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결정적으로 사건의 결론은 내지 못했다. 세 사람 모두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일이었고, 생명의 고귀함에 감탄하고 행복하기에는 상황이 녹록치 못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리는 것도 꽤나 막막했고 말이다.
‘으아아아 신이시여, 나보고 어찌하란 말입니까!’
줏대 높은 민국도 이런 상황에선 찌질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은별은 돌아가기로 했다. 여기에 계속 있어봤자 아무런 해결책도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허나 마냥 흘러가는 시간에 의지해서 있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서로 방법을 강구해야 했고, 정 안 된다 싶으면 생명을 없애는 것만이….
“미안해 민국아….”
은별이 먼저 돌아간 뒤였다. 예나가 은별을 따라 집으로 가기 전 현관문 앞에서 민국에게 그리 사과했다. 두 여인이 혼란스러워 할까봐 속내를 참고 있던 민국이 예나를 내려다보았다. 예나는 굉장히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
“…….”
민국은 그런 예나의 숙연함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예나의 흑화 소주가 이런 일을 초라한 것은 맞았다.
은별이가 예나에게 눈길도 제대로 안 주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고. 그러나 예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민국이었다. 마음을 받아줄 수도 없으면서 그녀를 곁에 두었던 민국의 탓도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민국은 짐짓 담담하게 예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예나는 돌연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온 손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민국을 쳐다보는 예나의 눈동자. 민국은 대범하게 미소 지었다.
“미안해 할 필요가 뭐가 있어 예나야. 그땐 술 때문에 그랬던 거잖아.”
“…….”
“음, 비록 그 술이 사람 인생을 이렇게 바꿔버렸지만 말이지.”
예나가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인다. 하늘을 보며 턱을 긁적이던 민국이 말했다.
“하지만 전부 너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너무 숙이고만 있진 말아줘.”
“응… 민국아… 미안해….”
“미안하단 소리도 그만하고. 너무 그러면 도리어 제가 미안해집니다?”
다소 현대왕스러운 반문이었다. 늘 알던 민국에게선 볼 수 없던 개구쟁이 같은 말투였다. 예나는 그런 민국의 달래주는 위로에 조금이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윽고 예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민국이었다. 예나가 얼굴을 잠시 붉히면서 그 손길을 맞다가 말했다.
“저기… 민국아…?”
“왜 그래?”
“이런 말하면 좀 그럴 수도 있지만….”
예나는 아까 전 집안에서 세 사람이 논의를 할 때 민국이 거론했던 결정을 떠올렸다.
“정말로… 결혼을 해야 한다면… 할 생각이야?”
“…….”
떨리는 눈동자가 민국을 올려다보았다. 그들 나이, 모두 스물한 살. 이보다 일찍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태반이 스물한 살 때는 현재를 즐기며 살기에 바빴다.
심지어 두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게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국도 아니었다. 일부일처제가 적용되는 나라로서 둘이 결혼을 하려면 중동에 가서… 아니, 그건 둘째치고.
“은별이가 했던 말이 틀린 게 아니라서 결혼 생각은 뒤로 미뤄야겠지만.”
“…….”
“그래도 책임을 지려면 그렇게 하고 싶지.”
예나의 가슴 속에서 묘한 무거움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셋이서 결혼하는 것을 은별이가 허락해줄 리도 없고, 예나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고로 다른 방법을 알아보는 게 좋겠지.”
“…….”
민국의 말에 예나가 보이지 않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예나도 은별과 마찬가지로 소유욕, 집착욕이 강한 여성이었다. 흑화 소주를 마셨을 때 자신의 본능이 나왔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납득되었다. 다만 의식적으로 스스로만 몰랐을 뿐이다.
‘나는 민국이 너만 곁에 있어준다면….’
그래도 예나는 자신이 지은 죄도 있었고, 비단 민국이의 곁에 있는 것만을 바라고 있었다. 질투건 뭐건 어쨌건… 일단 민국이가 자신을 조금이나마 이성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예나는 충분했던 것이다.
“고마워 민국아… 그럼 가볼게.”
