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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03화 (203/369)

203화

민국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마법을 통해서 만들어진 세계. 또한 흑설 공주가 ‘미연시’라고 덧붙인 게임 세계였다.

때문에 민국은 무슨 짓을 하던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이곳이 민국이 현존하던 세계의 현실이 아니라 한들, 그렇다고 해서 ‘가상 세계’라 단정 지을 순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생활하는 은별, 예나, 서라, 유이 모두 실존하는 인물이긴 했으니까. 그저 시간을 돌려 과거를 돌렸을 뿐, 결국 그들은 실존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크하하하! 찌찌파티!’

남자의 생식 본능에 의거해서 난리 부르스를 친 민국이었지만, 그 난리를 치는 것에도 일정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이미 민국과 관계를 맺어 임신을 했던 은별이나 예나는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전혀 관계없는 제3자의 몸까지 탐닉시켜 욕구를 충족시키는 건 강간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고로 이 미연시 시스템은 그런 이기적인 욕구 해방을 조심하고자 게임을 중단시켰다. 고로, 민국의 현재 세계는 중단되어버린 셈이었다.

“살다 살다 자네 같은 생 또라이는 처음 보는구나.”

공기도, 시간도, 모든 것이 중지되어버린 세계에서 흑설 공주가 등장했다. 어둠의 포탈 같은 것을 타고 내려온 그녀의 모습에 발가벗고 있던 민국은 어느 샌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의도해서 입은 게 아니었다. 공간이 하얀 색으로 변질됨과 더불어, 민국이 본래 흑설 공주와 조우했을 때의 양복으로 바뀐 것이었다.

민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말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흑설 공주느님!”

“자네는 어느 미연시에서 공략도 하지 않은 여자 캐릭터를 마음대로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지금 자네가 하려 했던 행위는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19금 성인용 미연시 무시하십니까? 거기선 레이프 플레이도 가능하단 말입니다 으아아!”

완전 분위기에 취해 있었는지 민국은 현실로 돌아오자 급격히 좌절하는 모습이었다. 하얀 공간에 서서 흑설 공주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타깝지만 이건 19금 미연시되 루트가 엄밀히 존재하는 미연시란 말이지. 레이프 같은 건 불가능하게끔 설정해두었단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 있지. 언젠간 여성부가 미연시에도 아청법 위반을 걸어둘 것이야. 난 현명하기에 그것을 먼저 준비하는 것뿐이다.”

흑설 공주는 절대로 사회를 풍자하는 발언을 한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언급한 것뿐이었다. 민국은 한참동안 진정을 못하고 난리 부르스를 치다가, 몇 분이 경과하고 나서야 진정하는 모습이었다. 흑설 공주가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는 것 같아 얘기하는데, 그대가 그토록 난리 부르스를 치던 그 세계 역시 실존하는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명심하게나.”

“아아… 그랬었지요 참….”

흥분은 이미 빠진 지 오래. 그리되니 좀 침착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따지고 보면 흑설 공주가 미연시라 언급했던 그 세계도 결국 과거로 돌아왔을 뿐, 실존하는 세계. 흑화 소주를 마시고 주변 인물에게 찝쩍대다가 큰 사고가 나면 어떡할 것인가.

어차피 리셋을 할 수 있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었을까? 분위기에 취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못했었다. 민국은 그제야 자기 잘못을 알 수 있었다.

“휘유… 어쨌든 일은 다 끝난 것 같군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흑설 공주느님.”

“그런데 결과적으로 바뀐 건 하나도 없지 않느냐? 정말 그것으로 충분하느냐?”

흑설 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민국은 언제 ‘꺄아~ 닝겐 정자 파티!’하면서 춤사위를 벌였냐는 것처럼, 다소 진지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충분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긴 했으니까요. 결국엔 피해선 안 되는 거겠지요.”

“호오, 책임감 있는 남정네로구나. 가끔 미친 짓하는 걸 제외하면.”

“훗. 너무 완벽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재미없어 해서 단점 좀 만들었습니다.”

