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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99화 (199/369)

199화

사실상 기존의 결말을 변경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결말이 변경된다 한들 그것이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던 결말일 가능성은 적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나비효과처럼 어떤 사소한 것이 영향을 받아 일이 틀어지고마는 것이다.

민국은 그것을 흑설 공주의 미연시로 몇 번이고 체감했다.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마음을 굳건히 먹고 미래 바꾸기에 돌입하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도 진짜 안 되면 진심으로 빡친다.'

과연 이번에야 말로 하늘이 민국을 도울 것인가? 그 누구도 이번의 결과를 모르는 채로, 다시 한 번 민국은 얀데레 연애 시물레이션에 몰두하게 되었다.

'유인하자.'

결국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은 그것이었다. 유인만큼 효율적인 방식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찰서에 데려가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데려간들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그렇다고 예나를 마냥 자신의 집 앞에 서 있게끔 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건강을 해치지 않고, 은별이도 엮이지 않게끔 해서 일을 마쳐야만 했다. 그러려면 역시 유이를 통해서 제압하는 게 좋을 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흑화 소주를 마시자마자 돌변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민국은 진짜 죽을 것 같아 참기로 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가족에게 데려가보는 거다.'

민국은 예나의 가족 번호도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 했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들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아버지의 연락처를 확인하던 민국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주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먼저 집을 나와 예나가 왔을 듯한 시간에 1층 문틈으로 슬쩍 2층 쪽을 보았다.

"……."

이미 예나가 2층 현관문에 우두커니 서서 대기 중에 있었다. 민국은 몇 발자국 뒤로 떨어진 다음에 예나의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뚜루루루…. 예나의 어머니는 보통 이 시각에 주무시는 일이 많았기에 전화를 거는 것 자체가 매우 송구한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녀를 제지하려면 이보다 나은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음… 누구…."

"안녕하세요 예나 어머니. 저 민국입니다. 주무시고 계셨나요?"

민국은 오랜만에 뵙는 것이니 만큼 예의 바르게 연락을 걸었다. 그러자 잠시 눈을 비비면서 잠에서 깨려고 노력하시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예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민국이? 예나 친구 민국이?"

"하하, 네 맞습니다 어머니."

"갑자기 무슨 일이니? 이 늦은 시간에?"

자는 상태에서 연락을 거니 조금 화가 난 모양이지만서도, 그래도 민국은 꿋꿋이 자기 할 얘기를 했다.

"혹시 어머니. 예나가 외출한 거 아시고 계신가요?"

"응? 외출?"

저토록 술에 취한 예나를 그저 아무 일 없이 바깥으로 보내줄 리 전무한 예나 가족이었다. 고로 예나 가족이 모르는 사이에 예나가 빠져 나왔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민국이 말을 이었다.

"네. 다름이 아니라 예나가 지금 제 집 현관문 앞에 서 있어서요. 목소리를 들어보아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구나. 잠시만 기다려봐주렴."

"네 어머니."

한 번 예나의 방에 올라가서 확인을 해보려는 것 같았다. 민국은 순조롭게 기다렸다. 잠시 후 방을 확인했는지 예나의 어머니가 긴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예나 거기 있니?"

"네 어머니."

"아니 애가 왜 거기로 갔대? 혹시 너랑 오늘 약속한 거라도 있었니?"

"그런 건 없었습니다 어머니. 많이 취했는지 예나가 조금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술 냄새도 좀 많이 풍겼구요."

'에구머니나.'하면서 놀라던 예나 어머니가 옷을 갈아입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민국이 너 지금 어디 사니? 내가 너네 집 위치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역 1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머니. 예나가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죄송하지만 빨리 와주길 부탁드릴게요."

"그래!"

전화가 뚝 끊겼다. 민국은 '흐읍!'하고 숨을 내쉬었다.

나쁘지 않다. 왠지 이런 형식으로 일을 진행하면 순조롭게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맘이 들었다.

민국은 --역 1번 출구에서 예나 어머니가 오시길 기다렸다. 이윽고 허겁지겁 전철을 타고 도착한 예나 어머니가 민국에게로 다가왔다.

민국은 오랜만에 보는 예나 어머니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그래,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늠름해졌구나. 그래서 예나는 어디 있니?"

