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95화 (195/369)

195화

<엘...프사이... 콩가루....>

- 띡띡

- 서민국 미연시, 게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설명을 읊어드립니다.

- 게임 방식은 간단합니다. 이 게임엔 여러 엔딩으로 진행될 수 있는 수많은 루트가 존재합니다.

- 루트는 캐릭터의 질문에 대응하는 것처럼 1번 2번식으로 순서가 나열되어 대답을 하는 형식은 아닙니다. 플레이어 개인의 선택으로 루트를 고를 수 있고 엔딩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 게임은 도중 세이브가 가능하며 동시에 도중 로드도 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 시간은 현실과 체감하는 것이 동일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고통, 쾌락, 통증, 모든 것이 다 현실과 기본에 따릅니다.

…라는 설명을 듣고 서민국이 눈을 뜬 순간이었다. 마법이란 상식을 초월하는 비상식적인 힘. 그러나 흑마법사가 이따금씩 건네주는 신제품이야 많이 봤지만, 실질적인 마법은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로 민국은 상당히 질겁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슈밤.’

그는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있었다. 마치 주점에서 흑설 공주와 대화를 나눈 게 환상이었다는 듯 말이다. 째깍째깍 벽면의 시계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초침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고, 시간은 오후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 뭐야? 지금 날짜가….”

달력을 보다 이상함을 느낀 민국이 휴대폰을 들어 현재 날짜를 확인했다. 그러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가을은 가고 겨울이 온 시점! 11월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시간이 10월 초로 돌아와 있었다. 심지어….

‘이 날짜는!’

민국은 계산을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날 있었던 무시무시한 일들을 말이다. 경찰을 자신의 아기씨로 범하다 못해 뉴스 및 메인 헤드라인 기사로 장식될 뻔한 그 날의 일! 더불어… 예나가 흑화 소주로 미쳐 날뛴 그 날이었다.

“사건을 수습하는 건 아주 간단하단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건 정확히 따지자면 낯선 게 아닌, 아직 적응을 못한 음성이었다. 민국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기다란 꽃 장식 부채를 들고 자신의 얼굴을 향해 부채질을 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살랑살랑한 손짓으로 자기 얼굴에 바람을 내는 여인, 흑설 공주였다.

“이승과의 연을 끊거나 과거와 연관된 사람의 연을 끊는 법이지. 허나 그건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범위라고 보이는구나. 마법을 다룰 줄 안다면 그보다 더 손쉬운 수습이 가능하지.”

민국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제부터 자네의 과거는 자네 스스로 바꾸는 것이야. 난 자네를 사건이 있던 그날의 과거로 돌려보내주었고, 이 날의 일만 수습되면 본래 날짜인 오늘로 돌아오는 것이지. 설명을 들었듯이 세이브와 로드가 가능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

부채를 내려놓는 흑설 공주였다. 민국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침대에 내려놓았던 부채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흑설 공주가 민국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어떠냐? 맘에 드느냐?”

하얀 피부의 그녀는 지적인 눈매를 갖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의 수습 방법은 흑마법사와 다른 점이 있었다.

흑마법사는 현대왕의 팬으로서, 민국이 벌인 사건을 스스로 해결해주는 게 적잖이 있었다. 그러나 흑설 공주는 아니었다. 그녀는 흑마법사처럼 민국의 팬도 아니었고, 그저 자신이 제작한 술로 감당 못할 일을 벌였음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 수습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수습 방법은 흑마법사처럼 독자적으로 다 해결해주는 게 아닌… 민국이 스스로 해결하게끔 하는 것도 있었다.

“고맙다는 말이 없구나. 혹시 정직한 소리를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양반이냐?”

“아니요. 고맙긴 합니다. 역시 마법사는 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군요. 그런데 미연시 자주 보십니까?”

흑설 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난 소위 말하는 오덕후란다.”

“…….”

“원래 이 세계에 온 것도 애니 보려고 온 거였지.”

주점의 카리스마 있던 이미지가 순식간에 개구장이스럽게 변모하고 있었다. 민국은 평소 때라면 ‘같은 덕후로서 영광입니다!’하며 악수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헛기침을 하면서 상황을 넘어갈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그날의 사건을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고, 이젠 민국이 집중해서 잘 처리해보아야 할 때였다.

“그럼 만일 제가 오늘 여자들이랑 관계를 안 맺거나 하면 오늘의 일은 피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럴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겠구나. 이 날은 자네에게 마가 낀 날이라서 말이다.”

홱하고 몸을 돌려 등을 보이는 흑설 공주였다. 이런 면에선 흑마법사와 비슷해 보였다. 역시 같은 세계의 사람은 묘한 공통점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자네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보고 싶구나. 가만히 중계 노릇을 할 테니 날 즐겁게 해보거라.”

즐겁게 하라니 이 양반이…. 하면서 태클을 걸고 싶었으나 그냥 참았다. 이윽고 흑설 공주의 자취가 사라지고, 민국은 현관문이 보이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중요한 설명이 귓전으로 울려왔다.

- 저장된 파일이나 저장을 하고 싶을 경우 ‘세이브 창’을 언급해주시면 됩니다.

‘굉장한 덕후시구만.’

세이브창을 한 번 외쳐보는 민국이었다.

“세이브 창.”

