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이제 잘 거?”
“그렇지. 오오, 은별찡이 날 생각해서 먼저 연락해줬어! 헠헠!”
“…변태 같은 건 한결 같으시네요. 언제 철드시려나?”
“아마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 왜냐면 난 너만의 변태니까!”
“하아….”
한숨을 내쉬는 건 이제 그녀에게 일상. 그래도 이제 잘 것인지 확인삼아 연락한 은별이었다. 확실히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은별이 민국에게 신경 써주는 나날이 잦아지고 있었다. 비록 사건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사과의 의미로 잘해주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었다.
“그래, 그럼….”
어차피 은별이도 내일은 바쁘겠다, 슬그머니 취침을 준비하려는 찰나였다.
“은별이구나.”
“…응?”
휴대폰 너머로 들려와선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은별이도 알고 있는… 심히 익숙한 인물의 음성이었다. 잠시 그 음성을 곱씹던 은별이 추궁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자 목소리가 왜 그쪽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거죠? 설명해보시죠 서민국 씨.”
“이크.”
민국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쫄릴 일은 아닌지라 당황하진 않았다. 그러나 일이 복잡해 질까봐 말하지 않고 수습하려 했는데, 그만 술에 취한 예나가 자각 못하고 말을 걸어온 것이다. 민국은 예나를 잠시 제제한 뒤 은별에게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나가 술에 취해서 잠시 내 집에 들렸어. 독한 술을 마셨나 보더라.”
“뭐어…?”
은별은 심히 어이없단 음성이었다. 예나는 은별과 통화를 하는 민국을 막연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통화 중인 은별이 질문했다.
“설마 그 집안에서 재우겠단 건 아니겠지?”
“훗. 은별 낭자. 혹시 그런 걸 걱정하시는 거라면 염려 말아도….”
“민국이 나랑은 대화 안할 거야?”
예나가 민국의 한 쪽 손을 양손으로 와락 껴안듯 붙잡았다. 평소답지 않은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통화 중이던 민국은 ‘어억?’하고 당황했다. 휴대폰 스피커로 들려온 예나의 음성을 결코 놓치지 않은 은별이 중얼거렸다.
“취했어… 그것도 제대로!”
은별은 그 누구보다 촉이 좋은 여자. 비록 예나가 다른 여자들에 비해 술버릇이 얌전하다고 하나, 목소리를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은별이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민국에게 말했다.
“현관문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어!”
“어? 은별아? 으어억! 예나야!”
한 쪽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예나의 모습이 마치 취한 은별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은별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면, 얼굴에 홍조가 일지 않아 조금도 취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눈도 초롱초롱하기 그지없어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이젠 민국도 가늠할 수 있었다. 예나는 완전히 취했다는 것을!
“통화 끊났어 민국아?”
“어, 그, 그렇긴 한데 일단 팔 좀…!”
“민국이, 비제이할 때는 그렇게 적극적이었는데. 왜 지금은 아니야?”
예나는 현대왕일 때의 민국을 언급하면서 비교했다. 민국은 가볍게 달래듯이 대답했다.
“예나야. 아무래도 지금 너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일단 내 방에 가서 잠이라도 자는 게….”
“비제이할 때는 그렇게 적극적인데 왜 지금은 아니야?”
넌지시 던져지는 물음은 한 편의 추궁과도 같았다. 하지만 민국은 그 질문에 대해선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 여자들을 대하듯이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면 상처를 받던 예나 아니었던가? 그래서 예나만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유독 배려하면서 행동하는 것이었는데….
“침대까지 안내해줄게. 누워서 한 숨 자고 난 뒤에 대화하자. 예나야, 응?”
“응. 민국아. 나 안 졸려.”
“아니… 졸리지 않아도 내가 보기엔 꼭 자야 할 거 같은데…. 그리고 은별이도 지금 통화하던 중에 뭔가 크게 오해한 것 같아서 풀어야 하고.”
“은별?”
팔을 붙잡고 늘어지던 예나가 사납게 고개를 들었다. 민국은 순간 다른 사람을 본 건 줄 알았다. 일순간 등골을 싸악 지나가는 오싹한 기운에 민국이 말을 더듬으며 호명했다.
“예, 예나야?”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은별.”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중얼거리던 예나가 질문했다.
“은별이 어디가 좋아?”
“…….”
“어디가 좋아 민국아? 응? 어디가 좋은 거지?”
자기 가슴부터 다리까지, 손으로 이곳저곳 만져보면서 계산을 하는 예나였다.
“가슴, 다리, 손, 피부, 어디가 좋은 거야 민국아?”
“예나…님?”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텐데.”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텐데.’
재차 그 문장을 발음하는 예나였다.
“내가 그렇게 되면 민국이는 좋아해줄까?”
‘야 잠깐. 이거 상황이 왠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은데?’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민국이었다. 평소 때라면 예나에게 적극적인 행동을 했겠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방금 전 예나의 눈동자는 분명히 죽어 있었다. 강철남에게 배신을 당해 감정을 잃고 죽어버린 눈동자를 짓던 유이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마치…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한 눈동자였던 것이다 예나는!
“좋아해주겠지 알아 민국이는 착하니까.”
이젠 고개를 숙이고 혼자서 음침하게 중얼거린다.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민국이는 착하니까.”
“예, 예나야!”
예나의 이상한 행동에 소리를 지르던 민국이었다. 돌연 그의 입이 무언가로 막혔다.
그것은 흑화 소주였다. 발꿈치를 든 예나가 곧장 민국의 입에 흑화소주 입구를 꽂아버린 것이다.