“그래. 돌아가서 연락주고.”
“응….”
‘뱃속의 아기 조심하고!’라는 민국의 말에 예나가 사뿐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슬쩍 자신의 배를 만져본 예나는 여전히 자기 뱃속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이윽고 계단을 내려가 자취를 감춘 예나. 한참동안 손을 흔들던 민국은 그제야 손을 내려놓았다.
“…슈밤.”
그리고 이틀이 지나, 그 날이 다가왔다.
“10원짜리로 다 받아 쳐묵어라 파이어인더홀!”
“…….”
“캬하하하하하!”
편의점에서 파이어인더홀을 시전하고,
“정말 나 모르겠냐?”
“서, 설마 자기…?”
“자기라니… 야 이 새끼 너 누구야!”
지나가던 커플에게 홧김에 장난을 쳤다가, 어장관리를 하던 여성에게서 남자의 인생을 구해주고….
“하느님 개새끼야아아아!”
옥상에서 무릎을 꿇고 폭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보며 절규한 그 날 말이다.
“으으으….”
비에 홀딱 젖어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민국은 샤워를 할 힘도 없어서 그냥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곧장 잠에 들었으나… 꿈속에서도 참 여러모로 악몽을 꿀 수밖에 없었다.
‘아빠! 선생님이 아빠 직업에 대해 조사해오라고 했는데 아빠 직업이 뭐야?’
예쁘장한 얼굴의 여자애가 도화지를 들고 와서 그리 묻고 있었다. 꿈속의 민국은 기고만장한 양반다리로 태연히 대답했다.
‘아빠 직업? 움하하하하, 아빠 직업은 달창남이란다!’
‘우와! 아빠 직업 달창남이래! 그럼 엄마 직업은 뭐야?’
‘엄마는 달창….’
‘아니 아니! 아빠 엄마는 두 명 있잖아! 두 명 직업 다 알려줘!’
그때 어느 귀여운 여자애가 다가와서 민국의 팔을 붙잡는다.
‘우리 아빠 괴롭히지 마! 왜 우리 아빠 여자가 두 명인 걸로 괴롭혀?’
‘뭐야 너? 우리 아빠 두 번째 애인의 딸이잖아!’
‘두 번째? 흥! 우리 엄마가 너보다 일찍 나 낳아줬거든? 그러니까 아빠의 첫 번째 아내는 우리 엄마인 셈이야!’
‘웃기시네! 아빠가 사귄 사람은 우리 엄마였어! 너네 엄마는 그냥 어쩌다 보니 아내가 된 거잖아!’
‘…우아아아앙! 우리 엄마보고 어쩌다 보니 아내가 된 거래!’
‘저, 저기 애들아….’
‘흑… 끅…! 아빠! 그 말이 사실이야? 정말 우리 엄만 어쩌다 보니 아빠의 아내가 된 거고 실은 두 번째 아내인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너의 엄마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한 사람으로서….’
‘…아빠! 그럼 우리 엄마는 뭔데? 아빠랑 사귄 사람은 우리 엄마였잖아!’
‘어휴 이 아름다운 아이야, 너의 엄마도 내가 소중하게 여긴 한 사람으로서….’
자식들을 달래느라 노고를 치르는 악몽 속에서… 자식들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서민국은 굉장히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핫’하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 창문의 쨍쨍한 햇볕이 민국의 얼굴을 비췄다. 식은땀을 잔뜩 흘린 민국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백성들의 노화가 얼마나 크면 이런 악몽까지 꾼단 말인가….”
차마 꿈에 대해 내놓을 소감이 없었기에 그리 중얼거리는 것뿐, 민국은 침대에서 나와 휘청이는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쏴아아아아! 샤워기를 곧장 틀고 샤워부터 하는 민국이었다.
“…으아아아아아! 프리더엄!!!!!”
허나 하루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처사에 머지않아 미쳐 날뛰는 민국이었다.
* *
“웁….”
일찍 일어나 가족과 아침 식사를 하던 예나였다. 또다시 일어난 입덧으로 예나는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던 어머니가 이를 보고 물었다.