[ 없음 ]

[ 없음 ]

[ 없음 ]

* Load * Save * 삭제

저장된 파일이 아직 하나도 없었고, 저장된 파일은 얼마든지 삭제를 하고 다른 루트를 저장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민국은 이게 새삼 현실인가 싶어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이 날의 과거를 바꾸면 오늘의 결과가 달라진단 말이로군.’

그렇다면 은별과 예나가 어린 나이에 아기를 임신하는 경우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민국은 그 점을 조금 고민했다. 정말 이 날의 과거를 바꿔서 임신했던 아기가 사라진다고 하면… 그건 낙태와는 다르게 생명을 죽이지 않는 일이 되는 건가?

“흠….”

이 부분에 대해선 쉽게 생각하기 좀 어려웠다. 그래서 민국도 이런 기회는 생겼되 조금 갈등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나는 기본적으로 몸이 약했다. 임신을 한 이후 그녀는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집에서 많이 아파했던 것을 알고 있다.

차마 부모님과 동생에겐 말을 꺼내기도 어려워했고… 민국도 그녀를 보살펴 줄 수 없어 여러모로 마음이 아팠다. 은별 역시 임신 이후 이전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습이었고, 대학 과제니 모임이니 그런 것에도 너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어떤 면에선 두 사람의 과거를 바꿔주는 게… 두 사람을 위한 일일 지도 몰랐다.

‘설사 이게 옳지 못하다고 해도 말이지.’

그리 결정을 내린 뒤였다.

- 게임 시작되었습니다.

민국은 휴대폰의 전화기록부를 뒤적거렸다. 저장해둔 예나의 번호가 보였다. 곧장 그녀에게로 먼저 연락을 거는 민국이었다.

‘어차피 흑화 소주만 안 마시게 하면 되는 일이니까.’

뚜루루루…. 무슨 연유에선지 한참동안 신호만 들려왔다. 이윽고 몇 차례 신호를 반복하고 나서야 ‘여보세요….’하는 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국은 소리쳤다.

“예나야! 지금 어디야? 집이지?”

“민…국이…?”

‘어라라.’

운을 띄우고 통화를 하자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이거….

“민국이구나… 프흣….”

“…….”

예나는 술에 취해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술버릇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녀가 지니고 있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었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 듯 민국이 내심 불안해하며 땀을 흘리는 얼굴로 물었다.

“예나야 너 설마 이미….”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민국이구나 .”

“으어어어억!”

마치 호러 영화 속에서 귀신의 전화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민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바닥에 내팽개친 민국이었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아직 끊기지 않았고, 마음을 타이르고 다시 그 휴대폰을 쥐는 순간이었다.

“민국아… 곧 너네 집으로 갈게….”

그 소리를 끝으로 휴대폰이 뚝 끊어졌다. 민국은 순간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오, 하늘이시여.”

이후 몇 번이고 예나에게 통화를 걸어본 민국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미 민국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민국은 창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했다. 날씨가 어두웠고 쏴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차디차고 시린 가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던 것이다.

“씨발, 어쩌지? 그냥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버려?”

하지만 민국은 시간이 열시인 것을 감안할 때… 이미 이 시간쯤에는 예나가 술을 마셨음을 통화로 알 수 있었다. 고로 시간을 되돌린들 예나가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결국 예나가 술을 마셨다는 가정 하에 진행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민국은 그 날의 예나를 돌이켜 볼 때… 도무지 자기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그녀의 욕구… 욕심… 질투심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그것은 민국이 식겁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 은별이에게 연락해보자!”

은별과 단합을 한다면 예나를 제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땐 예나가 한 명씩 기습을 해서 미처 대처를 못했었지만 말이다. 민국은 그리 생각하고 은별에게 연락을 걸었다.

참고로 이때의 은별은 민국과 한 번 다툰 이후,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는 상태였다. 고로 민국이 응하는 요구에 곧잘 들어줄 지도 몰랐다.

뚜루루루… 몇 차례 신호가 갔고 은별이 연락을 받았다.

“마침 연락하려던 참에 연락이 오네. 잘 거지?”

“은별양! 도와주세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헛소리야?”

민국은 진지하게 진심을 담아 토로했다.

“예나가 제 순결을 노리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은별양!”

“…….”

진솔하게 얘기는 했으나, 이때의 은별은 민국이 하는 소리를 당최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예나’라는 단어가 은근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미간을 찌푸리던 은별이 물었다.

“잘은 모르겠는데, 그 여자가 널 덮치려 한다고?”

“예 은별양!”

“느닷없이 존댓말하지 말고… 그럼 그냥 거부하면 되잖아? 설마 지금 그 여자랑 잘까 말까 고민이라도 하는 거야?”

추궁하는 음성이었다. 매서운 그 목소리에 민국이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고 싶은 맘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서도! 그래도 하게 됨으로서 새로 생길 두 사람의 생명이 앞으로 두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줄까 싶은 마음에 이렇게 전화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애인이시여! 도와주세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딘데 거기?”

심드렁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내심 불안한지 곧장 찾아갈 준비를 하는 은별이었다. 역시 민국의 예상대로 그녀가 선뜻 움직이려하자, 민국은 곧장 집이라고 위치를 알려주었다. 은별이 대답했다.

“이상한 짓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바로 갈 테니까.”

뚝, 하고 통화가 끊겼다. 민국은 ‘요시!’하고 서라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지원군이 생기면 술에 취한 예나도 선뜻 자기 욕구대로 행동하지 못할 터!

“…….”

그리 확신을 하고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민국이었다. 현관문 너머로 뭔가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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