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민국아…."
예나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민국에게 안겨왔다. 하릴없이 안겨온 그녀는 천천히 민국의 볼을 만졌다. 민국은 그녀가 담고 있는 묘한 기백에도 조금도 떨지 않았다. 민국은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는 예나의 손을 붙잡다가 말했다.
"그래. 술에 심하게 취했구나."
"아니야 안 취했어."
예나는 부정하고 있었다. 이제야 민국은 그녀의 행위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예나가 이토록 술에 취해서 민국의 집에 방문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하지만 민국은 끝까지 예나의 감정은 무시하고 외면하려 들었다.
그것이 은별을 향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 그 도리를 지키고 싶었다면 예나를 괴롭히지 않고 멀리 보내주는 게 올바른 산책이었겠지.
"많이 힘들지?"
"……."
예나의 볼을 어루만지는 민국이었다. 부드러워야 할 그녀의 볼은 빗물에 젖어서 차디찼다. 민국은 화장실에서 수건을 하나 가져와 예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취기에 취해 민국의 손길에 얼굴을 맡고 있던 예나가 입을 열었다.
"민국아…."
"그래."
"민국아…."
하릴없이 호명만 하는 예나였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던 민국은 천천히 그것을 내려놓았다. 예나의 눈동자에서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주르르륵… 천천히 흘러 내렸다. 그것을 목도한 민국이 잠시간 침묵했다.
"민국아… 흑…."
"……."
그의 따뜻한 배려에 예나는 또다시 마음이 저려오는 모양이었다. 흑화 소주는 본능을 고스란히 드러나게끔 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본능이 마냥 추악하고 독차지하고 싶은 욕구만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었다.
그간 참고 있던 내재된 슬픔과 통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예나는 그간 은별에게 빼앗겼던 그 자리에 대한 서글픔을 토해내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예나가 이토록 눈물에 젖어 슬퍼했던 적이 있는가?
'늘 내색하지 않았고, 늘 혼자 참으려고 굴었다.'
그것이 예나였다. 이따금씩 감정을 드러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던 그녀였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면 자신은 편해지더라도, 그로 인해 상대방이 겪게 될 고초 같은 걸 늘 염려했던 것이다. 민국은 그런 예나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했어."
민국은 예나를 껴안아 주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과였다. 아기를 뱄다는 사실에 의무감에 똘똘 뭉쳐 그녀를 보지 않았다. 은별이에게 일편단심을 고집하면서 예나가 곁에 있길 바란 탓에 감정들을 사소롭게 판단했다.
"잘못했어 예나야."
"흐으윽…."
등을 다독이는 민국의 모습에 안겨 있던 예나가 그제야 울음을 크게 터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런 울음조차 터트려도 되는 것인지, 그게 되레 민국에게 민폐가 아닐 런지 고심하던 예나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그 본능조차 민국은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러자 예나는 민국의 옷깃을 꽈악 붙들면서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앙!"
"……."
토해내는 그 울음에 민국도 순간 눈물을 글썽일 뻔했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서글프게 짝사랑을 해왔는지 본능적으로 체감할 수 있던 것이다. 모든 게 자기 잘못이다. 자기 책임임을 알았기에, 민국은 한층 더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예나야…."
정말로 미안해, 덧붙이는 민국이었다.
결국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수습을 한다고 하긴 했지만, 임신을 했던 결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올바랐다.
민국도 이젠 과거 변경은 포기한 셈이었다. 예나를 달래줌으로서, 어찌 된 영문인지 의도치 않게 관계를 맺는 결과는 사라졌다.
어쩜 그녀가 그토록 안고 있던 슬픔을 이해해주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과거를 토대로 결과를 바꿀 생각은 한 톨도 없었다. 왜냐면 이 과거는… 틀렸기 때문이다.
"……."
이 과거는 어디까지나 예나를 이해하기 위한 과거일 뿐이었다. 그녀에게 사과를 하기 위한 과거.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면 지금의 기억을 예나가 안고 있을 리 전무하겠지. 다시 한 번 올곧게 사과를 하는 게 민국에게도 응당한 해결책이리라.
