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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78화 (178/369)

178화

민국에게 심상치 않은 행위를 하려던 예나였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와 더불어 들려오는 어느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진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와야겠어?”

시큰둥한 음성으로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만을 갖는 모습과는 반대로 수중에는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일정을 보낼 민국이었으니까, 그것을 알기에 피로 회복제를 몇 개 편의점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들어가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가만 안 둘 거야 정말.”

무슨 일이 있긴 하되, 그 무슨 일이 결코 은별이 생각하는 일은 아닐 것이었다. 민국은 자신의 사타구니 근처를 깔고 앉아있는 예나를 보다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숨을 끌어 모아 외치려는 민국의 행동을 눈치 챈 예나가 흑화 소주를 거꾸로 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민국의 입에다가 꽂아버렸다.

“으업! 업업!”

마시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민국이었지만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강렬한 취기 냄새와 더불어 속으로 쏟아진 위험천만한 내용물에 또다시 의식을 잃는 민국이었다. 그렇게 발버둥 치던 민국이 다시금 정신을 잃자 예나가 흑화 소주를 본래대로 세우며 침대에서 나왔다.

“…….”

안방 불 스위치를 끈 다음에 문 뒤로 숨는다. 이윽고 ‘웃차, 웃차…!’거리면서 열심히 계단을 올라온 은별이 열려 있는 현관문으로 들어왔다.

“서민국!”

불러보지만 대답은 없다. 민국은 안방에서 기절한 상태였으니까. 후우우우웅~. 씁쓸하다 못해 오싹한 추위의 가을바람이 불어 닥치고, 은별은 이마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치우면서 신발장 쪽으로 발을 들였다. 예나는 한 쪽에 술병을 거머쥔 채 문 틈 사이로 은별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뭐야? 문 열어놓고 어디 있어?”

‘예나 그 여자는?’하면서 덧붙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의식이 있는 예나는 모습을 감추고 대기했다.

“…….”

조용한 거실. 전등불은 켜져 있되 나머지 다른 방들은 하나같이 불이 꺼져 있었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을 민국과 예나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촉이 예리한 은별 입장에서 무언가를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수상한데.”

거실로 넘어갈까 말까를 한참동안 고민하던 은별이었다. 이윽고 신발을 벗고 찬찬히 거실로 진입했다. 최대한 소리 없는 걸음으로 보폭을 좁히 하고 주변을 살피는 은별.

“…….”

예나는 이를 문틈으로 다 훔쳐보고 있었다. 이윽고 화장실을 비롯해 부엌까지 샅샅이 찾아본 은별….

“…….”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을 감지한 것 마냥 은별이가 레이더 달린 눈으로 홱 안방 쪽을 돌아보았다. 예나는 평소 그녀답지 않게 재빠른 동작으로 몸을 숨겼다.

“…….”

안방도 불은 꺼져 있었고, 문도 닫혀 있었다. 아니, 기존 방들과 상이한 점이 있다면 문틈이 조금 벌려져 있단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차이라고 감안할 수도 있겠지만 은별의 촉은 자꾸만 예사롭지 않은 것이라 예고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 경찰에 신고할 준비라도 해야지.’

항상 문제의 대안을 강구하는 그녀답게 곧장 휴대폰부터 챙기는 동작이었다. 이윽고 굳건히 손아귀에 휴대폰을 짊어지고 민국이 있는 안방으로 향한다.

저벅. 저벅. 최대한 소리를 내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녀도 슬슬 긴장이 차오르는 상태였기에 쉽지 않았다. 발에 묻은 땀을 발목의 옷깃으로 닦으며 안방 손잡이를 쥐어 보인다.

“…….”

“…….”

문 뒤에 숨어 있는 예나가 칠흑 속의 눈빛으로 틈 사이를 쳐다보는 가운데, 은별은 손에 쥔 손잡이를 그대로 밀어보았다. 끼이이이이이익…. 녹슨 문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오싹함을 조성한다.

“…서민국?”

이윽고 어둑어둑한 가운데 침대 위에 누군가 있는 것을 발견한 은별이었다. 스위치는 아직 키지 않았으나 실루엣이 정확하게 보이자 은별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서민국은 재차 흑화소주의 위력으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이내 안방의 스위치를 키면서 침대로 한 발자국 걸어 나가던 은별이었다.

