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93화 (193/369)

193화

‘만화영화 속에 살인범 코난이 있다면 현실엔 추리왕 서민국이 있다.’

이젠 현대왕이 아닌 추리왕이라 불러 달라! 민국은 자신의 추리에 새삼 감탄했다. 어디까지나 스파크처럼 갑작스레 떠오른 회상이 완성한 퍼즐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한 가지의 생각을 도출했다.

‘마법사는 흑마법사 말고도 또 있다!’

그렇다! 그 증거로 떠오르는 이유는 한 가지가 있었다.

‘이 물건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있나?’

몇 주 전, 흑마법사가 일 년간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고백하기 전이었다. 민국의 미친 짓을 홀로 수습해준 흑마법사가 문득 그의 집에서 내려오면서 어떤 물건을 보여준 적이 있다.

‘흑화 소주…? 그건 또 뭡니까, 왠지 좀 인상이 깊은 것도 같은데….’

그땐 기억이 없어 흑화 소주에 대해서 아예 지식이 없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흑화 소주를 마신 예나와 민국, 은별 전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한 차례 미친 사건을 벌인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국은 단순히 그것이 술을 마심으로서 생긴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민국에 그렇게 생각한 건….

‘그 양반 어르신이 흑화 소주를 가져갔다는 것이 증거지.’

민국이 보는 앞에서 흑마법사는 자신의 코트 품속으로 흑화 소주를 집어넣었었다. 마치 이 세계에 존재해선 안 될 물건이라는 것처럼 말이었다.

‘만일 그 물건이 위협이 안 되는 물건이라 가정했다면 절대로 가져가지 않았을 터!’

확신한 민국이 검지와 엄지를 부딪쳤다.

‘훗! 역시 난 천재야!’

추리를 마친 민국이 당장 예나에게로 연락했다. 어제 민국과의 데이트 이후 그나마 안정적인 몸이 된 예나가 평온해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응 민국아.”

“예나야 어제 잘 잤어?”

“응… 잘 잤어. 민국이 너는?”

일상적인 대화들이 오간 뒤였다. 민국은 본론을 언급했다.

“다름이 아니라 너한테 그 흑화 소주를 주었던 친구 있잖아. 나한테 한 번 소개시켜줄 수 없을까?”

“……?”

‘소개’라는 단어가 심히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흑화 소주를 선물해주었던 건 예나의 동성 친구. 민국의 이성이라 볼 수 있는 상대였다. 예나는 불현듯 튀어 오른 다른 생각에 경계하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훗. 그 흑화 소주의 숨겨진 비밀을 난 알 것 같거든.”

“???”

“부탁한다 예나야! 꼭 좀 부탁해!”

뭐 그 친구가 맘에 들면 사귀고 싶다거나… 그런 의미에서 소개를 해달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예나는 경계심을 풀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알았어 민국아. 네가 그렇게 원하면….’하면서 승낙해주었다. 어떤 까닭에선지는 몰랐지만 그가 섣부른 판단을 할 거라곤 생각이 들지 않았다.

* *

“설마 그 애 나 좋아하는 거 아냐?”

“…….”

예나의 동성 친구. 그러니까 흑화 소주를 선물해주었던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리 질문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그년 늘 여유로운 모습이었는데, 마치 어떤 면에선 여성판 서민국과 닮았다고 가정해도 손색이 없었다.

“에이, 농담이야.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저, 정색 안했어….”

친구의 말에 표정 관리를 못했단 사실을 깨달았는지 예나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내심 은별이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 예나였다. 그녀 역시 자신이 민국에게 다가갈 때마다 이런 불안감을 느꼈을까? 어떤 면에선 죽도록 미안해지는 예나였다.

“그나저나 그 서민국인가 뭔가 하는 애가 날 보자고 하다니, 흐음~ 이유가 뭘까?”

“…….”

“전에 그 흑화 소주 때문에 생긴 일로?”

참고로 친구는 서민국과 예나가 어떤 관계까지 갔는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 건이 있고 나서 예나를 만났을 때 다짜고짜 울상인 표정인 예나에게 멱살을 붙잡혔었으니까.

‘어떡할 거야! 어떡해 으아아앙!’

키득키득 웃는 친구의 표정에 예나는 다른 의미로 정색했다. 그 정색에 한 손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미안하다는 듯 말하는 친구. 참고로 예나 친구의 이름은 정새은. 어렵지만 예쁜 이름이었다.

