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그렇게, 다시 과거를 바꾸기 위한 민국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정해진 결과를 바뀐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바꾼다 한들 항상 악재적인 영향이 따라오기 때문에… 민국은 완전히 평화로운 엔딩을 바라고 있었다.
"민국아…."
현관문 너머에서 예나가 우두커니 서서 있었다. 민국은 우비를 쓰고 우산을 한 대 들고 있었다. 이웃 건물에 숨어 있던 민국은 1층의 문을 끼이익 열었다. 그리고는 2층의 자기 집 현관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예나를 올려다보았다. 예나는 마치 민국의 냄새는 맡은 것처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국이 소리쳤다.
"예나야, 나 지금 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따라와볼래?"
"……."
"빨리 와 예나야!"
예나가 왔단 사실에 놀라지도 않고 다짜고짜 어디를 가야 한다는 민국. 하지만 예나는 이미 흑화 소주로 말미암아 본능에만 의거해서 움직일 따름이었다. 그녀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고, 민국은 '요시!'하면서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내려가서 그나마 밤에 사람이 있을 법한 장소로 가자고 생각했다.
'번화가 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사를 좀 하는 길로 들어가는 거지!'
애초에 민국이 사는 동네에는 번화가가 없었으니까. 이윽고 민국은 24시간 노래방부터 비롯해서 막걸리 가계를 운영하는 길로 가자고 생각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예나가 성큼성큼 따라오고 있었다.
"민국아… 민국아…."
그리 외치던 예나가 다짜고짜 흑화 소주의 내용물을 민국이 있는 곳으로 퍼부었다. 촤아아악! 민국은 느닷없는 그녀의 스킬에 '허억!'하면서 당황했다. 재빨리 거리를 벌린 것이 다행이었다. 예나가 베시시 웃는다.
"민국이 안 맞았네…."
'우와, 오싹해 죽겠네.'
그렇게 민국이 갈구하던 길에 도착했을 때였다. 비도 많이 오고 있고 어두컴컴했지만, 그래도 막걸리를 운영하는 가게에는 사람이 다섯 명은 있었다. 또한 노래방에서 나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 한 두 명도 있었고. 비록 일곱 명 정도의 숫자였지만 예나를 말리는데 충분한 인원이 아닐까? 생각을 완료한 민국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예나는 흑화 소주를 입안에 몇 번이고 댔는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민국에게 다가왔다.
민국이 그제야 안도한 듯이 팔을 펼쳐들고 예나를 안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오빠는 어째선지 언니를 의무감으로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돌연 예슬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민국은 신경쓰지 않았다.
"와라 예나야!"
"……."
"하하하하! 무엇이든 받아주지!"
폭우가 쏟아지는 그곳에서 예나가 민국에게로 안겨왔다. 동시에 입안에 머금고 있던 흑화 소주를 키스로 민국에게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민국은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는 걸 느꼈다.
"응? 뭐야?"
"저 사람들 민망하게 저곳에서 뭐한다냐?"
그때 막걸리를 신명나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 재미난 구경이 생긴 듯이 민국 쪽을 돌아보았다. 예나는 어지간히 취했는지 민국에게 단순히 내용물만 보내는 게 아니라, 혀로 할짝할짝 애무를 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민국은 '으어어어…'하면서 순식간에 취하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 상태라면 저 남정네들이 구해줄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예나는 바깥이라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 듯 다짜고짜 민국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켜보던 막걸리 손님들도 그녀의 야한 짓에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헐. 저 아가씨 왜 저런다냐."
역시 민국의 예상대로였다. 숫적으로 다섯 명이나 존재했으니 불리한 것은 없으리라. 예나가 민국의 상의를 완전히 탈의시키고 길바닥에 눕혀서 사타구니 쪽을 깔아뭉갰다. 지켜보던 막걸리 가게의 아줌마와 손님들이 웅성웅성거렸다.
"말리러 갈까?"
"아니야 좀만 지켜봐."
"……."
"이렇게 좋은 구경을 놓칠 수는 없지."
'이 새끼들이?'
그들 딴에선 어지간히 좋은 구경이라 생각이 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도 항상 그릇된 짓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덩치가 큰 남정네 한 명이 다짜고짜 일어나더니 바깥의 민국과 예나에게로 다가왔다.
예나는 민국의 옷을 푸는데만 열중하고 있었고, 남정네는 민국의 얼굴 상태를 보더니 '쯧쯧'거리면서 예나에게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이런 곳에서 이러시는 건 곤란합니다. 취하신 것 같은데 빨리 일어나세요."
"……."
