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뿅뿅! 친구와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아기자기한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예슬이었다. 한 시간 정도가 경과했고 예슬은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1시간 30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요?’
허겁지겁 고개를 들어 영화관 입구를 확인하는 예슬이었다. 혹시나 이미 영화를 다 보고 나온 건 아닐까 불안했다. 그러나 아직 사람 한 점 입구에서 나오지 않았음에 예슬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
그러나 그 안도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뀐 것이다.
‘영화를 볼 때 영화관 입구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예전에 언니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는 예슬이었다. 잘 생각해보니 영화를 다 본 뒤에 따로 열어주는 출구가 있던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예슬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옆자리에 있던 커플이 순간 의아한 표정으로 예슬을 쳐다보았다.
예슬은 개의치 않고 가방을 어깨에 메면서 총총 걸음으로 출구 쪽을 찾기 위해 뛰었다.
“핵핵!”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한참을 찾길 어연 2분. 가까스로 영화관 출구 쪽을 찾아낸 예슬이 허리를 숙이면서 땀을 흘렸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영화관 출구 쪽 문들을 일일이 확인해본다.
아직 다 닫혀 있었다. 그럼 영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덜컹. 그때였다. 예슬이가 막 돌아보던 영화관 출구 쪽 문을 직원 한 명이 열어젖힌 것이다.
예슬은 우두커니 서서 그 출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
익숙한 얼굴이 나오는 것을 발견한 예슬이 후다닥 자기 몸집만한 쓰레기통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 나온 사람을 지켜보자니….
“영화 나쁘진 않았네. 예나 너는 어떻게 봤어?”
“괜찮았던 것 같아. 지루하지도 않고 재미있었어.”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두 사람이 나오는 제때에 도착한 것이다. 예슬은 진심으로 안심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예슬은 굳게 각오를 다진 얼굴로 두 사람의 자취를 쫓기 시작했다.
“식사 할 수 있겠어? 입덧하는 건 괜찮아?”
“응… 할 수 있을 것 같아.”
민국과 예나를 따라 나오는 사람들 속으로 파고드는 예슬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바로 뒤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고개를 숙인 채 따라가는 예슬. 덕분에 두 사람이 하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더불어 귀에 거슬리는 한 가지 단어가 있었다.
‘입덧?’
입덧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으나, 구역질과 비슷한 것임은 알 수 있었다. 의문을 갖는 사이에 민국이 예나의 등을 토닥였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인스턴트 류가 어려우면 죽 먹으러 가자.”
“…….”
다정하게 토닥이는 민국의 배려를 예슬도 느낄 수 있었다. 예나가 빙그레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는 모습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뭐라고 할까… 평소 언니가 자신에게 보인 적 없는 얼굴을 저 남자에겐 보인다고 할까? 확실히 어린 예슬이가 봐도 굉장히 잘 생기고 멋진 미남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민국아. 밥 먹으러 갈게.”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두 사람. 예슬은 사람들을 비좁고 들어가서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기다렸다. 민국과 대화를 나누던 예나는 불현듯 엘리베이터 앞문을 보다가 ‘응?’하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국이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응…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가로젓는 예나였다. 자기 발치 앞에 있는 어린아이의 뒤태가 어째서인지 익숙해서였다. 하지만 마스크 착용에 선글라스까지… 심히 수상해보이면서도 한 편으론 예슬이가 이런 곳에 있을 리 없단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식당이 있는 지하 1층에 도착했고, 예나와 민국이 내리려고 하자 옆으로 비키는 예슬이었다.
“가자.”
“으응.”
선두로 나서는 민국을 따라 나온 예나였다. 두 사람이 붙잡고 있는 손이 심히 거슬리는 예슬이었다. 이윽고 따라 나온 예슬은 한식을 고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
그리고 참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집에 있을 어머니가 걱정할 시간이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예슬은 이미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민국과 예나가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고, 언니를 배려해주는 그의 모습에… 그리고 그런 민국을 보며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예나의 모습에… 예슬은 씁쓸하면서도 뭔가 기쁜 마음을 느꼈다.
‘설마 어른의 사랑이란 게 이런 건가요?’
예슬은 친구가 말했던 어른의 사랑이 무엇인지, 두 사람을 보면서도 잘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집안에서 그토록 힘든 얼굴을 짓던 자기 언니가 저 남자를 만나자마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는 것. 그리고 죽도록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는 것이었다.
‘…….’
어쩌면 예나는 민국이 곁에 없어서 힘들어하는 걸지도 모른다. 예슬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갈까?”
상념에 잠겨 있던 찰나에 민국과 예나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식으로 끼니를 때운 두 사람은 이제 백화점도 끝날 시간이겠다, 정문으로 나가는 모습이었다. 예슬은 어두컴컴해진 밤이란 사실에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에게 혼쭐이 나겠다고 생각했다. 연락이 올 때마다 친구집이라면서 에둘러 거짓말을 칠 따름이었다.
“…….”
이윽고 두 사람이 백화점 근처의 조용한 벤치에 앉았다. 전봇대 하나가 유난히 빛을 발하는 그곳에서, 예슬은 두 사람의 옆 벤치에 걸터앉아 귀를 기울였다.
“히야, 날씨 참 좋다.”
하늘을 바라보며 민국이 말했다. 예나도 자연스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응….”
“학교도 있는데 몸은 괜찮겠어?”
화제를 돌리는 민국의 물음에 예나가 고개를 저었다.
“좀 있으면 방학도 할 테니까… 이번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어.”
“그렇군.”
다시 하늘로 고개를 올린 민국이었다. 잠시 정적. 또다시 어머니에게 연락이 올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예슬이. 그때였다.
“그냥 너희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나을까?”
“…….”
민국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예나였다.
