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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98화 (198/369)

198화

"으아아, 세상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나."

한 십분 정도 경과했을 때였다. 민국은 왠지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유이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인류 최강 UFC 선수들도 순삭을 시킬 만한 그녀의 실력을 알았기에 민국은 부들부들 떨었다.

"후우! 아니다… 이건 내 사랑하는 여인들을 도와주기 위한… 목숨을 건 사투! 쓰벌!"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찌 됐든 예나의 '똑똑'거리는 노크가 점점 반복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다가 일정 시간이 흐르면 현관문을 깨뜨리고 들어오는 것이다. 민국이 집안에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때 하는 행위였다.

'유이 씨가 이 집까지 오려면 걸리는 시간은 30분. 예나가 문을 부술 시간까지는 앞으로 20분. 10분간은 버텨야 한다.'

민국은 창고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창고로 향한 민국이 박스들을 통째로 가져와서 현관문 근처에 바리게이트를 치기 시작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오싹오싹하게 만든다. 이윽고 창고들의 박스로 벙커를 짓던 끝에 거실이 박스로 꽉 차게 되었다.

민국은 안방문 앞에도 자신의 컴퓨터가 올라가 있는 책상을 끌어다 틀어막았다. 예나가 유이처럼 강력한 힘은 없을 테니… 분명히 바리게이트를 뚫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었다.

와장창창!

"……."

이윽고 고대하던 소리가 들려왔다. 예나가 저번처럼 현관문의 유리를 부수고 난입한 것이다. 저벅 저벅…. 음침한 발걸음 소리가 안방 너머에서도 들리자 민국은 꿀꺽 침을 삼켰다.

"민국아…."

"꿀꺽…."

"거기 있지?"

굳이 찾지 않더라도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예나가 안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스로 거실이 잔뜩 가려져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민국은 등골로 한 차례 지나가는 오싹함에 숨을 죽였다.

드르륵… 저벅 저벅…. 이윽고 박스더미를 차례대로 뚫으며 예나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토록 많은 박스들 중에 불필요한 박스들은 내버려두고, 민국의 안방으로 향하기 위한 박스들만 치워댈 따름이었다.

민국은 서서히 가까워져오는 인기척에 벽면의 시계를 보았다.

'1분도 안 지났잖아! 대체 예나는 얼마나 날 사랑하는 거냐!'

'친절하고 배려했지만 마치 그게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요.'

돌연 재차 예슬이의 목소리가 민국의 귓전을 울렸지만, 민국은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안방의 침대까지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이동시켜서 문을 가로막는 민국이었다.

'오… 신이시여, 제부랄…!'

제부랄은 제발을 길게 얘기하면 나오는 현상이었다. 안방문 손잡이까지 잠가두고 민국은 벽면으로 완전히 물러났다. 두 손을 깎지 낀 다음에 눈을 찔끔 감는 민국이었다.

'제발 버텨라! 벙커여! 여기서 무너지면…!'

파직! 파직! 돌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면 공포가 보일까봐 꿋꿋이 참으려고 했지만, 너무나도 이상한 소리에 민국은 그만 눈을 떴다. 그러자….

"민국아…."

"으아아아아악!"

안방문에 균열이 나더니, 그곳에 구멍이 나고 있었다. 예나가 민국의 창고 박스에 있는 망치 하나를 꺼내들어 민국의 문을 부수고 있던 것이다. 민국은 진심 얀데레를 마주한 것 같아 덜컥 겁에 질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불로 안방문을 가려버리는 민국이었다.

"흑화 소주로 예나를 덮친 악귀야! 날아가라 휙휙!"

파직! 파직! 그러거나 말거나 예나는 계속해서 망치질을 했다. 이거… 이거 어쩌면 다시 리셋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어떻게 유이까지 부르는데 성공은 했는데!

'빨리 오십쇼 유이 씨!'

그때였다. 호랑이가 제 말하듯… 어떤 작디작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걸음은 민국의 집 계단을 오를 때부터 들려왔으며… 얼마지 않아…. 터벅.

"……."