"어이 어이 아가씨. 경찰 부르기 전에 빨리 일어나시라고요."
예나는 어느 덧 민국의 바지를 탈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못 참겠는지 남정네가 '아가씨!'하면서 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찰나였다. 촤아아아악!
"……."
이미 막걸리를 마셔서 얼굴이 붉었지만, 흑화 소주라면 또 얘기가 다르다. 주량의 고수조차도 한 번에 홀리게 만드는 어마무지한 기능! 예나는 흑화 소주의 내용물을 남정네의 얼굴에 그대로 뿌려버렸고, 냄새만으로도 취하기에 충분한 그 흑화 소주에 남정네는 잠시 자신의 얼굴을 얼떨떨한 기색으로 만지는가 싶더니.
"크아아아."
"……."
곧 느닷없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구경을 하던 친구들도 뭔가 그의 상태가 이상해진 것 같자 차례대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어이, 서 씨.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로…."
"크아, 미친 놈아 돈이나 갚아."
"??? 서 씨 갑자기 무슨 소리야?"
퍼억! 주저고 뭐고 없다. 다짜고짜 주먹으로 친구 한 놈을 패는 서씨였다. 그 모습에 말리는 몇몇 친구들.
"너 씨발 전에 치킨 내가 사줬는데 돈 안 갚았잖아! 씨발 신성한 치킨 새끼야!"
"어이 서씨! 정말 왜 그래! 다짜고짜…."
"닥쳐 새꺄!"
퍼억! 이젠 말리는 친구까지 때려버린다. 아무래도 그는 본능적으로 화를 억누르는 타입이었던가 보다. 그때였다. 바지를 탈의하다 못해 팬티까지 탈의시키려하는 예나의 행동에 못 봐주겠는지 친구 한 사람이 예나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아가씨! 좀 작작하고 그만…!"
촤아아아악! 이번에도 어둠의 브레스가 상대의 면면에 뿌려졌다. 방심하고 있던 남자도 그만 그 흑화 소주를 입안에 머금고 말았고, 더불어….
"크아아아아! 집에 돌아가기 싫어 크아아아아! 마누라가 내 비상금 털었어!!!! 짜증나!!!!"
다짜고짜 결혼에 대한 회의감이 몰아침과 동시에 부리나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민국은 서서히 난장판이 되어가는 상황을 취기에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이번에도 망했구만 으아아….'
팬티까지 탈의시키는 예나의 모습에 노래방 근처에서 지켜보던 남자 여자가 깜짝 놀란다. 어차피 이번 루트도 개망한 상황, 민국은 '처, 처음으로…'하면서 배배꼬인 혀로 리셋을 외쳤다. 그렇게… 민국은 다시 과거로 돌아오게 되었다.
"……."
이후에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예나를 많이 상대해보았다. 24시간 노숙자 상대하기라 바쁜 경찰서로 향해서 경찰이 말려주길 부탁도 해보았고, 아니면 경찰에게 먼저 신고해서 현관문에 있는 예나를 데려가게끔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항상 반응은 똑같았다.
방심하고 있던 경찰들이 하나같이 흑화 소주를 쳐마시고 경찰이란 직업에 분풀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아, 이렇다고 예나 가족을 부를 수도 없고.'
예나 가족과 이번 사건이 얽히는 건 조금도 좋지 않았다. 고로 민국은 다른 방도를 강구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벌써 50번 이상 이 짓을 한 것 같았다.
'잠깐! 예나 가족이 아니라면… 호오……….'
민국은 돌연 은별이나 예나 가족이 아닌, 더 좋은 인물이 있음을 떠올렸다. 술에 취하면 깡패 기질이 발휘되는 게 다소 문제였지만… 그래도 인기척을 곧잘 느끼고 회피력 만땅에 데미지도 씹사기인 캐릭터가!
"그 양반을 부르면 달라질 지도 모르겠군. 그래, 왜 이 생각을 못했지?"
민국은 휴대폰을 들어 전화기록부에 강간이라 기록된 여인의 번호를 클릭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한참동안 신호가 들어갔고… 안 받았다.
"훗, 밀당 깊은 여인네."
진짜로 받기 싫어서 안 받는 것이었는데 그 사실을 모른다. 민국은 유이에게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유이 씨! 저 좀 도와주십시오! 지금 저 새끼발톱이 서랍장 모서리에 부딪혀서!]