…그리고 임신을 한 것에 대해서도 피해선 안 되었다. 한 번은 부닥치는 게 올바랐다.
그것이 본래의 서민국이었기에.
'그래, 그거면 충분히 됐어.'
이제 이 과거 변경에 대해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민국의 목적은 사실상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생각해보면 말이지 후후.'
이제 진지한 건 저리가라 하고, 민국은 다른 의미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나도 그렇고 은별도 그렇고 말이야. 은근히 내 신경을 건드린 적이 있어. 특히 예나는 왜 항상 마음 속에만 담고 있는 거냐고! 내 이기적인 행동에 한 번씩은 화라도 냈으면 좋을 텐데. 결국 내가 알아챌 때까지 마냥 가만히 있었잖아? 아니 그런 예나기 때문에 좋긴 하지만. 어쨌든 그리고!'
이번엔 은별!
'강은별! 후후, 빈유이자 완벽한 빈유인 내 여자친구지. 하지만 내 단호히 말하길, 빡치지 않는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녀의 욕설에 조금씩은 상처 받기 마련이란 뜻이지! 후후후후.'
갑자기 서라랑 유이까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서라 그 녀석도 거참 은근히 날 약올린단 말이야. 나잇값 좀 하라는 둥, 온니짱의 시대는 지났다는 둥, 어이가 없군 닝겐 주제에 크큭.'
이번엔 유이.
'유이 그 가슴 큰 여자는 항상 날 조오오온나게 때린다고! 난 발 패티쉬를 가진 남자가 아쉽지만 아니란 말이제! 때릴 거면 가슴으로 때려줄 것이지 늘 발로 투다다다닥! 진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건 내 타고난 맷집과 하늘이 내려주신 기적의 운빨 때문이지! 슈벌 맞아도 싸!'
그러하다. 고로 민국은 복수를 하고 싶었다.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가상 공간에서의 복수를…. 그저 꿈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였던 앙금과 부들부들 떨리는 복수심을 어떻게든 해소해보고 싶은 것이 민국의 욕심이었다. 그리고 그 욕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후후후후후후."
"……."
"우후후후후후후."
"……?"
흑화 소주에 취해 알딸딸한 모습으로 민국에게 기대 있던 예나였다. 돌연 코앞에서 들려온 이상한 웃음 소리에 예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울음을 그친 예나는 취기가 조금은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당면의 민국이 뭔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자 예나는 저도 모르게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국아…?"
"그래 그래 예나야. 네 맘 다 알아. 내가 보고 싶고 사랑스럽고 좋아 죽겠지. 암, 그렇고 말고. 네 맘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말고."
"……."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날 좋아한다면 후후, 감당해야 할 부분도 있는 거야. 그래, 예를 들면 이런 거지."
민국은 예나가 쥐고 있는 흑화 소주를 낚아챘다. 그리고 많이는 아니고 한 모금만 꼴까닥하고 마셨다. 자발적으로 마시는 민국의 행동에 예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윽고 '키아!'하면서 입가에 흐르는 술을 소매로 닦는 민국이었다.
"맛 하난 죽이는구만. 괜히 흑화 소주가 아니야. 진심으로 사람을 흑화로 만드는 기질이 있어."
"민…국아…?"
"아, 예나는 신경쓰지마. 어차피 이건 사라질 과거이고 고로 나도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맘이 좀 들었으니까."
그때 우우웅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민국은 이 시간에 누가 전화할 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은별이었다.
"후후후후, 예나야 이거 봐봐. 은별이다. 네가 그토록 질투하는 은별이. 내 여자 친구!"
"……."
"기다려봐라 후후 예나야. 우후후후후."
본래라면 예나가 '은별'이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민국이 먼저 보여주면서 은별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으니, 이건 술에 취한들 본능적으로 반응하기도 뭐했다. 민국은 예나의 어깨에 한 쪽 팔을 두르고 자기 쪽으로 당기면서 통화를 받았다.