파직! 안방문을 부수던 예나의 행동이 멈칫했다. 민국은 안방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반동에 흘러내림으로서 커다란 구멍 너머의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반쯤 고개 돌려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는 예나.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관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존재….

"유이 씨!"

유이였다. 민국은 고대하던 인물이 드디어 나타나서 자신을 수호해주려고 하자 절로 만세 삼창을 부를 뻔했다. 이건 마치 호러 영화 속 무력한 주인공에게, 어떤 귀신이든 전부 죽일 수 있는 참대한 무기를 건네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

예나는 보통 때라면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부수는데만 열중했겠지만,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게 평소 강력한 기백을 자랑하는 유이의 모습에 그녀에게로 초점을 돌리는 모습이었다.

"……."

유이는 일단 상황을 살폈다. 오로지 민국의 성드립에 복수를 하기 위해 당도했던 유이는, 거실의 어질러져 있는 박스들과 더불어… 다짜고짜 안방문에 망치질을 하는 예나의 모습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

하지만 얼마지 않아 자신을 향해 완연히 몸을 돌린 예나의 모습에서 한 가지 묘한 기척을 가늠한 유이였다. 예나는 취한다 한들 다른 여자들처럼 얼굴이 홍조로 물들거나, 눈이 돌아가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적인 기백과 더불어 초점이 묘하게 변질되는 습성이 있었다.

그것은… 예나를 많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만나본 경험이 있는 유이로서 저도 모르게 대비를 하게 만들었다. 민국이 현관문 너머에서 파이팅 자세를 취하면서 유이에게 소리쳤다.

"유이 씨! 예나 좀 기절시켜주세요! 다만 세개 때릴 필요 없이 강도 조절해서요! 저 때릴 처럼하면 안 됩니다!"

"……."

결국 때리라는 소리인데 강약 조절을 잘하라는 뜻이었다. 사실상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유이처럼 타고난 힘을 가진 여인에겐….

"……."

비틀비틀…. 하지만 점차 자신에게 다가오는 예나에게서 굉장한 기백을 느낀 유이는 자연스레 자세를 잡게 되었다. 술에 취한 예나는 유이처럼 싸움은 잘하지 못하지만, 싸움의 고수조차도 방심하면 지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을 느낀 유이가 집중을 하고 기절을 시키려는 찰나! 촤아아아악!

"……."

뿌려지는 무수한 액체들! 진득진득하고도 쾌쾌한 냄새가 잔뜩 피어 오르는 그 액체에 유이가 허리를 숙였다. 촤아아악! 허나 허리를 숙인 낮은 위치에도 내용물이 퍼부어진다.

피하기에는 늦은 상황! 유이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드하면서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취기가 강한 냄새가 소매에 묻는다.

시큼한 냄새에 머리가 순간적으로 어질했지만 유이는 놓치지 않고 예나의 뒷목을 가볍게 탁하고 쳤다.

"민국…아…."

"……."

털썩! 민국을 호명하던 예나가 가을의 나뭇잎처럼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한다. 하릴 없이 기절하는 예나의 모습에 민국은 순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쉽게 처리가 되다니!

"역시 유이 씨. 가슴만큼 힘도 무지막지합니다."

"……."

"아!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마십시오! 맞아주긴 할 테니까 하하!"

비록 엄청나게 쳐맞겠지만, 그래도 일을 이렇게 쉽게 수습해준 유이 덕분에 민국은 안도할 수 있었다. 비록 결과는 달라지고 과거도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임신으로 인해 두 여인이 힘들어하는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

바닥에 떨어진 흑화 소주에서는 내용물이 왈칵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유이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민국이 있는 안방문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일순간 소매에 묻어 있는 액체의 냄새가 강렬하게 올라왔다.

평소 술이 쌘 편이 아니었던 유이는… 이계의 존재가 만든 그 흑화 소주의 냄새에 일순간 머리가 어질거렸다. 그와 더불어 쓰러져 있는 예나의 어깨에 발이 걸려버린 유이. 콰당! 이윽고 흑화 소주의 내용물이 가득해진 바닥에 얼굴을 묻어버리는 유이였다.

"으아니?"