“어차피 이렇게 지체하고 있어봤자 마땅한 방도도 없을 것 같고. 예나 너도 언제까지 숨기고 있기 불편할 테니까.”
숨기고 있다… 예슬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자신이 모르는 둘 사이의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민국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예나가 잠시 후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민국이 너 혼자서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질 거야.”
“…….”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아….”
뚜렷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예나였다. 자기 잘못도 있었기에, 모든 죄를 민국이 뒤짚어 쓰는 건 원치 않았다. 그렇게 오늘도 아무런 해결 없이 일이 끝나는 듯 싶었다. 바깥바람을 쌔며 있길 어연 10분. 민국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휘유. 시간이 많이 지났네. 이제 집에 가볼까?”
예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예슬도 지겹도록 울리는 휴대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을 데려다주는 민국을 따라 움직이는 예나. 마지막까지도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예슬은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예나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민국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들어가. 편히 쉬고.”
“응… 오늘 고마웠어 민국아.”
“이 정도 가지고 뭘. 내일도 연락하자.”
눈웃음을 지으며 똑같이 손을 흔드는 예나였고, 민국은 그런 예나가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한참동안 말없이 예나가 들어간 자취를 눈으로 쫓던 민국이 차츰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앵?”
“…….”
유유히 걸음을 옮기려던 민국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은 것이었다. 민국은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이 선글라스를 착용한 어떤 꼬마임에 순간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올려다보는 꼬마의 얼굴에 민국이 다른 의미로 놀라면서 말했다.
“어? 너 혹시 예나 동생 예슬이 아니니?”
“…….”
“와, 못 본 사이에 많이도 컸네. 예나 동생답게 예쁘게 자랐구나.”
“안녕하세요.”
“그래 그래. 어머니 심부름이라도 갔다 온 거야? 기특하네.”
버릇처럼 예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민국이었다. 하지만 예슬은 잘 생긴 미남보다 자기 언니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신념 있는 아이였다. 민국의 손을 재빠르게 내쳤고, 예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오빠랑 할 얘기가 있어요.”
“허허, 당돌한 손짓이구나. 근데 나랑 할 얘기?”
예슬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나 집 근처의 슈퍼마켓이었다. 민국은 요구르트 한 개와 커피 한 개를 산 다음 밖으로 나왔다. 퉁명스러운 예슬이에게 요구르트를 건네는 민국이었다.
“요구르트 마실래?”
“저 어린애 아니에요.”
“그래? 맛있을 텐데.”
“…….”
확실히 요구르트의 단맛이 눈에 어른거렸는지 참지 못하고 손을 뻗는 예슬이었다. 그래도 예의를 배운 아이답게 공손히 양손을 내미는 예슬이의 행동에 민국이 피식 웃으면서 요구르트를 건넸다. 받자마자 곧장 뚜껑을 뜯고 한 입 머금는 예슬이었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민국이 입을 열었다.
“예나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네.”
“오늘 따라다녔다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야?”
오늘 미행을 했다고 진솔하게 털어놓은 예슬이었다. 그래야만 대화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슬은 요구르트를 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흐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커피를 다시 한 모금 홀짝이는 찰나였다. 예슬이 몸을 돌려 민국을 올려다보고는,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언니를 정말 사랑하시나요?”
“푸합!”
마시던 커피를 그만 뱉고 말았다. 예슬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민국이 허겁지겁 입가를 소매로 닦더니 말했다.
“요즘 애들은 참 빠르구나.”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언니를 사랑한다면 행복하게 해주세요.”
장난스럽게 받아들이려던 민국이었다. 진심이 담긴 그 대사에 민국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예슬은 여전히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언니는 정말 오빠를 좋아하고 있어요. 언니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걸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거든요. 집에서는 항상 만들어낸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오빠를 만나면 진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고작 초등학생이었지만 예슬은 남다르게 똑부러진 면모가 있었다. 특히 언니를 향한 마음에선 그 누구보다도 올바랐다.
“하지만 오빠는 어째선지 언니를 의무감으로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친절하고 배려했지만 마치 그게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요.”
“…….”
“언니가 그걸 알고 있는지는 전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일 안다면 언니는 속 깊이 슬퍼할 거예요. 오빠를 정말로 좋아하니까요.”
어린아이의 촉이란 무서운 법이다. 민국은 예나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긴 했지만, 은별이란 여자 친구가 있었고… 급작스런 임신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예나를 도와주는 것도 있었다. 모든 속사정을 아는 건 아니지만 예슬의 눈에는 그게 다 보인 것이다.
“오빠가 정말 제 언니를 사랑한다면, 진심을 보여주세요. 그게 언니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거라 생각하니까요.”
또다시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리자 예슬은 급히 집에 돌아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할 이야기는 끝이 났겠다, 예슬은 허리를 숙이며 민국에게 인사했다.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잘 부탁드려요.”
“…….”
이윽고 몸을 돌려 후다닥 집으로 향하는 예슬이었다. 혼자 남게 된 민국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일순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군.”
남은 커피를 홀짝인 민국이 정면을 쳐다보았다.
“어린애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건가.”
하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오히려 예슬이를 통해서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가리고 있던, 치사한 본능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민국은 커피를 재차 홀짝이면서 자기 생각을 바로잡는 게 좋다고 느꼈다.
“…….”
그렇게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찰나였을까…. 예슬이의 핀잔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갑작스레 뇌리 속으로 가벼운 스파크가 한 차례 지나갔다. 동시에 민국의 눈이 여느 때보다도 커다래졌다.
‘어? 뭐시여? 이거 어쩌면…….’
무작정 떠오른 생각이었으나 민국은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들었다. 흩어져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 분명할 거라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민국은 커피캔을 굳세게 잡으면서 생각했다.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수습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