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새은의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설 공주라는 네임을 이용하는 손님이시지. 주로 주말에 사업가들이랑 술을 마시러 오는데, 소맥을 그토록 좋아하더군.”
주점에서 사용하는 네임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민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흑설 공주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새은의 삼촌에게 부탁했다. 새은의 친구라 여기는 만큼 친절하게 대해주는 삼촌이었고, 민국은 많은 정보를 수입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흑설 공주라는 여인은 나이가 민국과 별 반 다를 것 없는 또래처럼 보였고, 생김새는 눈망울이 크고 지적인 포스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주변에는 항상 돈이 되는 인물들이 끼어 있었는데, 걔 중에는 사업으로 잘 나가는 몇몇 권력가들도 연관이 되어 있단다.
‘왠지 흑마에몽이 떠오르는데.’
흑마에몽. 흑마법사를 지칭하는 별명이었다. 무엇이든 다 수습을 해주고 들어주다 보니 민국은 그녀를 흑마에몽이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내 예상이 맞기를 바래야겠구만.’
민국은 집에 돌아가면서 은별과 통화를 하였다. 임신 사건 이후로 은별은 민국과 사이를 끊지도 맺지도 못하는 어설픈 관계가 되고 말았다.
당연지사 통화로 얘기를 하노라면 뭔가 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민국은 예나의 동생, 예슬이에게 핍박을 받은 건도 있었고 자기 마음의 불안정함도 느꼈으니, 이젠 스스로 일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말 오후 아홉 시라.’
주로 성인들이 드나드는 시간이었으나 민국은 상관없었다.
* *
마침내 주말이 찾아왔다. 밤 일곱 시쯤에 시계를 확인한 민국은 두꺼운 겉옷을 입었다. 휴대폰을 들고 집을 나가려는 참에 위이잉 진동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자 간만에 반가운 손님이 민국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강서라였다.
[온니짱 혹시 온니짱은 길가의 도로 500원 짜리를 주웠더니 갑자기 이 세계로 떨어져서 저랑 연락도 못하게 되었나여?]
[연락 안 해줘서 섭섭했단 말을 에둘러서 할 필요는 없단다 아이야.]
위이잉! 하고 휴대전화가 또다시 울렸다.
[흐규 흐규! 온니짱은 지를 고작 다이아몬드 같은 아이로밖에 보지 않았나여? 지는 온니짱의 바퀴 나간 람보르기니나 되고 싶었을 뿐인데!]
어이없는 드립에 민국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서라의 재치는 뭔가 민국도 따라갈 수 없는 타고남이란 게 있었다. 휴대폰을 두들기는 민국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연락을 못했어. 오늘 대충 일 정리될 것 같으니까 약속 잡아서 한 번 만나기나 하자.]
은별도 서라에겐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나를 만날 때처럼 극도의 거부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서라가 [싫은데여? 뿡!]하고 답문을 보내왔고, 민국은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굳이 입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초면이고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민국은 점잖은 양복 차림을 입은 상태였다. 넥타이를 한 번 고쳐 매며 계단을 내려다보는 민국이었다.
“자, 어디 한 번 가볼까?”
새로운 마법사와 조우하는 순간이다. 이번엔 흑마법사가 먼저 도와주는 게 아닌, 민국이 직접 마법사를 찾아 만나는 것이다. 그의 결실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어서 오세요~.”
주점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돌아다니던 여직원 한 둘이 인사했다. 양복을 입은 민국이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주었다. 여직원들이 산뜻한 미소로 스쳐 지나간다. 영업용 미소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잘 생긴 민국이 지나가니 호의를 비추는 것도 있었다. 민국은 카운터의 직원에게 문득 질문을 던졌다.
“혹시 흑설 공주라는 분 아직 안 오셨나요?”
“아, 그분이요? 그러게요. 보통 이 시각쯤이면 오시던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은 좀 늦으시네.”
민국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시였다. 제때에 맞춰서 들렀으나 흑설 공주라는 네임의 여인은 아직 방문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의자에 앉아서 잠시 시간을 달래기로 한 민국이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한 번 같이 노시지 않을래요?”
그리고 시간을 달래는 동안 간혹 섹시한 차림의 여인들이 민국에게 대시를 했다. 민국은 웃으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어딜 가든 늘 있는 일이었기에 그런 대시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잠시 목 좀 축이고 올까.’