손등을 들어 입가를 가리고 키득키득 웃던 흑설 공주였다.

“그런데 나머지 일은 정말 잘 수습할 수 있겠느냐? 이곳에서 벌인 행적을 볼 때 쉽사리 수습될 것 같진 않은데?”

“앵? 그거야 말로 뭔 소리예요? 수습할 건 아까 말했던 것 말곤 없는데.”

한 쪽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까딱까딱이는 흑설 공주였다.

“자네는 미연시 세계에서 너무 많은 짓을 저질렀어. 현실로 돌아가면 결국엔 연관이 될 텐데 어찌할 생각이냐고 묻는 거다.”

민국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금붕어처럼 껌뻑였다.

“그게 대체 뭔 소립니까? 미연시 세계랑 현실 세계랑 연관되는 게 뭐가 있는데요?”

“당연히 기억이지.”

흑설 공주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결과만 달라지지 않을 뿐, 자네랑 깊이 관여했던 인물들에겐 미연시 세계에서의 일들이 모두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느냐?”

“???????????????????????????????????????????????????????”

민국은 순간 당황해서 소리쳤다.

“뭔 소립니까! 그런 얘긴 한 적도 없잖아요! 아니 과거를 변경해야 오늘의 결과가 바뀐다면서요!”

“과거를 변경하면 오늘의 결과도 바뀐다고 말은 했지. 허나 과거를 안 바꾼다고 해서 미연시 세계의 일들이 영향을 안 끼친다고 말한 적은 없단다. 현실 관계자들의 머릿속엔 자연스레 자네가 했던 기억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 몰랐느냐?”

“말을 해줘야 알지요 이 사람아!”

“흑마법사와 절친한 관계길래 그 정도는 알고 있을 줄 알았지. 본래 흑 마법에는 조건이라는 게 항상 붙는다는 소릴 들어본 적이 없느냐?”

들어본 적은 있다! 어떤 마법이든 항상 필수적인 조건은 필요하다. 그 마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든, 그 마법을 통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든, 필수적인 조건이나 행동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것은 민국이 여자의 가슴을 만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과도 마찬가지였다.

‘어거지다.’

이건 어떻게든 민국을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리기 위한 누군가의 소행이다! 컴퓨터로 키보드를 두드릴 것 같은 어떤 빌어먹을 자장면 새끼가 만들어낸 비극이란 말이다!

‘애초에 말을 해줬으면 그런 짓까진 안 저질렀을 텐데!’

아니, 이런 마법을 걸어달라고 승낙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흑설 공주와 흑마법사의 차이였다.

흑마법사는 민국의 팬으로서, 마법을 걸게 되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꼬박꼬박 알려주었다. 그러나 흑설 공주는 달랐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 찾아온 것도 민국이 먼저였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과거를 바꾸고 싶다고 하니 ㅇㅋ하고 들어준 것뿐이었다.

“흑설 공주님! 돈 드릴게요! 없던 걸로 쳐주십쇼!”

그 말에 이번엔 반대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흑설 공주였다.

“싫다.”

“어째서! 왜! 무엇을! 누가! 어찌하여!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것에 맞춰서 정확히 이유를 설명해보십시오!”

흑설 공주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흑마법사와는 다르게… 입꼬리를 쫘악 늘리는 귀여운 미소였다. 하지만 그 예쁜 미소 안에는 날카로운 장미의 독이 담겨 있었다.

“재밌지 않느냐?”

“예?”

“과거로 돌리는 마법은 나도 상당히 다루기 어려운 마법이다. 그런 마법을 몇 십번이고 자네를 위해 사용해주었지. 그럼 나 역시 자네를 통해서 받아야 할 게 있지 않겠느냐? 처음엔 그저 내 흑화 소주로 인해 생긴 사건이었으니, 책임감을 느끼고 공짜로 도와주었으나… 마지막 세계에서 그대가 보인 생 또라이 짓에서 생각이 바뀌어서 말이다.

“…….”

