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88화 (188/369)

188화

<어느 공주의 마법>

입덧 사건이 있던 그 날, 은별은 당장 약국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구매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화장실에서 그것을 체크한 결과.

“…….”

부들부들.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있던 은별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작… 고작 두 세 번이었다. 사귄 지는 몇 개월 됐지만 관계를 맺는 건 일정이 바쁘다 보니 적을 수밖에 없었다. 고로 임신할 확률도 지극히 낮아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강은별.”

아무리 한 번 관계를 맺고 속도위반을 하는 소식은 접해보았다지만, 그 속도위반이 자신에게도 찾아오리라 은별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 고로 은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현실을 일단 회피하려고 했다.

아무리 현실적이고 적극적이었던 은별도 이 순간엔 외면하고 싶은 게 정상이었다. 이윽고 자기 볼을 찰지게 때리고는 화장실로 돌아서서 다시 검사를 해보는 은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맞잖아아아아아아아!!!!!!!!!’

꿈일 거라 생각하고 볼도 때려봤지만 변하지 않는다. 혹시 임신 테스트기가 중국산은 아닌 가 의심도 하였지만 한국 꺼라 명시되어있단다. 도망치려하고, 외면하려 해도, 뱃속에 새 생명이 생겼단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집에는 부모님이 계신 탓에 차마 소리를 지를 수가 없어, 속마음으로 비명을 지르는 은별이었다. 이거… 헤어지고 자시고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다.

* *

끼이익, 쿵!

“언니? 일찍 오셨네요!”

“네… 예슬이는 잘 다녀왔어요…?”

이미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한 은별과는 다르게, 예나는 뒤늦게 약국에서 물품을 구입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유치원을 갔다 온 예슬이가 해맑게 웃으면서 마중했지만 예나는 그런 예슬이와 놀아줄 여력이 없었다. 예슬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예나가 곧장 비껴 지나가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미안해요… 언니 잠시 일 좀 보고 올게요.”

어디까지나 화장실로 가서 볼 일을 보고 온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예슬은 순간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언니가 등에 지고 있는 분위기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식사를 하다 말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부터 뭔가 언니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

그런 예슬이를 뒤로하고 예나 역시 화장실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체크했다. 그리고 임신을 했다는 증거가 확실히 보이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임…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흑화 소주라는, 친구가 준 술을 마시고 이상한 행세를 부렸던 것도 정말이지 수치스럽고 창피할 따름이었다. 고로 오늘 민국이가 결정한 대답에 따라 마음을 준비할 생각도 충분히 하고 있었는데….

‘임…신……….’

떡하니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예나는 쉽게 체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생겼단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보통 생명이 생긴 것이라면 누구든지 기뻐하고 행복해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기를 갖고 싶어 하던 불임 부부나… 결혼을 한 사람들만이 꿈꾸는 것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급작스레 찾아온 생명은 당연지사 도덕적인 여인, 예나조차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민국이에게 어떻게 말해야해…?’

무엇보다 민국이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 것인가 심히 혼란스러웠다. 아까 전 레스토랑에서 느닷없이 입덧을 하던 예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던 민국이었다. 평소라면 짓지도 않았을 그 휘둥그레진 눈이 자꾸만 기억에 떠오르자 예나는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때… 똑똑.

“언니… 무슨 일 있어요?”

“아….”

예나가 황급히 임신 테스트기를 주머니 속에 숨기면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짐짓 부드러운 미소로 예슬이에게 말했다.

“언니는 괜찮아요. 아무 일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되요.”

“…….”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우리 예슬이.”

예나의 말에 예슬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예슬을 안심시키고 다시 화장실 문을 닫은 예나는 등을 기대면서 레스토랑의 일을 회상했다.

‘그러고 보니… 은별 씨도….’

은별도 그때 예나와 마찬가지로 다짜고짜 입덧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설마….

‘…….’

그렇게, 또 다른 폭풍 전야의 시작이 닥쳐오고 있었다.

