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초등학교의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수업에 지쳐 있던 학생들이 언제 지루해했냐는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며 놀기 시작했다. 확실히 어린 학생들답게 하나같이 건강하고 활발했다. 남학생들은 치고 박고 뛰어 놀기 바빴으며, 여학생들은 연애 얘기부터 갖갖이 아이돌 얘기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
하지만 예슬은 그런 남녀 학생들의 이야기에 무관심했다. 애초에 정서적으로 교육을 달리 받았던 예슬의 가족이었다. 자매끼리 경어를 사용하는 것부터, 아버지를 깍듯이 모시는 것까지… 기본 예의범절의 자세가 일반 사람들과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깊은 고민에 빠진 터라 달리 놀고 싶지도 않았다.
“헤헤! 예슬아! 무슨 일 있어? 왜 말을 안 해?”
의자를 뒤로 돌려 대화를 나누던 친구들의 물음이었다. 예슬은 그런 친구들의 발언에 다 큰 어른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각한 일이 생겼어.”
“시, 심각한 일?”
“그래. 무지~~~~~~~ 심각한 일.”
양팔을 펼쳐 높다란 원형을 그리는 예슬의 손짓에 친구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우아아~’하고 놀라했다. 이윽고 옆자리의 친구가 그런 예슬을 보면서 물었다.
“얼마나 심각한 일인데? 진짜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야?”
“응. 내가 이 나이까지 살면서 제일 심각하게 느낀 일이야.”
표정을 찡그리면서 강조하는 예슬의 모습에 친구들이 또다시 눈을 휘둥그레 뜨며 ‘우아아~’하고 놀라했다. 이젠 적극적으로 물어오는 친구들이었다.
“뭔데 뭔데? 무슨 일인데?”
“정말 그리 심각한 일이면 우리에게 물어봐야지! 우리가 도와줄게!”
예슬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사실 혼자만 고민하고 있기에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친구의 도움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예슬이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어른들의 일이었으니까!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언니? 아~ 항상 너랑 놀아준다던 친 언니?”
예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몇 주 전부터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말도 안했어. 그러다가 요즘은 식사도 안하고 구역질을 해.”
“구, 구역질?”
예슬이 ‘응’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친구 한 명이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옆자리 친구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거 진짜 심하게 아플 때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한 번도 아니고 매번 식사할 때마다 구역질 해?”
“그렇다구.”
제때 식사도 못해서 얼굴도 많이 야윈 언니, 예나의 모습이 자꾸만 뇌리 속에 어른거렸다. 예슬은 혹시 언니가 어디 크게 다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럼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병원가보면 의사 선생님이 치료를 해주지 않을까?”
“언니에게 말 해봤는데 괜찮대. 많이 아픈 게 아니라면서. 하지만 내가 볼 땐 정말 아파보이는 걸!”
자신의 확신이 결단코 틀리지 않았다는 듯 예슬이가 소리쳤다. 친구들이 서로 눈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슬을 돌아보았다.
“그럼 또 다른 건?”
“또 다른 거?”
“응! 너네 언니가 예전과 달랐던 점은 그거밖에 없었어?”
예슬이 ‘으음!’하면서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지었다. 이윽고 오늘 아침에 있던 일이 떠오른 예슬이었다.
“언니 방문 앞에서 우연히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누구랑 휴대폰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어!”
“진짜?!”
“어떤 대화였는데?”
시큰둥한 표정으로 예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얘기를 나누는 언니 목소리가 되게 힘이 없었어.”
“힘이 없었다고…? 헉….”
예슬과 대화를 나누던 세 명의 친구 중 한 명이 다짜고짜 놀란 입에 손을 갖다대는 모습이었다. 예슬과 동시에 두 명의 친구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예슬을 대신해서 친구 둘이 물었다.
“왜 그래?”
“넌 뭘 좀 알 것 같아?”
그 말에 손을 놀란 입에 갖다 대던 친구가 손을 내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누군가랑 아침 일찍부터 통화를 하고 식사를 할 때마다 구역질을 하고… 몇 주 전부터 얼굴이 창백했다면… 헉.”