“그런 또라이 짓을 하고 나서 현실로 돌아가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을 지 너무나도 궁금한데, 기억을 지워줄 리 없지 않느냐?”

“으아!!!!!!!!!!!”

해맑게 웃는 흑설 공주를 보면서 민국은 전율했다. 이 순간 민국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건… 이 여자는… 흑마법사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다. 흑마법사는 그래도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적당한 보답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반대로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민국이 이따금씩 이기적인 놈이 된 것 같아 맘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흑설 공주는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는 해준 만큼 반드시 얻어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돈에서 얻을 수 없는 막대한 재미랄까? 어차피 돈과 인맥은 누구보다도 잘난 흑설 공주였기에, 그녀는 슬슬 지구라는 세계에 대해 싫증을 내고 있었다. 할 것도 없고 본래 세계로 돌아갈까 마음을 먹던 찰나에… 그를 발견한 것이다.

‘이 여자! 사디스트다!!!!’

민국은 직감했다. 자신의 주변 여자 중에 사디스트 기질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유이밖에 없었다. 아니, 유이는 그래도 변태 짓을 할 때나 나쁜 짓을 할 때만 정당하게 벌을 주는 여자였다. 남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면서 재미있어 한 적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흑설 공주는… 풍기는 분위기에서부터 달랐다.

‘그대가 어떤 몸부림을 칠까 몹시도 궁금하구나.’

눈빛에서 그 감정이 생생히 느껴지고 있었다. 민국은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씨부랄!’하고 소리쳤다. 어느 순간 하얀 공간은 사라지고, 시끌시끌한 주점의 방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머 어머 오빠도 참!”

“하하하하!”

섹시한 치마를 입은 여성들과 놀고 있는 사업가 남정네들. 민국은 그 호탕한 웃음바다 속에서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턱을 괴고 야한 눈빛으로 민국을 쳐다보는 흑설 공주는, 기품 있는 미소 그 자체였다.

“용건은 여기서 끝난 것 같구나.”

“…….”

진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털가죽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누가 봐도 아름답고 귀티가 나며, 동경심을 한 눈에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얀 공간에서 그녀의 실체를 마주한 민국은 인상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기억 좀 없애주십쇼.”

“싫다.”

“뭐 발이라도 핥으면 없애주실 겁니까?”

“내 발 마사지 해주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이 잘 생긴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만 좀….”

“잘 생기긴 했지만 아이의 아빠가 아니느냐? 내 것이 아니지.”

“어쩌면 국내에서 일부다처제를 허가해주는 법안이 나올 지도 모릅니다.”

“난 역하렘을 꿈꾸는 여인이라서 말이다.”

끄떡도 않는다. 내공에서 이미 수준 차가 너무 나고 있었다. 민국이 부들부들 떨자니 흑설 공주가 은밀한 미소와 함께 말을 던졌다.

“그래도 데드 엔딩 루트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테고, 미연시 세계에서 연관이 얕은 인물들은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 그건 안심해도 될 거야.”

“…….”

“관여된 인물들이 기억을 갖게 되는 건 잠을 자고 나서 일거야. 자네가 겪은 것들을 꿈속에서 보게 될 텐데 현실임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고, 또한 나라는 존재의 도움을 받아 자네가 마법의 세계에 들어갔던 것도 알게 될 것이야.”

“으아! 이 사디스트 같은 여자야!”

결국 참지 못하고 흑설 공주의 멱살을 붙잡는 민국이었다. 흑설 공주는 빙긋 미소 짓고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있던 사업가들과 여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흑설 공주에게 하는 민국의 행패에 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곧 말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흑설 공주님에게 무슨 짓이야!”

“마님에게서 손 때 이 자식아!”

“으아아아! 군말 없이 도와주는 줄 알았더니! 이 사디스트 같은 여자!”

바둥바둥거리며 흑설 공주에게 소리를 치는 민국이었다. 흑설 공주는 주변 사람들로 인해 민국이 방안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멱살로 주름 진 옷을 털면서 웃음 지었다.

“지루했던 세계에 재밌는 광대 한 명이 들어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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