“너 지금 여기서… 핫!”

혹시 자기가 오는 것도 깜빡 잊고 잠에 든 건 아닐까 입을 열려던 그녀였다. 불을 키는 순간 이목에 들어온 민국의 모습에 은별은 크게 당황했다.

무의식적으로 몇 발자국 침대 앞에 다다랐던 은별은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살기에 몸을 홱 돌렸다. 끼이이익… 쿵. 은별이 안방으로 완전히 발을 들이길 기다렸다는 듯, 안방 문을 닫으면서 등을 지는 예나였다.

“…….”

“안녕하세요 은별 씨.”

“…한예나.”

은별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침대 바로 앞인지라 더 이상 물러날 거리가 없었다. 뒤를 확인한 은별이 맞은편의 예나를 노려보자, 예나는 ‘후후’하고 깔끔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은별 씨?”

“…네가 한 짓이야 이거?”

이건 마치 범죄의 현장과도 같았다. 한 남자를 밧줄로 묶어서 감금하고 꼼짝도 못하게 해두었다. 이 상태에서는 무슨 짓을 저질러도 범죄에 적용될 것이었다. 은별은 이질적인 기백을 등에 지고 있는 예나의 모습에 한층 긴장했다. 예나는 양손으로 흑화 소주를 품에 안으면서 반문했다.

“네. 민국이는 제꺼니까요.”

“…….”

품에 든 흑화 소주를 비롯해서, 방안 곳곳에 풍기는 강한 술냄새. 은별은 온전해 보이는 표정과는 반대로 그녀가 많이 취했음을 감지했다.

“너…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구나?”

“전 안 취했어요. 그리고 민국이는 제꺼예요.”

마치 소중한 물건을 보듬듯이 흑화 소주를 꼬옥 안는 예나였다. 은별은 대응했다.

“서민국이 어떻게 니꺼야? 웃겨… 지금 술주정 부리려고 이런 짓한 거야?”

“후후.”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다. 마치 예수가 바다를 걷듯이 사뿐한 한 걸음을 내딛으며 예나가 그녀를 호명했다.

“은별 씨.”

“…….”

“저는 당신이 너무 너무 싫어요. 민국이의 소꿉친구는 나인데… 10년이란 세월 동안 함께 해왔는데… 그걸 마치 허송세월처럼 만들었어요. 뿐만 아니라 당신은 제게서 민국의 사랑도 앗아갔어요.”

“…….”

“당신이 뭐가 그리 좋은 걸까? 가슴도 작으면서….”

“가, 가슴 이야기는 하지 마! …뭐하는 거야 지금?! 술 취하니까 완전 정신이 나갔네!”

‘안 취했다니까요?’ 미소 짓고 그리 대응하는 예나였다. 하지만 이미 방금 전과는 달리 예나의 걸음은 묘하게 휘청이고 있었다. 중심잡기가 많이 버거워진 상태였다.

“어쨌든 전 당신이 싫어요.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민국이는 내껀데.”

“…….”

“민국이는 내껀데.”

이것을 마냥 술버릇이라 표현하긴 뭐하리라. 무려 10년 여간을 민국만 짝사랑해온 예나였다.

그가 아플 때 항상 찾아와서 간호를 해주었고, 그가 슬프거나 힘들 때 늘 곁에서 위로를 해주고 어미처럼 보듬어주었다. 그 누구도 그의 필요성이 떨어져서 매정하게 물러날 때 오로지 예나만이 그를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고 격려하였다.

예나는 정말이지 그 누구보다도 민국을 사랑하고 아껴왔던 것이다.

“당신이 빼앗아간 거예요. 당신이 나빠요.”

“미친….”

“그러니까 이제 제가 빼앗을 거예요.”

흑화소주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술! 한 모금이라도 머금는 순간 사람을 맛 가게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이 술주정에서 깨어나면 과연 예나는 오늘 하루를 기억하고 있을 지도 미지수였다.

“안 되겠어 경찰 부를 거야!”

“부르지 못하게 할 거예요.”

