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예나는 자기 방에서 열심히 볼펜을 들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똑똑똑하고 누군가가 노크를 해왔다.
“언니, 밥 먹으러 나오래요.”
“응. 알겠어요.”
드르륵. 공부하던 것을 접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예나였다. 그녀는 불현듯 떠오른 것처럼 이마를 만져보았다.
잠을 자기 전처럼 이마가 불덩이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어제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려고 하면 두뇌를 작은 유리조각이 콕콕 찔러대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결국 예나는 이번에도 기억하는 것을 포기하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방문 앞에서 베시시 웃고 있는 예슬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손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가요.”
“네!”
예슬은 평소에 언니를 많이 좋아하는지 예나만 보면 헤벌쭉 웃곤 하였다. 필시 예나가 예슬의 엄마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유치원에서 늘 놓고 가는 물건이 있으면 대신 챙겨주었고,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기죽지 않게 항상 곁에서 거들어주기도 하는 예나였고 말이다.
덜그럭.
“왔니? 자리에 앉으렴.”
“네.”
예나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식사까지 준비한 뒤에 의자에 앉았다. 예슬이는 예나의 옆 의자에 뒤뚱뒤뚱 뛰어가서 앉았다. 예나는 그런 예슬을 보며 미소 짓다가 아버지가 수저를 드는 것을 보고 따라 쥐었다.
“잘 먹겠습니다.”
덜그럭. 그렇게 예나 가족의 평화로운 식사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카운트다운이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
예나는 숟가락으로 끼니를 흡수할 때마다 뇌리 속으로 스파크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예나가 그토록 기억하고 싶던 어제의 기억들로서, 처음엔 무슨 기억들인가 의혹을 갖던 예나의 눈동자는 서서히 커지게 되었다. 이윽고… 덜그럭!
“…….”
“왜 그러니?”
수저를 그만 떨어뜨려버리며 예나가 멍을 때렸다. 아니겠거니, 그럴 리 없겠거니 생각하는 예나였지만… 현실은 다르지 않았다. 어제의 그 일은! 결코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읍!”
예나는 무의식적으로 비명이 쏟아지려는 것을 입을 가리고 간신히 참았다. 예나의 돌발 행동에 의문을 갖고 쳐다보는 부모님. 걱정하는 예슬이.
“언니?”
“아, 아니야… 아니에요 엄마…. 저, 저 잠시 방에 갔다 올게요! 잊고 온 게 있어서…!”
그리고 후다닥 2층으로 뛰어가는 예나였다. 어머니가 차마 붙잡을 새도 없이 말이다. 끼이익, 쿵! 이윽고 방안에 들어온 예나였다. 손을 가리던 입을 떨어뜨린 예나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윽고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하며 예나는 자문했다.
“아니지…? 아, 아닐 거야….”
책상에 있는 거울로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가는 예나였다. 자신의 면면을 고스란히 보게 되자 예나는 그 기억이 절대 거짓이 아님을 체감했다.
“……!”
다리가 풀리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에 상체를 엎드려버리는 예나였다. 얼굴을 묻은 침대에서는 ‘우… 우우….’하는 치욕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설마 친구에게 받았던 그 흑화 소주가 이런 참다한 말로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한 모금만으로 제정신을 잃다 못해 민국의 집에 찾아갔단 말인가?! 그리고 그 집에 찾아가서 어떻게 민국의 몸을…
“으아아앙!”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리는 예나였지만, 그 울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소리를 조절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똑똑똑하고 누군가가 노크를 해왔다. 예나는 눈을 비벼서 눈물을 훔친 다음 방문을 돌아보았다.
“언니? 왜 그래요…?”
“…….”
아무것도 모르는 예슬은 예나의 돌발 행동에 심히 놀란 모양이었다. 예나는 돌연 돌아온 기억에 잠시나마 주체를 못했지만, 이제야 주변이 보이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눈물을 완전히 닦은 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휴지를 쥐었다. 어지간히 망신살이었는지, 코를 푼 예나는 자기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한 다음 방문을 열었다.
짐짓 미소 짓는 예나였다.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
“예슬이는 언니 걱정돼서 왔어요?”
예나의 물음에 예슬이가 옷을 양손으로 꼼지락거리면서 ‘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봐도 귀여운 동생이 아닐 수 없다. 예나는 어머니의 미소를 지으면서 예슬이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니는 이제 괜찮으니까 같이 내려가서 식사하기로 해요. 부모님 걱정하시겠어요.”
“정말… 괜찮아요 언니…?”
예슬이의 새삼 묻는 질문에 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겉으론 태연한 척 굴었지만 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괜찮지 않아… 으앙.’
결국엔 자기 본심은 숨길 수 없는지,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예나였다. 이모티콘으로 따지자면 ㅠㅠ…. 예나는 그저 울고 싶었다.
***
다짜고짜 은별에게 김치 싸대기를 맞던 민국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민국도 기억이 돌아오게 되었다.
‘시발! 내가 정자왕이라니!’
당연지사 민국도 믿을 수 없었다. 급작스레 찾아온 예나가 실은 그런 맘을 품고 있었고… 독을 품고 다가왔었다니! 그리고 민국도 기어코 참지 못하고 흑마법사가 선물해준 정력제를 먹어서!
‘흑마법사님에게 스승의 은혜라도 불러줘야 할 판인데 이거?’
김치 양념이 묻은 얼굴을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민국은 은별의 방으로 향했다. 은별은 침대에 두 다리를 모으고 걸터앉아서 민국을 돌아보았다. 민국은 그런 은별의 시선에 왠지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은별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분노의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음란한 남자….”
“엇흠….”
“나뿐만이 아니라 그 여자까지… 심지어….”