"지금 제 집 앞에 있습니다.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요. 집 안에 들여보내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는 민국에게 예나 어머니가 말했다.

"나야 말로 미안하지. 그나저나 예나 애가 아까 전에는 분명 취하지 않고 정상이었는데…."

어머니 입장에서는 많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민국은 그런 어머니를 이끌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이윽고 폭우가 부는 날씨를 뚫고 집으로 올라가는 1층 앞에 도착한 민국이었다. 끼이익하고 소리가 나도록 문을 열자, 민국의 집 현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예나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갔다.

"예나야!"

"……."

어머니를 목도한 예나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한들 가족의 얼굴을 까먹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예나의 다음 눈길이 너머에 있는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민국은 잠잠한 시선으로 예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니! 무슨 바람으로 갑자기 이런 짓을 한 거야!"

"……."

계단을 황급히 올라온 예나 어머니가 예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예나는 언제 흑화 소주로 말미암아 본능에 의거해서 움직였냐는 듯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민국은 그런 예나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게 답이었던 건가.'

어쩌면, 이렇게 진행해야만 일이 잘 풀렸던 걸지도 모른다. 가족의 힘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때였다.

갑자기 예나가 '흑….'하고 눈물을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예나를 다그치던 어머니는 그런 예나의 이상한 행동에 순간 다그치던 것을 멈추었다.

예나는 진심으로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흘리면서 소매로 닦기 시작했다.

"나로는… 나로는 안 되는 거야…?"

"……."

"민국아…? 흑…."

민국이 몇 번이고 과거를 변경하려고 노고를 치렀다는 걸, 예나가 알고 있을 리 전무했다. 하지만 예나는 왠지 모르게 민국에게서 자신을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찢어지는 걸 느꼈다.

'언니가 그걸 알고 있는지는 전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일 안다면 언니는 속 깊이 슬퍼할 거예요. 오빠를 정말로 좋아하니까요.'

예나의 동생, 예슬이가 했던 말이 자꾸만 뇌리 속에 어른거린다. 자기보다 나이가 몇 배는 어렸지만 그래도 그 나이 또래였던 자기보다 몇 배는 어른스러웠다. 필시 예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민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이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해서 고단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도 민국은 결코 원치 않았다. 고로 이 선택이 현명한 거라고 민국은 생각했다.

"자자… 일단 집에 돌아가자…."

"흑…."

"민국아, 오늘 일은 고맙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자꾸나."

"네. 고맙습니다 어머니."

민국은 예나를 다독이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어머니를 향해 깍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배웅하고자 잠시 바깥에서 우산을 쓰고 지켜봤다. 횡단보도로 향하는 예나의 어머니는, 예나를 따뜻하게 다독이고 있었다.

민국은 마지막 방식이 그래도 드라마틱하게나마 효과가 있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로써 된 거야.'

두 여자가 다치지 않는, 이기적이지만 올바른 선택이라고 민국은 생각했다. 끼이이이이익!

{쿠웅!}

"……."

그 광경을 목도하지 않았더라면 말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흘러 나왔다. 민국은 쥐고 있던 우산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쏴아아아…. 몰아치는 폭우가 민국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민국은 비명을 지르면서 눈물을 쏟기 시작하는 예나의 어머니를 보았다.

예나는… 의도한 것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횡단보도의 신호를 어기고 들이닥친 트럭 한 대가 예나를 그대로 쳐버렸다. 넋을 놓고 있던 민국은 곧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두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맙소사…!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트럭 운전사가 나와서 멘탈이 붕괴된 모습으로 그리 소리치고 있었다. 예나의 어머니는 예나를 붙잡고 절규하고 있었다. 두 사람 앞으로 가까이 가게 된 민국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예나를 내려다보았다.

"……."

예나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피가 땅바닥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다리가 파르르르 떨린다.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민국은 선뜻 열리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처, 처음…."

저도 모르게 분노가 터져나왔다.

"처음부터!"