서랍장 모서리에 부딪혔을 때 어울리는 '으아아아'비명 소리도 덧붙여 넣는 민국이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번에도 답장이 없다. 민국은 '이년이?'하면서 미친 듯이 통화를 걸기 시작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똑똑}
바깥에 당도한 예나는 이미 실루엣을 선명하게 선보이면서 노크질을 하고 있었다. 민국은 신경쓰지 않고 유이가 받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약 다섯 번은 연락을 하고나서야.
"여보세…."
"왜 안 받으십니까? 새끼 발톱이 서랍장 모서리에 부딪혔다는데 그게 그렇게 우스워 보여요! 아니, 사람이 다쳤는데 괜찮냐는 메시지는 보내지 못할 망정 어떻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실 수 있습니까? 참 가슴만 크고 마음은 모자란 여인네군요! 정말 실망입니다 유이 씨! 하지만 실망은 1초면 사라지는 게 사람이지요! 전 당신에게 실망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현재 진행형 ing를 존중 안 하고 있진 않습니다!"
"……"
"뭐하세요 유이 씨?"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민국을 뒤로하고… 유이는 막 화장실에서 나온 참이었다. 샤워를 하느라 휴대폰을 못 받았던 것이었다.
"샤워…."
"오옷! 이 음란한 여인네 같으니!"
"……."
"어떻게 남정네 앞에서 그렇게 야시시한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설마 어디 픽업아티스트가 쓴 서적 같은 걸 읽고 저한테 시험을 하시는 겁니까? 전화 통화하면서 망상하고 꼴리게끔 하려고? 이거 참 야한 여인이군요!"
"……."
"끊지마 이 가슴 큰 여자야! 내가 잘못했어!"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민국이었다. 어쨌든 민국은 용건을 드러냈다.
"유이 씨, 지금 잠시 제 집에 오실 생각 없습니까?"
"무슨……."
"아니, 간만에 유이 씨의 풍만한 가슴이 보고 싶기도 하고 아니 아니 농담입니다. 그게 아니라 위기예요 대 위기."
"……."
유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짜고짜 간만에 연락을 해서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니 말이었다.
"지금 저한테 아주 위험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거든요. 제 슈퍼 스킬 허세 부리기도 통하지 않는 상태라, 유이 씨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때입니다."
"무슨 일이길…."
"무슨 일이냐구요? 진짜 엄청,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유이 씨의 발차기라던가 100단 콤보라던가, 김갑판 필살기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기절을 시킬 수 있는 힘은 필요해요! 아, 그렇다고 너무 세게 때리면 안 됩니다. 세게 때리면 미워할 겁니다!"
"……."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두서 없이 말씀드려서 이해가 안 되지요?"
"그렇…."
"그럼 제가 그냥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귀 잘 열고 제대로 들으십시오?"
그리고 민국은 최대한 유이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은 어찌 됐건 예나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게 제일 중요했으니까. 물론 예나가 엄청 심하게 술에 취했단 사실만 묘사했지, 그 뒤에 일어날 수 있는 결과물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은 민국이었다.
언급한들 자뻑으로밖에 안 들릴 테니까. 이윽고 5분간의 이야기를 곧잘 듣던 유이였다. 이야기를 마친 민국이 말했다.
"자, 어떠십니까? 대 위기지요? 빨리 와서 도와주세요."
"……."
그리고 유이 입장에선 조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입장에서는 그저 술에 취한 여인 자기가 제지 못하겠으니 도와달라는 소리밖에 안 됐다. 심지어 민국과 유이가 사는 동네는 조금 먼 거리였다. 이제 밤이기도 했고 샤워도 한 유이인지라.
"아무래도 저…."
"유이 가슴 출렁출렁! 한 번 만져보고 싶다 우헤헤헤헤!"
올 것 같지 않자 이젠 도발을 시도하는 민국이었다.
"항상 그 가슴 사이에 내 성스로운 용사의 검을 껴넣고 분출해보고 싶은 마음 아십니까 유이 씨? 후후후후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거대한 바스트! 당신은 그 바스트가 얼마나 나의 욕정을 분노하게 하는지 모를 거야!"
"……."
"후후후후 내 언젠간 그 가슴을 만질 날이 오길 기대하고 또 고대하고 있지! 아 씨발 빨리 만지고 싶다!"
도발이 통한 모양이었다.
"기다…."
'려요'가 아주 작게 들렸다. 민국을 죽이기 위해 준비하는 유이였다. 뚝하고 통화가 끊기자 의도한 마냥 '훗… 됐어…'하면서 민국이 중얼거린다. 비록 자신의 몸은 박살나고 부러지겠지만… 그래도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내 소중한 여인들을 위해서라도, 내 몸을 포기한다."
용감한 남자, 서민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