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91화 (191/369)

191화

‘저 오빠는?’

벽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밀어 바라보는 예슬. 손의 물총을 강하게 쥐는 모습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아니, 어디선가 본 게 아니라 이미 친 언니 예나를 통해서 알고 있는 인물!

‘민국…이란 오빠!’

친 언니 예나와 상당히 절친한 사이로 어릴 때부터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다만 예슬은 민국에 대해 언니에게 들은 소리만 있었지, 실체는 잘 알지 못했다. 애초에 예나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과감히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고등학교를 등교할 때 예나의 집 앞에 들려 대기를 하던 민국의 모습을 창문 밖으로 본 게 전부였다.

‘언니 남자친구가 설마 저 사람이란 말이에요?’

서민국이란 오빠는 언니가 친구로서 놀려고 한다 해도 믿을 것이었다. 옛 시절부터 친구 사이로서 단 둘이 노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으니까. 그가 언니의 남자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로 납득이 가면서도, 한 편으론 충격으로 다가오는 예슬이었다.

‘무엇보다 방금 언니보고 남자친구라고 했지요….’

고개만 내민 채로 수상한 눈길을 짓는 예슬이었다. 귀를 토끼처럼 쫑긋 세우고 민국의 다음 말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남자 친구라니? 그럼 당신이….”

“예. 접니다.”

예나에게 구차하게 대시를 하던 남자에게 딱 잘라 선언하는 민국이었다. 예나는 그런 민국의 발언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조금 놀라했다. 민국은 그런 예나를 흐뭇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자기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전철이 좀 막혀서.”

“으… 으응… 아니야 괜찮아….”

차마 부끄러운지 고개를 못 들고 가로젓는 예나였다.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모습이 도무지 소꿉친구로서 함께 해온 시절이 있다곤 믿기 어려웠다. 민국은 얼떨떨한 얼굴로 둘 사이에 껴 있는 남자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이만.”

“…….”

그리고 폼나게 예나의 손을 붙잡고 인도를 걷는 민국이었다. 보도를 거니는 민국을 따라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졸졸 따라가는 예나. 예나에게 대시를 했던 남자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숨어 있던 벽에서 모습을 드러낸 예슬은 물총을 품에 안고 그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남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자니….

“아씨, 아깝다. 저런 쭉빵한 여자는 보기 드문데.”

아직 애인지라 남자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전부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날카로운 촉으로 단정컨대 예나에게 대시를 했던 이 남자는 결코 좋은 맘을 갖고 접근했던 건 아니었다. 예슬은 괘씸한 마음에 바로 옆에서 물총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들려오는 장전 소리에 머리를 긁적이던 남자가 ‘엉?’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것처럼 남자의 면상에다가 물총을 발사했다.

뾱뾱!

“억! 뭐야!”

뾱뾱뾱! 쉬도 새도 없이 뿜어지는 물총의 액체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물이 담긴 물총이 아니었다.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 자주 사용하는 물감을 골고루 섞어서 만든 예슬이만의 탄알(?)이었던 것이다.

끈적끈적한 물감을 얼굴에 적중 당한 남자는 눈이 감긴 상태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었다. 물총에 담긴 물감의 3분의 1일을 소비하고 나서야 예슬은 방아쇠를 멈추었다.

허겁지겁 물감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면상을 지우는 남자의 모습에 ‘베~’하고 혀를 내밀면서 매롱하는 예슬. 이윽고 보도 쪽으로 고개를 돌린 예슬은 언니의 자취를 또다시 쫓아갈 따름이었다.

“몸 상태는 괜찮아? 전에 봤을 때는 안색이 창백했었는데.”

“으응… 많이 괜찮아졌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민국과 예나는 제3자의 개입을 짐작도 못하고 대화만 이어갔다. 예나는 방금 전 자신을 구해줄 때 민국이 발언했던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여전히 신경에 쓰였는지 얼굴이 붉었다. 그것을 아파서 그러는 것이라 오해한 민국이 은근슬쩍 예나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보았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차, 차, 차차… 차차차차차!”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물리는 예나였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쿵쿵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설렘을 느낀다는 건… 예나는 어지간히 민국을 좋아한다는 의미였다.

“다행이네.”

민국은 예나가 자신을 좋아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은별이와 있는 식당 앞에서 대놓고 고백을 한 적도 있었고, 그전부터 이런저런 형식으로 이성적 호감을 비춰왔던 예나였으니까. 하지만 민국은 이미 은별과 사귀고 있던 실정인지라 예나의 호감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바캉스 때는 은별이에게 일편단심으로 전진할 것임을 고백한 적도 있고 말이다. 다만 그때부터 비롯된 여러 사건들을 통해 꼬이고 꼬여 관계가 애매해져버린 실정이었지만.

“건강에 혹시 무리라도 생기면 말해줘. 내가 도와야 하니까.”

“응… 고마워 민국아….”

지금은 예나와 어떤 사이라고 단정 짓기가 뭐했다. 성관계를 맺다 못해 뱃속에 새 생명이 싹트고 있었으니까. 정작 고백을 하고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오늘 민국이 예나와 만난 까닭은 별 거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은 뒤로 두고, 예나와 은별의 상태가 어떤지 부터 확인이라도 해야 했으니까. 혈색이 안정적인 예나의 얼굴을 보니 민국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도 없겠지.’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람이 시간을 따라가야 하는 법이다. 그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로 변할 수 없는 구조. 결국엔 민국도 답을 내놓아야 할 때가 찾아올 것이었다.

“은별… 씨는 어때…?”

번잡한 번화가에 들어섰을 때였다. 예나가 미안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민국의 고개가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내가 그런… 짓을 해서, 민국이 너랑 사이가 틀어졌을… 텐데….”

“…….”