민국의 액체에 온몸이 범벅되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인지, 은별은 수치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결국엔 얼굴이 다시금 붉어져서 황소처럼 씩씩거리는 은별이었다. 눈빛은 이미 독을 품고 있었다. 일단 민국도 정황을 이제 막 파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다가갔다.
“은별아, 일단은 진정하고….”
“오지마! 이 변태킹아!”
침대에 있던 베개를 야구하듯 던져버리는 은별이었다. 정확히 높다란 민국의 코에 적중되었고, 민국은 ‘끄악!’하면서 비명을 지르다가 코를 어루만졌다.
“아이고! 내 잘 생긴 코! 63빌딩처럼 높고 굵은 내 코 부서지게 생겼네!”
“지금 그딴 시시한 드립 칠 때야?!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건데…!”
은별의 말대로 일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아예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완전히 돌아온 상태. 민국이나 은별이나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민국이 현자타임이 돌아온 사람처럼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일단 진정하자. 나도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니잖아? 그 흑화 소주인가 뭐시긴가 마시니까 사람이 확 돌변해버리던데. 그건 은별이 너도 마찬가지였고.”
“으, 으으!”
“어헛! 진정하세요 마님! 흥분은 시간 물어볼 때 대답해주는 용도로 쓰는 겁니다!”
뭐라 뭐라 해도 민국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괜한 흥분이 독이 되는 상태였다. 서로가 타협을 하고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보아야만 하는 때였다.
“…그래, 그 여자….”
민국의 설득대로 신중하려고 노력한 은별이었다. 그러자 이 사건과 관련된… 아니, 이 사건의 주요 원인이자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떠올랐다. 은별은 홱하고 고개를 돌려 자기 휴대폰을 보았다. 예나랑은 번호를 교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락처를 모르고 있었지만, 그건 앞에 민국이 있으니 상관없다.
***
식사를 마친 뒤였다. 예나는 정신적으로 망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돌아오는 기억들, 그때 그 순간의 감정과 쾌락…. 어찌하면 자신이 그런 미친 부르스를 칠 수 있던 것인지 심히 의문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갖는다 한들 이미 지나간 상황. 변함은 없고 이제 그것을 어찌 되돌려야 하는가가 중요하였다.
“언니… 이제 좀 쉴게요. 예슬이도 편히 쉬어요?”
“…….”
평소 때라면 예슬이와 식사를 한 후 예슬이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어주었겠지만, 오늘은 몸 상태가 극심히 안 좋았다. 고로 예나는 방에 돌아가서 편히 쉴 생각으로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쿵.
“휴우….”
지옥 같은 식사가 끝이 나고 예나는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는 걸 느꼈다. 이제 그녀가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 민국과 조우해서….
‘못하겠어… 못하겠어어…!’
두 뺨에 손을 대면서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예나였다. 휴대폰은 책상 앞에 있었으나 차마 들 용기도 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민국이의 얼굴을 어찌 본 단 말인가?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우우우우우웅!
“……!”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책상을 돌아보는 예나였다. 우우우우웅! 휴대폰이…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
천천히 다가가서 번호를 확인하자 모르는 번호…. 하지만 왠지 예감이 안 좋았다. 저 전화를 받았다간 마치 숨고 싶었던 진실에 닿을 것 같았다.
-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받아
휴대폰이 받으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환각이었지만 말이다. 예나는 책상의 휴대폰으로 덜덜 떨며 손을 뻗어 나갔다. 하지만 반복해서 울리는 진동에 결국 질겁하며 두 귀를 가로막고 방구석으로 후다닥 달려가 몸을 숨겼다. 벌벌 떠는 예나였다.
‘못하겠어 못하겠어 못하겠어 못하겠어!’
-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받아
‘못하겠어 못하겠어 못하겠어 못하겠어!’
- 받아!!!!!!
‘못하겠어어!!!!!!’
자신의 내면과 갈등을 벌이던 예나였다. 이윽고 휴대전화의 진동이 끝났다. 그제야 귀를 틀어막던 예나가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다가가는 예나였다. 우우우우웅!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마치 다가오길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 소리에 예나가 화들짝 놀라면서 물러났다. 하지만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서민국]
“…….”
모르던 번호의 위압감과는 달리, 조금은 안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전 모르는 번호는 인상이 괴팍한 그녀의 모습이 연상되었지만… 서민국이라면 전화를 받자마자 일단 자신을 안심시켜주지 않을까? 사건을 만들어낸 원인은 그녀 자체였지만, 그래도 양심이 없게도 그런 생각을 조금은 하게 되는 예나였다.
이윽고 천천히 전화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부착하는 예나였다. 그 찰나 찰나가 1초가 아닌 1년처럼 느껴졌다.
“여…보세요…?”
왠지 모를 설레임 반, 두려움 반의 감정으로 예나가 전화를 받았다. 부디 자신이 아는 그이기를… 예나는 간절히 애원했다.
“이 번호로 해야 받는다라?”
“…….”
“---동 커피점으로 와.”
뚝. 자기 할 말만 하고 끊기는 휴대폰이었다. 심지어 받은 상대는 서민국이 아닌 그 여자였다. 예나는 죄인처럼 공포심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느꼈다. 이윽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예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 보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한참을 생각했지만 답은 없었다. 나가는 수밖에!
“…….”
“…….”
“엇흠….”
그렇게 세 사람은 커피숍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사람이 한적한 커피숍이었기에 세 사람이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기 충분한 장소였다. 예나는 소파에 홀로 앉아 있었고, 맞은편 소파에는 은별과 민국이가 앉아 있었다. 예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민국과 눈이 마주치자 죄인처럼 후다닥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