그러자 과거가 다시 붕괴됐다. 또 다른 과거를 다시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시간은 열 시로 돌아왔고, 폭우는 거셌으며, 예나는 민국의 집에 아직 방문을 하지 않은 때로 돌아왔다. 하지만 민국은 몇 십번의 과거를 변경한 뒤의 결과를 기억 속에 보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

털썩, 하고 주저앉아버리는 민국이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가 위급한 상태를 맞이하는 결과는 이미 두 어번 경험한 민국이었다. 예나를 절대 집안으로 들이지 않으면 생기는 결과물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 두 가지 결과가 예나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가는 끔찍한 일은 만들어내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지났으면 마찬가지로 예나는 또 죽었을 지도 모르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어느 순간 민국은 그런 자문을 하게 되었다. 과거를 변경하기 위해 기를 썼지만, 결과물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두 여인이 원치 않는 임신으로 괴로워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아 결정한 행위였지만,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예나가 크게 다치고 있었다. 민국이 원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쯤되면 알 수밖에 없잖아.'

그렇다. 이쯤되면 알 수밖에 없다. 예나는 진심으로 민국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민국이 그 사랑을 외면하면 예나는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실질적인 상처가 없더라도, 마음 속이 죽고마는 것이다. 그만큼 예나는 민국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었다.

'언니는 정말 오빠를 좋아하고 있어요. 언니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걸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거든요. 집에서는 항상 만들어낸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오빠를 만나면 진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예슬은 말했다. 언니는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몇 년 동안 그 사랑엔 변함이 없었다고. 민국의 가치가 낮아졌다고 생각할 때도 예나는 항상 곁에 있었고, 그가 아플 때도 항상 곁에서 간호해주었다. 그가 변태적인 면모를 드러냈을 때도 진솔하게 받아주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이 예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빠는 어째선지 언니를 의무감으로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친절하고 배려했지만 마치 그게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요.'

민국은 그런 예나가 소꿉친구로서 정말이지 고마웠다. 이전에는 그녀에게 이성적 호감을 강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여자 친구로 삼고 싶다고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본모습을 알면 떠나갈 거라 생각했기에, 끝내 끝까지 다가갈 수 없었고 결국엔 은별이와 맺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민국은 예나를 버릴 수 없었다.

자신을 존재 그 자체로 받아주는 유일한 여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이쁘다 못해 마음씨까지 아름다운 여자였으니까.

'언니가 그걸 알고 있는지는 전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일 안다면 언니는 속 깊이 슬퍼할 거예요.'

그래서 민국은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 곁에 은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일편단심 거리면서도 결국엔 예나를 자꾸만 계륵하게 쳐다보았던 것이다.

정말로 밀어내고 싶었다면 바캉스 사건 이후에도 얼마든지 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이란 명분 하에… 민국은 다시 한 번 예나와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을 좋아한단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은별과 노는 모습을 보노라면 괴로워할 것을 알면서도!

'오빠를 정말로 좋아하니까요.'

결국 민국이 지나친 욕심을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겉으론 안 그런 척하면서도 속으론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원치 않던 방식으로 두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니… 두려웠다.

갑작스레 아기의 아빠가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었고, 그래서 흑설 공주라는 마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를 통해서 과거를 변경하고 싶었고, 그것이 올바른 수습이라고, 두 여자를 위한 수습이라 생각했다.

'은별에겐 그럴 지 몰라도, 예나에겐 아니겠지.'

예나는 오히려 임신을 함으로서 민국에게 이성의 관심을 받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예슬이의 말마따나 한 편으론 힘들어하고 있겠지. 의무감으로 챙겨주는 민국의 감정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런 사건이 생겨서 임신을 했든 뭐든, 결국 그런 일이 생기게 만든 원인은 나였던 거구나.'

끝까지 외면하고, 끝까지 자기 욕심대로 행했으니까. 진짜 때어놓을 거였으면 은별이 말마따나 은별이가 대신 예나의 생명약을 전달해주면 됐을 텐데.

"……."

자, 이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민국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자신의 이기적인 의지를 꿋꿋이 관철하는 것과, 진짜 '수습'을 하는 일….

'나는.'

나는.

현관문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전에는 그토록 호러 같이 보였는데, 지금은 짝사랑에 씁쓸해하고 힘들어하는 한 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민국은 일말의 연민과 더불어 그녀를 향한 사랑이 싹트는 걸 느꼈다. 언제까지고 계륵하게 보는 것은, 그녀를 향한 예의가 아님을 민국도 이젠 알 수 있었다.

민국은 현관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는 이제 피하지 않았다.

"들어와 예나야."

"……."

꿋꿋이, 그녀를 마주하기로 다짐한 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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