“뭔데 그래?”
“너만 알고 있지 말고 우리도 알려줘!”
친구 둘이 추궁하는 가운데 예슬은 진지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예슬의 시선에 마지못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
“…….”
“남자친구일 거야!”
예슬의 눈이 여느 때보다 커다래졌고, 듣고 있던 두 명의 친구가 ‘우와아!’하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놀라했다.
“남자친구? 하지만 우리도 사귀고 있잖아?”
“맞아! 남자친구를 사귄다고 해서 구역질을 하다니, 말이 좀 이상해!”
이미 남친을 사귀고 있던 친구 한 명이 반발했고, 그 반발에 옆의 친구가 동조했다. 그러나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냈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언니가 가르쳐줬는데 어른이 되면 나누는 사랑은 달라진대.”
“…….”
“잘 모르겠지만, 구역질도 하고 많이 먹기도 하고 그러나봐.”
“정말? 와아….”
“어른의 사랑은 뭔가 남다르구나… 그럼 예슬이 언니는 그 남자 친구랑 사랑하느라 그렇게 아픈 거야?”
남자 친구 건을 거론했던 그녀가 예슬을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예슬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대답을 듣길 원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걸 거야.”
예슬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뇌했다.
‘예나 언니의 남자친구….’
사실상 새파란 스무 살 초반의 여자라면 연애를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예슬도 친구들을 통해 들은 어른의 이야기로, 언니 나이쯤이라면 이성과 노는 게 당연한 행위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 간의 사랑에 그런 아픔(?)이 존재할 거라 예슬은 추호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자꾸만 어른거리는 친 언니, 한예나의 지친 얼굴에 예슬이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
대화를 나누던 친구 셋은 예슬을 쳐다보면서 입을 다물 따름이었다.
‘어른의 사랑이라 해도 언니를 다치게 하는 남자는 결코 용서 못해.’
이미 남자 친구라 단정 짓고, 예슬은 친 언니를 향한 분노의 사랑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 *
“예슬이 왔어요?”
오후 세 시쯤 되어 집에 도착한 예슬이었다. 본래는 친구들과 근처 놀이터에 가서 소꿉놀이를 하기로 약속했던 예슬이였지만, 급작스레 떠오른 중요한 기억에 약속을 깨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예슬은 현관으로 걸어오는 언니의 모습에 웃으려다가 부엌을 보았다. 부엌 쪽을 보아하니… 언니 혼자 못다한 식사를 마저 챙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식사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많이 남겨진 밥 공기가 보였다.
“…….”
예슬이 표정 관리를 못하고 굳은 얼굴을 하는 가운데, 예나가 짐짓 눈웃음을 지으며 예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죠?”
야윈 언니의 얼굴. 친구에게 들은 어른의 사랑이란 게 정말 그토록 힘든 일인 걸까? 예슬은 아직 어른이 아니라서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애써 웃는 언니를 따라 미소를 짓지 않는다면 예슬은 왠지 언니의 맘이 아플 것만 같았다.
“네! 잘 듣고 왔어요 헤헤!”
“잘했어요. 배고프면 말해요. 밥 차려줄게요.”
“괜찮아요 언니!”
어린 맘에 언니가 걱정하지 않도록 미소를 짓는 예슬이었다. 이윽고 예나가 아직도 구역질이 나는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예슬은 그런 언니의 왠지 모르게 초라한 뒷모습을 올려다보다가 문구점에서 구매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
아까 아침에 들었던 이야기로 유추하는 건데… 필시 언니가 만나려는 사람은 그 남자친구란 작자가 분명했다. 둘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몰랐지만, 언니가 이토록 힘들어하는데 가만있을 동생이 아니었다.
‘가서 쓴 소리는 못해줘도 언니 아프지 말게 해달라고 소리는 칠거야.’
친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도 큰 예슬이었다. 다만 문제는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오후 일곱시였다. 오후 여섯시에 나간들 결과적으론 한 시간밖에 못 있다 오는 것이었다. 그 남자가 언니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철저하게 알아야 할 텐데… 예슬은 시간이 심히 걱정인 실정이었다.