여전히 예나는 흑화 소주 사건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그 사건 이후로 달달했던 은별과의 사이가 확실히 달라져 버린 민국이었으니까. 지금은 은별을 마냥 여자친구로 대하기도 어중간한 사이였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은별이는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 다만 예나 네 말대로 예전 같은 사이는 좀 무리겠지….”

“…….”

“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걱정할 것도 없다오. 어차피 이 몸이 다 책임질 테니까!”

예나는 민국이 무리하고 있단 사실을 조금은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이 나라에서 일부다처제는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법적으로도 통과될 리 전무했고 말이다. 둘 다 책임지겠다는 건 사실상 현실적으로 무리에 가까운 상황…. 아무리 민국이가 지금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강단 있는 모습을 선보였다 한들, 이번 논제는 혼자서 풀이하기에 역량이 부족할 것이었다.

“미안해 민국아….”

“…….”

“정말, 정말 나 때문에… 흑.”

예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사과를 반복했다. 민국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예나의 머리만 마냥 쓰다듬을 따름이었다.

단순히 아이를 배서 힘든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민국을 이런 힘든 고비로 몰아넣은 것이 자기란 사실에, 죽도록 미안해서 정신적으로 힘든 것이 컸다.

예나는 그러한 사실로 부쩍 잠도 준 상태였다.

“심심하지 않아? 근처 가서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올까?”

“…….”

“은별이가 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흠! 까짓것 정강이 두 번 맞기로 하지요!”

분위기를 정화시키기 위해 노고를 치르는 민국. 예나는 그런 민국의 노고를 이해했기에 울음을 터트리려다가도 간신히 참아냈다. 이대로 슬픔을 터트려봤자 분위기만 울적해진단 사실을 예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그리하여 백화점으로 이동하는 두 사람이었다. 예슬은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능한 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북적해서 잘 안 들려요. 짜증나요.’

번화가에 들어선 대다가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졸졸 쫓아가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발의 보폭이 어린아이답게 성인보다 좁아서… 두 사람의 걸음을 따라가려면 두 배는 빨리 걸어야했다.

“헉헉!”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뱉으며 예슬은 두 사람을 따라 백화점으로 들어왔다. 로비를 지나던 어른들이 이따금씩 혼자 들어온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귀여운 유아복을 입은 것도 아니었고… 마치 누군가의 뒤를 쫓는 것처럼 철저하게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수상한 티가 팍팍 나고 있었으나 정작 예슬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윽고 에스컬레이터에 탑승하는 둘을 따라 예슬은 몇 칸 아래에서 쫓아갔다.

‘어디를 가는 거죠?’

그 의문은 10층에 도달해서야 알 수 있었다. 영화관이었다. 마치 애인들이 데이트를 할 때나 들릴 법한 영화관…! 예슬은 문득 오늘 학교 친구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의 사랑에선 구역질과 아픔은 기본이래!’

이 정도쯤은 요즘 초중딩 학생들도 하는 데이트인데, 대체 뭐가 다르길래 언니가 그토록 아파한단 말인가? 예슬은 그 사실을 너무나 알고 싶었고, 한 편으론 언니를 보호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카운터로 향하는 둘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이거 주세요.”

“이거 말씀이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민국과 예나는 카운터 직원에게서 팝콘을 받음과 더불어 영화표 두 장을 받는 모습이었다. 예슬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아차하면서 배낭을 뒤적였다.

“…….”

문방구에서 구매했던 아기자기한 지갑. 초등학교 여자애들에게 어울릴 법한 그 지갑에서 돈을 꺼내보는 예슬이었다. 달랑 1500원…. 고개 올려 영화표 값을 확인한 예슬은 청전벽력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어요!’

어린애들의 비애라면 비애랄까…. 어찌 됐든 민국과 예나는 티켓을 구매하고 즉각 영화관으로 입성하는 모습이었다. 예슬은 그 뒤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물질적인 부족함에 결국 홀로 10층에 남게 되었다.

‘아으으아으으.’

어찌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예슬이었다. 직원의 시선을 피해 몰래 따라 들어 가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으로 말미암아 비도덕적인 짓은 자기 자신이 허용치 못했다. 몇 분 동안 갈등을 때리던 예슬은 결국 비어 있는 근처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풀썩 앉았다.

‘엄마에게 연락해야겠어요….’

그래도 요즘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휴대폰은 소유하고 있는 예슬이었다. 친구네 집에서 좀만 놀고 오겠다면서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치는 예슬이었다. 비록 이것 역시 비도덕적인 짓으로서 어머니가 허락해줄 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언니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쯤은…!

“…….”

전화 통화로 친구와 말을 맞추고 어머니를 속이는데 성공한 예슬이었다. 실로 죄송스런 맘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니의 남자친구를 쫓고 있다고 하면 빨리 집에나 들어오라고 할 게 분명했으니까.

“…….”

결국 예슬에게 남은 마지막 해결책은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것. 하지만 몇 분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급속도로 지루해져서 과연 버틸 수나 있을까 싶었다. 이윽고 근처의 자판기가 눈에 보이자 예슬은 지갑의 1500원을 꺼내 자판기로 향했다.

땡그랑 땡그랑. 동전을 투입한 예슬은 자판기 상단에 있는 버튼을 누르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덜커덩! 버튼을 누른 음료수가 나왔고, 예슬은 그 음료수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

얌전히 코카콜라를 홀짝이면서 언니가 들어간 영화관 입구를 바라보는 예슬이었다.

============================ 작품 후기 ============================

tip : 예슬이가 마시는 코카콜라는 톡 쏘는 맛이 있었는데,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갈증에 굶주려있는 목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맥도날드나 롯데리아에서도 구매가 가능한 콜라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아주 좋은 제품이 분명했다. 고로 나는 팹시를 추천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