로비 근처의 자판기로 향해 커피를 구입한 민국이었다. 뜨뜻한 커피 한 모금을 홀짝이며 카운터로 돌아오니, 방금 전 민국과 대화를 나누었던 직원이 ‘아’하면서 탄성을 짓고는 말했다.
“흑설 공주 씨 오셨거든요.”
민국은 커피를 머금으려던 손짓을 멈추고 대답했다.
“지금 오셨나요?”
“네. 방에 안내해드릴까요?”
잠시 딴 데 들린 사이에 도착했나 보다. 민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은 민국을 데리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복도를 몇 차례 거닐던 민국은 어느 커다란 방문을 두드리는 직원을 보았다. 똑똑.
“잠시 기다리세요. 먼저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예, 감사드려요.”
직원이 먼저 방에 들렸고 민국은 바깥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대기하길 수 초, 직원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나오더니 민국에게 말했다.
“들어 오시라네요. 수고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두 차례 감사하다고 인사를 마친 민국이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방문의 손잡이를 잡자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런 소음이 들려온다.
호탕한 남정네들의 웃음소리와 주점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의 만들어진 웃음소리. 애초에 주점에 별로 정이 없던 민국으로선 와닿는 면이 없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니까.
‘이번 일은 내가 책임진다.’
그렇게 강단 있는 결단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민국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가볍게 허리를 숙이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자, 일제히 그들의 고개가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아가씨를 안고 있는 아저씨들을 비롯해서, 일을 하고 있던 여인네들까지.
“…….”
여인네들은 저토록 잘 생긴 남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는 듯 눈이 댕그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후광이 나는 외모였던 것이다.
민국은 그런 그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마치 조폭들이나 쓸 법한 굉장히 길쭉한 테이블에 기다란 소파들. 양쪽으로 사업가들로 보이는 서른, 마흔의 아저씨들이 양복을 입고 술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유독 소파 맨 뒤의 중심 자리에 튀는 한 여인이 있었다.
짐승의 털로 된 가죽 코트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은 그 여인은, 마치 죽은 시체처럼 피부가 유독 하앻다.
“와아….”
“잘 생겼다….”
곁에서 지켜보던 여자들이 눈이 먼 것처럼 그리 중얼거리자, 불편한지 헛기침을 하는 남자 사업가들. 민국은 가볍게 웃음 지으면서 분위기를 달래는데 노력했다. 그때 아까 전 유독 시선이 튀었던 창백한 피부의 여인이 운을 띄었다.
“볼 일 없는 몸 놀이를 하기 위해 찾아온 남정네는 아닌 것 같구나.”
말투가 굉장히 딱딱하고, 어찌 보면 오덕투가 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그런 식으로 말하며 살았다면 오히려 이질감보단 사뭇 무거움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민국은 운을 띄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등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가 이상하게 윤기를 내며 빛이 나고 있었다. 눈 또한 갈구색이었지만 커다랗고 쌍꺼풀이 진하다.
오목또목한 이목구비의 그 여인은 역시 인상이 깊던 하얀 피부의 여인이었다.
“허나 초면일뿐더러 생판 모르는 남자가 보자고 하는 이유도, 목적도 그리 달가울 것 같진 않구나.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요약하여 말해보았으면 좋겠다.”
흑설 공주의 말에 양측에 있던 사업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녀가 이곳의 법이라는 것처럼, 양측의 모든 기선을 확실히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만 토대로 볼 때도 일반인이 결코 엄두를 낼 수 없는 존재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서민국은 이미 흑마법사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본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적응을 못하고 도망칠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에둘러서 맞받아칠 따름이었다.
여기 있는 사업가들이 마법을 이해하는지 모르는지도 알 수 있게끔.
“어릴 때 보았던 마법사가 나오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어져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민국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웬 마법책? 지금 장난하나?”
양측의 사업가들 몇 명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어이없어하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잘 나가는 사업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느닷없이 찾아와 늘어놓은 질문이 고작 그딴 거라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흐음~.”
그러나 흑설 공주는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민국이 언급한 ‘마법’이란 단어에 묘한 기운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옆에서 자꾸 사업을 제안하려 하는 귀찮은 남자 한 명을 밀어내며, 빈자리를 두들기는 흑설 공주였다.
“맘이 바뀌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졌구나. 이리 와서 앉아라.”
“감사합니다.”
사업을 제안하던 남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민국을 노려보았다. 잘 꼬드기고 있었는데 민국 때문에 망쳤다는 듯. 하지만 민국은 신경 쓰지 않고 그녀가 가리킨 빈자리에 앉았다. 흑설 공주를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까운 자리였다.