* *

세 사람이 다시 모인 건 민국의 집에서였다.

“어, 어서 오십시오 두 낭자여.”

“…….”

“…….”

그리고 임신 테스트기로 임신을 확인한 직후였다. 두 여자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민국에게 재차 연락을 했다. 갑작스레 레스토랑을 나갈 수밖에 없던 까닭을 설명해야 했으니까. 은별은 애인답게 연락을 하는 건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반면 예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머뭇거리면서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부터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식사부터? 그것도 아니면….”

민국은 한 쪽 발을 들고 두 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귀여운 듯이 소리쳤다.

“저부터?!”

“오버하지 마.”

“예. 죄송합니다.”

민국은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역시 민국도 아까 전 레스토랑에서 벌어진 그 입덧 사건에 대해 뭔가를 추리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든지 당연스럽게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은별이 민국의 맞은편에 당돌하게 앉아 보였고, 예나 역시도 이번엔 은별의 옆에 앉아 보였다.

한참동안 노려보는 은별이의 눈빛에 민국은 짐짓 헛기침을 하더니 달래듯 말했다.

“은별 낭자. 사람은 스무 살의 얼굴이 마흔 살에 자리 잡는다고 하네. 고로 그리 무시무시한 눈빛을 짓는 건 나중에 나이가 먹어 아줌마가 되면 결코 좋지 못할….”

“군말 없이 본론만 얘기할게.”

드립을 봐줄 의향이 없었다. 은별은 주머니 속에 있던 임신 테스트기를 꺼냈다. 임신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빨간줄 체크무늬에 민국의 말문이 막혔다. 은별은 안 그래도 흑화 소주 사건도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니, 심히 스트레스를 받은 얼굴이었다.

“보이지? 임신이야.”

“…….”

“새 생명을 낳.으.셨.다.구.요. 아빠님.”

날카로운 은별의 고개가 예나에게로 돌아간다. 그것이 신호임을 알았기에 예나도 군말 없이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들었다. 예나의 것 역시 빨간색 체크무늬로… 임신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미안…해 민국아….”

“…….”

모든 게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된 것만 같아, 예나는 전보다 더 많은 죄책감을 느끼면서 사과했다. 하지만 민국은 그 말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바닥에 놓인 임신 테스트기에서 찾아오는 현실감이 어마어마했다.

“…….”

분위기는 냉랭하고, 집안은 조용했다. 은별은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민국을 노려보았다.

“허허….”

“…….”

“…….”

“허허허허….”

당연지사 민국은 허탈한 웃음을 필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이 상황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역시 내 정력은 바퀴벌레의 생명력보다 질기다 이건가? 나의 아들네미도 이걸 그대로 유전받겠군, 훗.”

“…….”

“…….”

“끄아아아아악! 임신이라니이!”

언제 태연했냐는 것처럼 민국은 얼마지 않아 머리를 쥐어 잡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예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민국을 쳐다보았고, 은별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민국을 지켜보았다.

“그래, 임신이야.”

“…….”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구우!”

벌떡 일어난 은별이 대뜸 민국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민국은 차마 그런 은별을 제지할 자신도 없었는지 고개만 앞뒤로 흔들릴 따름이었다.

“어떡할 거야아아!!!! 이 바보똥깨말미잘해삼버터튀김아!!!!!!!!”

“으, 은별 씨…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잠깐 멈추세…!”

곁에 있던 예나가 은별을 제지했지만, 은별도 제정신일 리 없었다. 민국은 그렇게 한참동안 은별에게 휘둘리다가 머지않아 ‘쿳’하고 중2병처럼 웃음 지었다. 그런 민국의 독특한 웃음에 은별이 잠시 흔들던 멱살을 멈추었다. 예나도 은별을 말리던 것을 멈추고 민국을 돌아보았다.

“크크큭… 그런 건가… 큭큭큭큭….”

“…….”