“…….”
부엌 쪽을 돌아보는 예슬이었다. 평소 때라면 식사를 하고나서 식기들을 치웠을 텐데, 까먹고 그대로 놔둔 모양이었다. 예슬은 굳이 언니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테이블의 식기들을 치우고 자신의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어색하게 젓가락을 짚고 밥을 먹으면서 체력을 미리 보충해두는 예슬이었다.
* *
때가 찾아왔다!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사십분! 예슬은 시간에 맞춰서 미리 준비해둔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 언니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아까 전보단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는지 피부색깔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내심 안도함과 동시에 예슬은 현관으로 나가기 전 자신에게 외치는 예나의 소리를 들었다.
“예슬이 자요?”
“아녜요 언니. 깨 있어요.”
“언니 잠깐 나갔다 올게요. 한 시간 정도 집 비울 텐데 괜찮아요?”
“네. 걱정 안 해도 되요 언니.”
“응… 나쁜 일이나 수상한 사람 방문하는 거 같으면 연락 꼭 해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예슬이가 귀여웠는지 눈웃음 짓던 예나였다. 이윽고 새하얗게 단장한 모습으로 예나가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예슬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곧장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빨리 빨리.”
자신을 재촉하며 예슬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자도 주워 썼다. 돌아오기 전 문구점에서 구입한 장난감 선글라스 하나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옷은 평소 입지 않고 놔두었던 옷을 입었다. 이로써 예나가 예슬을 알아볼 가능성이 조금은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라면 나를 꼭 알아볼 테니까 조심해야 되요. 아마도….”
그래도 너무 알아보지 않으면 한 편으론 섭섭할 것 같았다. 내심 서운할 수도 있어 그리 중얼거리며 예슬은 모자를 제대로 푹 내려썼다. 그리고 서둘러 평소 신지 않던 다른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나가기 전 목에 걸어두었던 열쇠로 문을 잠그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두 갈래 길에서 좌우를 둘러본 예슬은 오른쪽으로 유유히 길을 거닐고 있는 언니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발자취를 쫓기 시작했다.
인도를 거닐고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지나는 동안, 예슬은 다행히 들키지 않게 예나를 미행할 수 있었다. 물론 예슬이 쫓아올 거란 의심을 가지지 않은 예나 덕도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따금씩 전봇대에 몸을 숨기고 흘끔흘끔 고개를 드러내는 예슬의 행동을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예슬은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그녀에겐 언니의 사생활만이 중요했다.
‘대체 어디서 만나기로 한 건가요 언니? 벌써 약속 시간 여섯 시가 지났는데.’
시간은 여섯 시 일분을 경과하고 있었다. 평소 약속을 중요시 하는 자기 언니가 지각을 할 리 전무했다.
이윽고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예슬은 예나의 곁으로 당도한 누군가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전봇대 앞에서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있던 예나에게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다가온 것이다.
예슬은 혹시 저 사람인가 싶었다.
“예쁘신데 번호 좀.”
“죄송해요… 저 약속이 있어서.”
“…….”
근처에 가서 몸을 숨기고 대화를 들어보니 아니었다. 예나를 근처에서 지켜보던 한 남자가 맘에 들었는지 연락처를 따려고 온 것이었다. 예슬은 초라한 남자의 복장에 설마 언니가 저런 남자를 만나나 불안해했지만, 아니란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말고 정말 예뻐서 그러는데 번호 좀 주세요. 너무 예쁘셔서….”
“…….”
끈질기게 대시를 하는 남자 때문에 난처해하는 예나였다. 싫다고 거부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집착을 하는 남자의 모습에 지켜보던 예슬이 화가 치솟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가방 속에 구비해온 물총을 꺼내려던 예슬이었다.
“죄송하지만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몸이라서 말입니다.”
“…….”
예나에게 대시를 하던 남자의 어깨를 뒤에서 누군가가 잡으며 그리 말을 꺼내온 것이다. 약속한 인물을 만나려고 기다리던 예나의 얼굴이 환해졌고, 물총을 장전하던 예슬의 눈이 커다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