“또 몸이 안 좋니? 요즘 들어 자꾸 구역질을 하는구나.”
“…….”
멈칫했던 수저를 다시 놀리면서 입가에서 손을 때는 예나였다. 맞은편의 어머니에게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과제가 많다 보니까 조금 몸이 피로해졌나 봐요…. 체한 끼도 아직 좀 있는 것 같고요….”
“그러니? 정 뭐하면 죽을 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고개를 가로젓는 예나였다. 입덧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잘만 먹던 반찬거리들도 이제는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우글거릴 지경이었다. 필시 은별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겠지. 그녀는 현황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지 내심 의문이 들던 예나였다.
다시 수저를 놀리던 도중 저도 모르게 ‘우웁’하고 입덧을 하면서 입가를 가린다. 가만히 식사를 하던 아버지조차도 수저를 잠시 놀리는 것을 멈추고 예나를 쳐다보았다.
예슬이부터 어머니 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자신을 동시에 쳐다보자 예나가 당황하더니 황급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직 체끼가 다 안 빠져서… 그냥 오늘은 쉴게요. 죄송해요 엄마.”
“그래… 그러렴.”
조금 이상하게 쳐다보는 예나의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평소에 자기 관리를 잘하고 남자 만나기를 조심하던 예나였다. 설마 예나가 이런 이른 나이에 남자친구를 만나 그런 짓을 할 거라곤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밤늦게까지 집밖에 있던 날도 365일에서 손꼽을 정도였고 말이다.
“…….”
그러나 그 365일 중 하루에 손꼽히는 날에 그만 임신을 해버린 예나였다. 부모님은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늘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예나가 몸을 돌렸다. 옆에서 얌전히 식사를 하던 예나의 동생, 예슬이가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예나는 자기 상태의 심각함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언니가 이상해요.’
수시로 예나를 관찰하던 예슬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그녀였다.
돌연 어느 날부터 심각해진 얼굴로 예슬이와 놀기를 어려워했던 예나. 단순히 예나가 예슬이를 싫어하게 되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음을 여동생의 촉으로 본능적으로 느끼는 예슬이었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아보는 예슬이었다.
“…….”
어머니와 아버지는 예나를 믿는 만큼 크게 의심을 갖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예나와 가장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예슬은 그 누구보다도 이상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윽고 예슬이 쥐고 있던 유아용 숟가락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제가 확인 해볼 거예요!’
아침 식사를 마친 뒤였다. 예슬은 학교에 가기 전, 직장을 나가시는 아버지를 예나, 어머니와 함께 인사로 배웅해주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나간 뒤 어머니가 예슬을 보면서 말했다.
“예슬아, 학교 갈 준비하고 기다리렴.”
“네 엄마.”
그리고 현관문 앞에서 사복 복장으로 가방을 매고 기다리던 예슬이었다.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예슬은 놓치지 않았다.
“…….”
어머니가 잠시 거실에 가서 볼 일을 보는 사이, 예슬은 이 틈을 타서 예나의 뒤를 소리 없이 쫓아갔다. 이윽고 예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을 때 예슬이 슬그머니 방문에 귀를 기대고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게 없을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응… 민국아….”
잠시 후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슬은 그 대화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콜록 콜록! …아니야, 그리 나쁘지는 않아….”
기침을 하는 언니가 심히 걱정되었지만 예슬은 꿋꿋이 참아야했다. 도와주겠다고 말을 해봤자 예나는 그저 웃으면서 머리만 쓰다듬어줄 것이었다.
“응… 오늘…? 으응… 그럼 저녁 여섯 시쯤에….”
문방구에서 구매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예슬이었다. 오후 오전이 헷갈리던 예슬은 예나가 가르쳐줬던 오후 오전 확인하는 방법을 손가락으로 새면서 곱씹었다.
“응… 그럼 그때 볼게… 으응….”
이윽고 통화가 끊기는 소리에 예슬이 ‘오후 여섯 시….’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예슬아! 어디 갔니?”
예슬은 후다닥 계단을 내려갈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