“…….”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마치 얼굴을 손에 갖다 대고 하늘을 쳐다보며 웃으면 어울릴 듯한 웃음이었다. 한참동안 폭소하던 민국이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는 중얼거렸다.“은별아. 예나야.”

“…….”

“응…?”

“결혼하자.”

당찬 민국의 결론이었다.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 있던 은별과 예나 모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민국은 이 결론이 나온 것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상 현실적으로 바람을 피운 게 아닌 이상 두 사람을 임신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10년 동안 나를 보살펴온 소꿉친구 여인과 나를 좋아하는 하나뿐인 여자친구가 동시에 아기를 임신했다는 것. 그것은 즉 슨…!”

“…….”

“그 누구도 놓치지 말고 결혼을 하라는 신의 계시! 더도 말고 더도 말고 두 사람 전부 잡으라는 하늘의 뜨읏!”

“…….”

“고로 우리는 결혼해야 하는 운명. 은별아, 예나야. 결론은 확실하다. 결혼하자!”

예나는 ‘겨, 결혼?’하고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면서 얼굴을 화악 붉혔다. 결혼…. 민국과의 결혼이라면 예나는 몇 번 상상한 적이 있었다.

비록 이처럼 어이없는 도입부를 통해 결혼을 하는 형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혼 이후 자식과 함께 손을 잡고 집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룰루랄라하는 것을 몇 번이고 생각한 적은 있던 것이다. …비록 민국과 은별에게 흑화 소주 건으로 나쁜 짓을 한 예나였지만, 그래도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면 예나 입장에서는….

“자식 교육비는?”

은별이 대뜸 반론을 제기해왔다.

“학교비용은. 집은. 유치원 비용은. 전기세는. 누진세는. 결혼식을 올리는데 필요한 비용은?”

말문이 막힌 모습으로 예나가 은별을 돌아보았다. 그렇다. 은별은 상상에 빠져 사는 또래 여자애들과는 다르게 일단 현실부터 직시하는 여인이었다. 방송을 하면서 돈도 직접 벌어본 적이 있고, 이외에도 경영 관련해서도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은별의 반론에 민국은 팔짱을 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훗. 은별아. 난 이래봬도 파뿌리 TV BJ 랭킹 1위에 거듭나는 막장….”

“그 비제이가 계속될 가능성은?”

말을 하던 민국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비제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정확히 명시된 직업이 아니었다. 고로 언제든지 망할 수 있고,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현재 존재하는 파뿌리 TV가 급속도로 망해버린다면 답은 보나마나 뻔하였다.

“지금까지 모아둔 돈이 조금은 많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넌 나랑만 결혼하는 게 아니란 뜻이지? 그렇다면 부모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 것 같아? 동의해주실 거라 생각해? …쉽게 판단하고 결정할 얘기가 아니라고 바보야!”

민국이에게 결정권을 넘겼던 은별이긴 했지만, 그래도 결혼은 너무 섣부른 것이었다. 심지어 두 여자와 동시에 결혼? 은별이나 예나나 어느 정도 소유욕이 있고 질투심이 강한 여인들이었다.

예나는 은별과는 다르게 겉으로 표출을 하지 않을 뿐, 정작 다른 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소한 부분들도 생각하지 않고 대뜸 결론만 도출하는 민국이 당연지사 은별은 듬직할 리 없었다.

“애초에 우리가, 정말로 아기를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은별의 예사롭지 않은 질문이었다. 민국도 그 말에는 조금 진지하게 반문했다.

“그럼 은별이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

“설마 낙….”

은별이 부리나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냐! 아니라구 바보야!”

정말이지 세 사람 모두 혼란스러운 입장이었다. 은별은 ‘아으으…!’하면서 옷자락을 꽈악 양손으로 쥐다가 소리쳤다.

“몰라…! 나도 모르겠다구!”

뱃속에 이미 자란 생명을 함부로 꺾어버리는 것도 은별은 원치 않았다. 그녀도 결국엔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여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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