“…….”

평소 남자들과 잘 놀기로 소문난 그녀는 남자 등골 빼먹는데 환장한 어장관리녀였다. 더불어 일말의 도끼병도 있어서 요조숙녀에 가까운 예나와 친하다는 게 믿기지 않는 실정. 어쩌면 둘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친해질 수 있는 걸지도 몰랐다.

“어디 한 번 예나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민국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나 보자고.”

야동을 보게 되면 하게 되고(?) 호랑이가 제 말하면 찾아온다. 학교 문을 열고 민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내의 1층 로비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예나의 돌아가는 시선에 자연스레 새은의 고개도 따라갔다. 예나를 마주친 민국이 단정한 이미지로 손을 흔들었다.

“오오!”

새은은 민국의 얼굴을 보는 순간 크게 놀랐다. 예나를 통해 잘 생겼단 소리를 익히 들어오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잘 생겼을 줄이야! 주변의 남녀가 오징어로 보일뿐더러, 등 뒤에서 하느님의 후광이 내리비치는… 아니, 이건 좀 오바였다. 어쨌든 무지하게 잘 생긴 건 분명했다.

“이야, 무지하게 잘 생겼네!”

“…….”

감탄사를 내뱉는 새은을 뒤로하고 예나가 미소 지으면서 민국을 맞이했다.

“왔어 민국아…?”

“응. 이 분이 그분이셔?”

새은을 맞은편에서 볼 수 있는 의자에 앉은 민국이 눈으로 가볍게 가리켰다. 그러자 예나가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은 맞은편의 여유로운 새은을 주시하다가 사뿐한 미소로 손을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민국이라고 합니다.”

“이야, 정말 잘 생기셨네요. 맘에 들어요. 정새은이에요.”

남성스러운 코멘트와 함께 악수를 흔쾌히 받는 정새은이었다. 민국은 상업용 미소를 뿌리다가 자리에 앉고는 말했다.

“예나의 친구라고 몇 번 말을 듣긴 했는데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쁘셔서 놀랐습니다.”

“저야말로 그냥 아이돌급 정도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배우 급이 나타나서 놀랐습니다 하하!”

무슨 남자들끼리 비즈니스 사업 파트너로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민국은 은별이만큼은 아니지만 방송 스폰을 하면서 사람 보는 눈매를 기른 적이 있었다. 초면인 정새은과 인사를 나누는 순간 민국은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쉬운 여자가 아니라는 느낌말이다.

“늦게 왔으니 커피라도 대접해드려야 할 것 같군요. 원하시는 거 말씀해주시죠.”

“진짜요? 그럼 저야 사양하지 않죠 하하! 아이스커피 한 잔 부탁드립니다!”

민국이 씩 웃다가 예나를 돌아보고는 ‘예나는 뭘 마실래?’하고 질문했다. 예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고, ‘그럼 물로 갖다 줄게.’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나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로비의 작게 차려진 커피 카운터로 향할 때였다. 정새은이 예나를 돌아보면서 귓전에다가 입을 열었다.

“뭐야,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는데? 예나 너 의외로 좀 하는구나?”

“딴 맘… 품으면 안 돼….”

불안한 듯 예나가 말했다. 정새은이 치아가 드러나도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해봤자 한 번 자는 것밖에 없겠지!”

“…….”

“농담이야 농담.”

이윽고 민국이 커피 두 잔과 물 한 잔을 들고 당도했다. 테이블에 차례대로 내려놓자 정새은이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받아 챙기더니 한 모금 쪼로록 마셨다. ‘캬아!’하고 목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하던 정새은이 물었다.

“평소 이렇게 자상하세요? 여자들 좀 많이 울리시겠다!”

“하하, 그렇진 않습니다.”

정새은은 확실히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타입이었다. 무엇보다 가슴이나 허벅지를 비롯해서 과감한 노출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복장도 파인 가슴의 계곡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단단한 엉덩이의 곡선이 훤히 드러날 정도의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쌀쌀한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살결을 노출한다는 건, 남자들을 언제든지 유혹할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좋은 타입은 아니구만.’

친구로서 나쁘진 않아도 이성적인 상대로선 결코 좋지 못했다. 한 번 어떻게 해보고 싶어서 안달 난 철없는 남자들이라면 몰라도, 민국은 이런 여자에게 야시시한 맘을 품을 생각은 일절도 안했다. 가벼운 커피 한 모금과 함께 민국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제가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드리고 싶은데.”