졸지에 방심하고 있다가 한 모금 들이킨 민국은 그 순간 정신을 일시적으로 잃어버렸다. 그것을 기회로 삼듯 예나는 마실 만큼 마시라는 듯 흑화 소주를 거꾸로 세우는 모습이었다.
“푸학!”
이윽고 각혈을 토하듯, 입안에 머금던 내용물을 뿜어내며 민국은 그 자리에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본래 흑화소주는 정신을 바로잡고 있지 않은 이상… 어떤 주량 고수든 한 번에 훅가게 만들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나는 팽팽 도는 눈으로 기절해버린 민국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넸다.
“괜찮아 민국아. 기절할 뿐 곧 깨어날 거야.”
최면을 걸듯이 묘하게 울려 퍼지는 웅얼거림이었다. 이윽고 예나의 고개가 현관 쪽으로 향했다. 자신을 들여보낸 뒤 굳건히 잠근 현관문. 하지만 아까 전 통화 내용으로 보아 은별이 찾아온다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
저벅 저벅. 소리 내는 걸음으로 예나는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일부러 열어두는 모습이었다.
***
“으어어 나는 외계 생물체다 으어어.”
괴상한 잠꼬대와 더불어 기절에서 깨어난 민국이었다. 흑화소주의 지독한 위력에 민국은 의식을 차리고도 시야가 흐릿했다.
“어어, 예나… 예나야? 으어 눈이 안 보여.”
좌우를 두리번거리나 그 무엇도 다 흐릿한 잔상처럼 보였다. 갈피를 못 잡고 고개만 움직여대는 민국의 모습에 침대로 서슴없이 올라온 예나가 기어가는 자세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야 민국아.”
“예…나?”
흐릿하던 시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렬한 취기 때문에 머리가 심각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토를 안 한 게 다행이었다. 예나가 침대의 민국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아. 괜찮은 거야?”
그 물음에 대답하기에 앞서 민국은 자기 몸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단 사실을 직감했다. 혹시 흑화소주 때문에 그럴까? 아니, 그것치곤 왠지 손목과 발목이 심하게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어질한 머리를 바로하려 노력하며 손과 발을 확인한 민국이었다.
“!!!!”
경악할 수밖에 없는 민국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예나야… 이거 네가 그런 거야?”
“…….”
쳐다보면서 묻는 민국에 예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잇기도 전에 민국의 가슴팍에 손을 갖다 대는 예나였다.
“불편할까봐 꽁꽁 묶었어. 줄은 창고에서 구했고.”
이건… 마치 영화 속에서 생체실험을 하는 장면과도 유사했다. 침대에 남자를 눕히고 팔과 다리를 끈으로 꽁꽁 묶어서 못 움직이게 한 뒤…. 어찌 됐든 지금 민국이 처한 것이 그 입장이었다.
“예나야 이거 빨리 풀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
“왜?”
설득하기도 전에 말을 가로채는 예나였다. 침대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포박당한 민국을 내려다보는 예나는 여전히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히이익!”
“민국아. 난 모르겠어. 네가 왜 은별이를 좋아하는지.”
술에 의지한 힘은 엄청났다! 평소 숨기던 예나의 진심이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얼굴이야 비슷하지만 가슴도 내가 더 크고 난 소꿉시절부터 너랑 쭉 함께 해온 사이인데. 네가 어떤 물건을 좋아하는지 알고 어떤 취향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알고 어떤 고민을 품고 살아왔는지 알고 있는데 어째서 나보다 은별이를 더 좋아하는 걸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비제이?’라고 하는 그녀였다.
“그거 때문일까?”
“으아 예나야 정신차려!”
“비제이 때문이라면 나도 그걸하면 되는 걸까? 그럼 은별 씨처럼 사랑 받을까?”
이번엔 비제이를 수십 번씩 중얼거리는 예나였다. 평소에 본 적 없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호러 그 자체였다.
‘차라리 유이한테 맞는 게 훨씬 낫겠다!’
유이의 술버릇이 양반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던 순간이었다.
“놓치지 않아.”
“…….”
“놓치지 않아 민국아.”
초점 없는 눈동자로 서슴없이 민국에게 다가오는 예나의 얼굴이었다. 민국은 강렬한 공포에 왈칵 질겁하면서 눈을 찔끔 감았다. 혹시나 ‘거봐, 안에 아무것도 없잖아?’하는 애니메이션처럼 호러를 연상케 하는 행위를 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
할짝. 하지만 그 예상과는 달리 민국은 목덜미의 야릇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느낌의 근원지를 쳐다보자 예나가 혀를 내밀어 그의 목을 핥고 있었다. 민국이 다른 의미로 경악하면서 소리 냈다.
“예나… 으어 거긴 안 돼…. 아니… 왜 그래 예나야! 너 이런 애가 아니었잖아!”
“이 목도. 이 땀도. 이 냄새도.”
예나가 마침내 민국의 배 위에 올라탔다. 아니, 배보단 오히려 사타구니 쪽에 가까운 자리였다. 그곳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예나가 정신을 잃을 대로 잃은 눈동자로 민국을 쳐다보며 웃음 지었다. 그것은 기존의 눈웃음이 아닌, 살벌한 입가의 미소였다.
“다 내 소유물이야.”
“으아악.”
꿀꺽 꿀꺽. 수중에 거머쥔 흑화 소주를 통째로 마시는 예나였다. 아예 내용물을 전부 거덜 낼 작정인 모습이었다. 탁탁! 그때 어디선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