"어우, 이게 누구신가. 우리 사랑사랑스런 은별님 아니시요?"
"…받자마자 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술이라도 마셨어?"
"오우! 역시 직관력이 좋은 여편네! 나의 여편네! 과연 나의 여편네답게 내가 술을 마셨음을 단숨에 아시는군요! 크하하하!"
당돌하게 폭소를 터트리는 민국. 제정신이 아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절제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는 사라질 과거였기 때문에. 이윽고 민국의 말에 은별이 반응했다.
"정말 어이없네…. 술 취하셨으면 잠이나 자시지요? 근데 아까 전에는 술 마실 거 같단 얘기도 안하더니…."
"아 그거? 글쎄 우리 집에 예나가 놀러 왔지 뭐야!"
"뭐?"
은별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체온이 낮아진 듯한 음성에 보통이라면 쫄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차피 없어질 과거니까!
"한예나가 놀러왔다 은별아! 우리 집에! 술에 취해서 말이지! 크하하하!"
"…지금 그 말이 사실이야?"
"암 사실이고 말고! 지금 그녀와 한 몸으로 융합되기 위해 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말씀이다!"
"미친…놈!"
은별이가 부랴부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지금 어지간히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으니 헛소리를 하나 본데! 빨리 예나 보내고 잠이나 자!"
"싫은데? 은별이 네가 내 집에 와야 예나 돌려보내줄 건데? 그때까지는 한몸 될 건데!"
"미친 놈아! 미친 거 아니야? 이거 진짜…!"
민국의 평소 같지 않은 반응에 몹시 당황하던 은별이 얼굴을 크게 붉혔다. 이윽고 은별이 말했다.
"꼼짝말고 있어…. 가서 진짜 무슨 일 있으면 죽여버릴 거야!"
"오메 무서워라~ 그래 빨리 와줍쇼!"
"씨이!"
뚝하고 전화를 끊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룰루랄라 만면에 여유로운 미소를 피우고 흥겨워하면서 휴대전화를 끊었다. 평소 같지 않은 민국의 행동에 예나는 술에 취한 상태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민국이 그런 예나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뭐야, 술에 취했으면서 왜 그렇게 얼떨떨하게 쳐다봐? 본래라면 '은별이! 은별이랑 통화한 거지? 나 말고 은별이랑! 으으! 부들부들! 치가 떨리고 질투가 난다! 민국이 덮쳐버릴거야!'하는 게 정상 아니야?"
"민국…."
"아! 기다리고 있어봐.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잊어먹을 뻔했구만."
민국은 흑화 소주를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007 가방의 알약을 하나 꺼내들었다. 이때는 아직 이 정력제가 사용되지 않은 실정. 그러나 결국 이 과거에서 벗어나게 되면 사라질 아이템이었다.
'이 귀한 아이템을 기억도 없이 사용해먹었으니 아깝지 않을 리가 있나.'
민국은 알약을 불끈 쥐다가 자신의 입속에 투입했다. 그리고 한 입에 꿀꺽 삼키자!
"…오오오오오!"
엄청난 열기가 솟구쳤다. 그렇다 이것은! 마치 청양고추의 매운 맛을 성기에 두루두루 담은 느낌이었다. 민국은 폭발할 듯한 자신의 엑스칼리버를 보았다. 주체할 수 없다.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이 용솟음친다.
"분노하라 나의 이무기여!"
민국은 바지를 벗고 탁탁탁 있는 힘껏 치기 시작했다. 예나는 굳건히 닫힌 안방문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예나였다. 그때, 방문이 끼이익 열렸고, 예나는 휘둥그레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민국…아…?"
"후후후, 어떠냐 예나야. 이 18센치의 성스러운 검을 보아라!"
예나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크읏!'하고 절정에 도달한 민국이 고개를 쳐들면서 소리쳤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크아아아아! 받아라!"
"……."
"왠지 모르게 200회 발사 빔이라 외치고 싶구나! 200회 발사빔!"
폭풍 사정권이 예나의 몸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