“다들 이쪽을 볼 필요 없다. 즐겁게 술이나 마셔라.”
“…….”
순식간에 침묵이 되어버린 자리에서 흑설 공주가 잔을 들면서 소리쳤다. 뜸을 들이던 사업가들이 이내 눈치를 보더니 짐짓 웃음을 지으면서 맥주잔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호쾌한 분위기로 띄워지기 시작했고, 사업 제안을 하려던 남자는 민국을 노려보다가 다른 자리로 이동할 따름이었다.
민국은 흑설 공주의 그런 모습을 짐짓 눈웃음으로 지켜보았다. 이윽고 흑설 공주가 그에게만 들릴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뭐냐?”
“서민국이라 하옵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를 찾아온 용무가 분명히 있나 보구나.”
“흑화 소주를 제작하신 분이라는데 맞습니까?”
잔의 내용물을 단 번에 꿀꺽꿀꺽하고 들이킨 흑설 공주가 말했다.
“맞지. 지구에서 보기 드문 약초로 제작했다.”
‘보기 드문 약초라.’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그나저나… 앞에서 보니 민국은 흑설 공주의 외모에 순간 넋을 놓을 뻔했다.
솔직히 여자친구인 은별이도 한 외모 하는 여인인데! 민국이 아는 여자 중에서는 서라가 정말 빼어난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지만, 이 흑설 공주 역시도 정말 미모가 장난 아니었던 것이다. 서라와 견주어도 막상막하를 선보일 것 같았다. 다만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다른 세계와 관련된 인물답게 분위기에 묘한 기백이 담겨 있었다. 지적인 카리스마라고 할까.
“그 약초가 정말 지구에서 구할 수 있는 겁니까?”
“얘기를 좀 더 길게 들어보고 싶구나.”
“제가 아는 사람도 지구에서 구하기 드문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일 년 동안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종적을 감추었죠.”
그 말에 이야기를 듣던 흑설 공주가 한 쪽 입가를 올렸다. 흑마법사의 비릿한 실소와도 닮았지만, 좀 더 가볍고 호쾌함이 담긴 미소였다.
“그러냐?”
“예.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에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의 여자였습니다.”
“왠지 내가 아는 사람과 닮았을 것 같구나.”
이젠 이야기가 서로 통한 셈이다. 맥주 한 잔을 더 마신 흑설 공주가 옆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용무는 무엇이냐?”
“사실 제가 그쪽이 제작한 흑화 소주를 마시고 미친 짓을 저질렀습니다.”
“원래 그 술은 자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욕구를 절제 못하게 하는 힘이 있지.”
“네. 그래서 두 여자가 제 아기를 임신했거든요. 큰일났습니다.”
‘푸하하하하!’하고 호탕하게 폭소하는 흑설 공주였다. 대화를 하던 몇몇 사업가들의 고개가 일제히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흑설 공주는 지독하게 웃겼는지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을 거침없이 손가락으로 훔치더니 민국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래서, 그쪽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
“이기적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책임을 져주셨으면 합니다. 남들이 못하는 방식으로.”
흑화 소주를 제작한 책임자니까, 그리고 일반 사람이 못하는 방식으로 수습을 할 수 있는 마법사였으니까. 당당하게 마주하는 민국의 얼굴에 흑설 공주가 다시 한 번 맥주를 마시더니 말했다.
“좋다.”
“…오, 진짜요?”
너무 흔쾌히 받아주니 내심 놀란 민국이었다. 흑설 공주가 가볍게 미소 짓더니 말했다.
“하지만 책임을 지는 방식은 네가 아는 그 여자와는 다른 방식일 가능성이 높다. 그에 대해서 불만이 없다면 나도 도와주도록 하지.”
“그래도 좋습니다. 어떻게 해결이라도 할 수 있으면.”
그 말에 흑설 공주가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민국은 순간 의아함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움직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멈춰 있었다. 마치 공간이 정지해버린 것처럼.
“당장 시작하자꾸나.”
흑마법사와는 다른 포스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그녀보다 더 위엄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민국은 굴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이미 각오는 된 지 오래다. 무엇이든 와라!
============================ 작품 후기 ============================
신캐들이 많이 등장했네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캐릭터는 이번 편에서 등장했습니다.
다섯 번째 히로인!
흑설(탕) 공주입니다!
다음 에피소드부턴 본격 수습 에피소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