은별이 휴대폰을 들어 위협을 가하는 찰나였다. 좌우로 휘청거리던 예나가 금세 은별의 앞에 당도했다. 마치 호러 공포 영화 속의 귀신을 연상케 하는 그 모습에 은별은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랐다.

“꺄악!”

본능적으로 양손을 들어 예나의 가슴팍을 밀친다. 그러자 예나는 하릴 없이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는 모습이었다. 물론 은별도 질겁해서 발에 힘이 떨어져 똑같이 주저앉고 말았다. 책상을 부축하여 가까스로 일어난 은별이 112에 연락을 시도하면서 말했다.

“아무리 네가 서민국을 좋아해도 해도 될 일이 있고 해선 안 될 일이 있어! 오늘 네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거야!”

“…….”

예나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예나가 수중에 쥐어진 술병의 내용물을 또다시 들이켰다.

꿀꺽 꿀꺽…. 아주 시원하게 내용물을 들이키던 예나가 이윽고 그 술병을 처음으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내용물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상태…. 어지간히 취해버린 예나는 경찰에 연락하는 은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뚜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 은별은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앞에 둔 사람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휴대폰을 보았다.

‘대체 언제 받는 거야!’

“예. 여기 --동 경찰서….

“저기…!”

경찰이 전화를 받자 냉큼 소리치려던 은별이었다. 잽싸게 달려온 예나가 그런 은별의 양손을 잡고 압박하면서 얼굴을 들이댔다.

은별은 졸지에 휴대폰을 책상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십니까?’하는 목소리만이 휴대폰에서 선선히 들려오고 있었다.

은별은 그 휴대폰을 긴장 어린 얼굴로 쳐다보다가 예나를 보았다.

“너… 진짜…!”

“…….”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것인가, 술 취한 예나의 꿍꿍이를 알 수 없어 물으려던 은별이었다.

“무슨…!”

“…….”

“읍!”

하지만 은별은 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말을 삼키긴 커녕 또 다른 무언가를 삼키게 되었다.

꿀꺽 꿀꺽… 의도치 않게 들어가는 무수한 내용물. 들어올 때마다 은별의 얼굴에 홍조가 달아오르면서 취기에 정신을 알딸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은별이 그 내용물을 전달받게 만든 예나의 행동이었다.

“아, 안… 읍!”

“…….”

양손을 완강히 붙잡고 꼼짝도 못하게 만든 다음, 예나는 은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 아까 전 마시다가 남은 술병의 내용물을 고스란히 입속에 모은 채로 은별에게 다가간 것이다. 키스를 하는 상태로 은별에게 그 내용물을 그대로 전달해주니… 타액과 섞인 흑화 소주의 액체가 은별의 목 안으로 꿀꺽꿀꺽 타들어가듯 들어갈 따름이었다.

은별은 어떻게든 정신을 바로잡으면서 예나를 밀쳐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예나는 아예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이젠 은별의 양손이 아니라 은별의 허리를 붙잡는 모습이었다. 여자 둘이 키스를 하는 자태! 누가 보면 레즈비언이 아닐까 의심을 살 정도로 섹시하고 야했으나, 은별은 애초에 이런 것을 원한 적도 없었다.

“하아 하아…!”

이윽고 은별이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때었을 때였다. 아니, 정확히는 예나가 힘을 때고 얼굴을 물렸을 때였다. 똘망하던 은별의 눈동자는 어느 덧 흐릿해져 취기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자기 할 말만은 똑바로 기억나는지 은별은 정황 없는 발음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무슨… 짓을…!”

또 한 번 더! 이젠 입속에 담긴 것도 없는데 은별과 키스를 나눈 예나였다. 혀끝과 혀끝 사이에 진득한 타액이 이어진 가운데 얼굴을 멀리한 예나가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선언했다.

“당신이 민국이 꺼라면….”

“…….”

“그럼 당신도 결국엔 제꺼예요.”

은별은 다리가 풀리는 걸 느꼈다. 어느 순간 그녀는 주저앉아 있었고, 평소 그녀의 술버릇답게 온몸의 부위가 성적으로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핫!’하고 짤막하게 신음하던 은별이 가랑이를 꽈악 오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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