지켜보던 민국도 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 방심하고 부딪혔는지,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유이였다. 민국은 왠지 불길해져서 서둘러 안방문을 막고 있는 책상과 침대를 치웠다. 그리고 거실로 후다닥 나와 쓰러져 있는 유이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괜찮으십니까 슴가 대왕?"

"……."

"슴가 대왕님. 설마 흑화 소주를 입에 댄 건…."

"내 몸에."

직감했다. 이것은 평소 유이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투박하고 다소 불량해 보이는 그 목소리는… 사회에 여간 불만이 쌓이지 않고는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손대지마."

"헉."

"손대지마 이 새끼야!"

부축을 해주던 민국의 멱살이 붙잡혔다. 민국은 돌연 숨이 안 쉬어지자 컥컥그러면서 유이의 몸을 두들겼다.

유이는 굉장히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민국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한 손으로 있는 힘껏 휘두르자 민국이 박스가 있는 곳으로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푸당탕탕! 아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크게 놀랄 수밖에 없는 민국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

절규를 하듯 소리치는 유이였다. 민국은 그 광경을 보고 꿀꺽 침을 삼켰다. 설마… 이런 식으로 유이가 취하게 되다니! 예나를 기절시킨 것만으로도 사건은 많이 수습된 것이었다. 하지만 유이가 이런 식으로 취해버린다면…. 심지어 그게 사람의 원초적 본능을 이끌어내는 흑화 소주로 인한 거라면…!!!! 콰앙!

"다 부수어 버릴 거야! 서민국!!!!!!!!!"

"으아아악…! 사람 살려!"

무시무시한 눈빛에 민국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문을 굳건히 닫아버리고 책상을 옮겨 틀어막자… 콰앙!

"히이이익!"

"없애버리겠어! 내 가슴이 뭐고 어째!!!!!"

그냥 맨 발로 안방문을 찼을 뿐인데, 책상과 함께 부서지고 말았다. 정말 인간의 힘이 아니다! 민국은 경악을 하면서 유이에게 또다시 멱살이 붙잡히고 말았다.

'죽는다…! 진짜로 죽을 거야!'

일반 술만 마셔도 맨 정신이 아니게 되는 유이인데… 흑화 소주면 답이 나온 것이다. 유이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민국은 생존 본능을 느꼈다. 콰앙! 멱살을 붙잡고 애꿎은 책상을 발로 밀어차버리는 유이였다.

"유, 유이 씨… 진정하세요. 저는 당신의 가슴을 좋아하기 때문에 성드립을 친 것이지 그 외에는…!"

"필요 없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주먹! 맞으면 이빨만 날아가는 게 아니라 정신까지 박살이 날 지도 몰랐다. 결국 민국은 살고 싶은 욕구로 눈을 찔끔 감고 소리쳤다.

"처, 처음부터 다시!!!!"

도중에 '음부라고? 죽여버릴 테다!'하는 유이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민국은 눈을 찔끔 감고 그렇게 소리만 쳤다. 그러자 다시 리셋….

"……."

언제 멱살이 잡혀 있었냐는 듯, 눈을 뜨자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침대와 책상은 원위치에 있었으며 안방문까지 정상으로 있는 민국이었다. 민국은 긴장이 순식간에 달아나자 풀썩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세상에… 살다 살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여인네는 처음 보았다.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여인 둘… 예나와 유이. 은별이의 술버릇이 차라리 훨씬 나은 편이었다.

"젠장… 미친 나보고 어쩌라는 겨!"

홧김에 벽면을 주먹으로 퍽하고 때리는 민국이었다.

"아야아야."

벽면을 때린 주먹을 붙잡고 신음하는 민국이었다. 벌써 몇 십번이고 반복했다. 이젠 민국도 슬슬 지겹고 지칠 수밖에 없었다. 정신적으로 멘탈이 붕괴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차라리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돌아가는 게….

'오빠가 정말 제 언니를 사랑한다면, 진심을 보여주세요. 그게 언니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거라 생각하니까요.'

아니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랬다간 또다시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어야만 한다. 임신으로 말미암아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민국은 그 무력한 자신을 또다시 체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는 또다시 루트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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