싶어서 연락했지!"
"…어이없네."
임신 이후 어떻게 대처 해야 할 지 몰라 막막해하는 민국. 그런 민국을 이해하긴 했으나 그래도 더 이상 남자 친구라고 생각하기는 뭐한 상태였다. 이 애매한 관계 선에서 은별은 보고 싶어서 연락했다는 그의 말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은 했어?"
은별은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질문이라 한다면 당연히 한 가지였다. 예나와 자신이 만든 생명을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이었다. 허나 지금 민국은 그것도 중요했지만 다른 것에도 크게 신경을 쓰는 처지인지라….
"어? 아아, 그, 그건… 하하하하!"
"……."
무슨 연유에선지 말을 심하게 더듬거리는 민국이었다. 오늘따라 그의 이상함에 은별이의 촉이 매섭게 흔들렸지만, 크게 신경 쓰고 싶은 맘도 없어서 입을 꾹 다무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내일 찾아올 공포에 말을 더듬거리면서 다짜고짜 고백했다.
"으, 은별아! 사,사, 사,ㅅ ㅏ사사 사랑한다!"
"…뭐야 뜬금없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내일 내가 잘못한 죄가 떠올라도 부디 그 빈유 같은 마음으로 용서해줘!'라고 덧붙이려 했으나, 입이 뜻대로 열리지 않았다. 어느 덧 민국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민국은 말을 이어 나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 나나나, 난 널 절망 사랑한다! 은별아!"
"…절망이 아니라 정말이겠지. 할 말은 끝났어?"
많이 피곤한 탓에 서둘러 연락을 끊고 싶은 은별이었다. 하지만 웃긴 점이 뭐냐면… 이 와중에 느닷없이 고백을 하는 민국의 행위에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는 것이었다.
"으아아아아! 은별아…! 사랑해애애애애애!"
"미친 놈… 밥 먹고 잠이나 자."
뚝하고 통화를 끊는 은별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벌벌 떠는 듯한 민국의 행위에 의아함은 느꼈으나, 추궁을 하기도 귀찮은 맘이었다. 통화를 종료한 휴대폰을 막연히 내려다보던 은별이 이윽고 그것을 꾸욱 쥐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뱃속의 아기도 결국엔 어떻게든 정리해야했고, 민국과의 사이도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은별은 마냥 이러고 있는 게 결코 좋은 행위가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으어어, 다,다, 다음엔 예나."
통화가 종료되고 나서야 내일의 불안감이 실감됐는지 민국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휴대폰을 다루기도 어려운 손가락으로 예나에게 연락을 거는 민국이었다. 뚜루루루…. 이번에도 몇 차례의 기나긴 신호가 있고 나서야 예나가 전화를 받았다.
"응… 민국아…."
"예, 예예예예 예나야!"
"……?"
'왜 그래 민국아…?'하면서 의아함을 덧붙이는 예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이토록 말을 더듬거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민국은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해서 꽤나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어, 내, 내일 있잖아! 아니 내일… 그 뭐시다냐 아으아아!"
"……? 침착해… 침착해 민국아."
"그, 그래! 침착해야지! 예, 예나야! 내가 진짜… 진짜 네 남자친구는 아니더라도!"
첫마디가 '남자친구는 아니더라도!'다. '응응'하면서 민국의 말을 서슴없이 듣고 있던 예나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졌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이 예나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그래도 난 널 진짜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여인처럼!"
"……."
"그리고… 어… 뭐시냐… 진짜 널 좋아한다는 거야! 그게 이성이든 동성이든! 으어어, 그, 그러니까 내일 있을 일은 @#*(!*#(@!#"
"……."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서 그런 말을 해오니, 예나도 의문일 따름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무심코 던진 말은 일종의 고백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진심을 일순간 이해했던 예나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응… 고마워 민국아…."
"으아! 내일 뭔 일 있어도 진짜 나한테 실망하지 말고…!"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망할 일은 없어 민국아…."
"그, 그게 으아엏 @*#(@!*#([email protected]"
"내 걱정 너무 안해도 돼 민국아…. 난 민국이 널 믿으니깐…."
이미 고백에 감동을 하다 못해 눈시울까지 붉어진 예나였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말에 (@*(#*!(# 거리면서 그저 이상한 소리만 지껄일 따름이었으나, 예나는 이미 고백에만 모든 신경을 두고 있던 지라, 마음이 따뜻하다 못해 푸근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그가 '그, 그, 그럼 끊을게! 조, 조심해 예나야! 아, 아니! 용서… 으아아!'하면서 전화를 끊으려 하자 예나는 해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자 민국아…."
그리고 통화가 뚝 끊겼다. 예나는 한동안 통화가 끊긴 자신의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민국이가 다짜고짜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진심을 전달해왔다는 게 내심 기분이 좋았다.
"……."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예나였다.
* *
그리고 다음 날.
"……."
눈을 뜨자마자 급격하게 기분이 다운되는 걸 느끼는 예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