“네네 말씀하세요 귀 크게 열고 듣기로 하죠!”

상업적인 미소를 머금고 민국이 물었다.

“예나에게 선물해주셨던 그 흑화 소주가 아직 정식 발매가 안 된 술이라고 들었는데요.”

“아~ 네네. 정식 발매 안 된 술이죠.”

“그럼 어디에서 구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눈을 두 번 깜빡이던 정새은이 대답했다.

“제 삼촌이 술 공장을 하면서 주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거기에서 나온 비발매 품이죠.”

“그럼 그 흑화 소주를 제작한 것도 그 삼촌 분이신 겁니까?”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걸 물으신대요?”

새은의 반문에 민국이 의심하지 말라는 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 흑화 소주의 맛이 생각보다 일품 이어서 많이 궁금하던 차거든요. 평소 술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는데, 그 술만큼은 자꾸 기억에 어른거리더군요.”

“아아~.”

“그래서 그 삼촌분이 하는 주점의 위치라도 알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새은의 고개가 예나에게로 돌아갔다. 새은의 눈길을 마주한 예나는 민국의 부탁이니 만큼 필히 들어달라는 듯 간절한 모습이었다.

애초에 민국의 의도가 그런 단순한 것일 거라 새은도 생각지는 않았다. 새은 역시 오랜 남자들을 상대해본 만큼 민국이 보통 남정네가 아니란 걸 직감했으니까. 잠시 피식 웃음을 머금던 새은이 물었다.

“삼촌 연락처라도 알려드릴까요?”

“그러면 감사드리죠.”

그렇게 정새은 삼촌의 연락처를 따내는 민국이었다. 동시에 주점의 위치 또한 알아낼 수 있었다.

* *

‘주점이라.’

다음 날, 민국은 홀로 정새은 삼촌이 운영하는 주점 앞에 도착했다. 주점 간판에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이 여간 큰 곳이 아니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부터 각종 비즈니스 영업을 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쉼터를 갖기 위해, 혹은 쾌락을 즐기기 위해 찾아올 듯한 그런 곳이었다.

‘크으, 오후인데도 술 냄새가 지독지독하구만.’

민국은 일단 신분증을 보여주어 주점 안으로 입장했다. 그러자 로비 안에 벌써부터 휘청거리고 있는 취객 한 두 명이 보였다. 엉덩이가 두드러지는 짧은 치마의 여인들이 그런 취객들을 부축하면서 ‘어머 오빠~.’하면서 달래고 있었다.

민국은 그런 그들을 비껴 지나가다가 마침내 카운터에 당도했다. 민국은 카운터의 직원에게로 다가가서 대뜸 질문했다.

“혹시 정한구 사장님 안 계십니까?”

“사장님은 갑자기 왜…?”

“찾아오기로 사전에 연락을 드렸어서 말입니다. 서민국이라고 말씀드리면 알아들으실 겁니다.”

민국의 말에 직원이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하고는 몸을 돌렸다. 어느 방으로 들어가는 직원을 뒤로하고 우두커니 기다리던 민국. 이윽고 직원이 들어갔던 방에서 뚱뚱한 체구의 남자가 나타났다.

“아아, 네가 어제 연락했던 새은이 친구냐?”

“반갑습니다. 많이 바쁘신가요?”

“그래 그래. 이제 손님들 올 참이라 바빠질 때지. 그래서 용건이 뭐냐?”

애초에 큰 주점의 사장인 만큼 쉽게 조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예나의 친구, 정새은의 도움으로 민국은 그를 쉽게 뵐 수 있었다.

“혹시 흑화 소주를 만든 사람이 사장님이신지?”

민국은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 말에 사장이 ‘흑화 소주? 아… 새은이 생일 선물로 한 박스 줬던 그거?’하면서 중얼거린다.

“제작은 내가 하긴 했는데, 30%만 한 셈이지?”

“예? 그렇다는 건?”

“실제 제작한 사람은 따로 있어. 나도 그 사람이 없었으면 흑화 소주라는 건 경험도 못했겠지.”

‘이름이 뭐더라… 아니 이름 말고 이 술집에서 쓰는 네임이 있었는데….’하면서 덧붙이던 새은의 삼촌이었다. 이윽고 두꺼운 손으로 손뼉을 짝 친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흑설 공주! 우리 주점에서 흑설 공주라 불리고 있지!”

“흑설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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