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3P(두 번째 메인 파트)>
“우웅….”
예슬이는 눈을 비비면서 자기 방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레 쉬야가 마려워진 예슬은 문을 열고 1층의 화장실로 향했다.
졸린 마음에 얼른 볼 일을 보고 돌아가려던 예슬은 일순간 느껴진 기척에 ‘으응….’하면서 고개를 복도 쪽으로 돌렸다. 복도 저 편에는 현관문이 있었다.
어둑어둑해서 문이 제대로 잠겨 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필시 자기 전에 언니가 잠근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후우우우웅~.
“…….”
스산한 바람이 바깥에서 불어오는 게 들려왔다. 한참동안 복도를 쳐다보던 예슬은 눈을 비비면서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후우우우웅~.
어둑어둑한 가을 하늘, 스산한 바람이 거리를 휘감기는 가운데 누군가가 조순한 걸음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내일부턴 나도 과제 더미에 쌓이겠구만.”
민국은 내일 일과를 정리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슬슬 학교 시험도 있을뿐더러 많이들 바빠질 때였다. 은별도 오늘 합동 방송을 하긴 했지만 오래하지는 못했다. 대학교 2학년을 준비하는 시기에는 다들 급급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럼 나도 세수나 하고 자볼까.”
야구 동영상 2014를 관람하고 싶은 욕심도 별로 없었고, 오늘은 그냥 피로에 푹 취하고 싶었다. 그 심정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민국은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거실에서 무언가 음침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앵?”
어디선가 느껴지는 기척에 민국은 자연스레 현관문 쪽을 돌아보았다. 화장실의 손잡이를 잡으려던 민국은 그대로 멈추어 섰다. …하늘이 어두워서 잘못 보이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판단하기에는 현관문 너머의 실루엣이 매우 선명했다. 어둑해서 정확히 누구인지 판단은 어려웠지만… 사람인 것은 자명….
‘헐 슈밤 혹시 귀신?’
타이밍에 알맞게 너무나도 오싹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기에 민국은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었다. 하지만 언제고 겁을 집어먹고만 있으랴. 민국은 성큼성큼 현관문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어… 거기 누구 있습니까?”
“…….”
“흑마법사님?”
후우우우웅~.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가을의 바람이 정처 없이 현관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대답을 기다리던 민국에게 누군가가 대답해왔다.
“민국아.”
“어?”
“나 예나야.”
너무나도 조곤조곤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 곱고 청아한 그 음성은 민국이 익히 듣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민국은 대답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간 사고 회로가 중지되었던 것이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가 반문했다.
“예나?”
“응.”
그제야 현관으로 다가간 민국이었다.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열자 그 너머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의 여인이 보였다.
“안녕.”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예나야?”
현재 시각은 밤 열 시. 이제 슬슬 취침을 해야 할 시기였다. 그런 타이밍에 뜬금없이 예나가 방문을 한 것이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그녀의 행동에 민국은 의문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숨기던 예나가 스르륵 얼굴을 보였다.
“안녕.”
“…….”
얼굴도 붉지 않았고 눈도 흐릿하지 않았다. 초점도 양호했으며 정신도 겉으로 보기엔 맑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술 냄새가 민국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예나야, 설마 술 취했어?”
“아니야. 술 아 마셨어.”
분명 ‘안’이라 말해야 하는데 ‘아’로 말했다. 혀가 일순간 꼬여버린 것이다. 하지만 술에 취한 사람이 술 취했다고 할 리 없는 것처럼, 예나는 자신이 발음을 뭉갰다는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민국을 비껴 지나가 거실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안에 들어가도 돼?”
“어, 아… 부모님은? 갑자기 무슨 일이야?”
예나가 신발을 벗고 거실의 원형 의자에 걸터앉았다. 다소곳이 두 다리를 모으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미소 짓는다.
“놀러오고 싶었어.”
“잉?”
“민국이는 싫어?”
예나의 노골적인 물음이었다. 민국은 짐짓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어… 좀 취한 것 같구나 예나야.”
“아니야 술 안 마셨어.”
이번엔 정갈하게 발음하는 예나였다. 하지만 민국은 온순한 자세로 앉아있는 그녀를 보면서 사고회로가 엉망이 되는 걸 느꼈다.
‘뭐냐 이건. 웬 술에 떡이 됐어?’
“예나야. 혹시 집에 가는 게 어려워서 내 쪽에 찾아온 거면….”
“정말 민국이는 너무 착해. 배려도 잘하고.”
민국의 배려 어린 말을 가로채면서 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은 다소곳했고 눈은 웃음 짓고 있었다.
“정말로 좋은 남자야.”
“…….”
“안 그래 민국아? 네 생각은 어때?”
“어? …흠흠! 나도 내가 잘난 건 좀 알고 있지만 서도!”
팔짱을 끼면서 자신 있게 맞장구치는 민국이었다. 비제이로서의 민국도 이젠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행동한들 크게 충격 먹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이윽고 예나가 웃음 지은 얼굴 그대로 손뼉을 짝짝 두 번 치더니 말했다.
“민국이는 정말로 좋은 남자야. 안 그래 민국아? 네 생각은 어때?”
“…….”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반복하는 모양새가 마냥 귀엽다고 느껴지긴 어려웠다. 뭐랄까… 민국의 촉감이 말하길, 현재의 예나에게서 뭔가 범상치 않은 낌새가 느껴진다고 할까? 민국은 일단 그녀의 집에 연락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예나의 수중에 쥐어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예나야… 그건 뭐야?”
“응? 이거?”
민국이 손가락으로 발견한 물건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것을 내려 본 예나가 해맑게 웃으면서 물건을 들어 보였다.
“친구가 준 선물이야. 예쁘지 민국아?”
‘술이구만.’
예나가 들어 보인 물건의 겉면을 확인하는 순간 민국은 확신했다. [흑화 소주]라는 이름이 적힌 술의 포장지가 보였다.
‘사이즈는 양주 급 같은데 소주라니, 신기한 술일세. 심지어 이름은 흑화 소주가 뭐냐?’
여러모로 의혹이 담기는 술이었지만 민국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녀가 쥐고 있는 물건을 봄으로서 오늘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얼추 추측할 수 있었다.
필시 친구라는 사람이 건네준 저 소주의 도수가 굉장히 높았을 테고, 평소 술을 할 줄 모르던 예나가 그것을 마시는 순간 핑 돌아버려서 민국의 집에 찾아온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 예나는 민국에게 술주정을….
‘하지만 술주정이라고 하기에는 양호한 편이구나.’
민국은 어떤 면에선 안심했다. 술에 취하자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는 기색은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술주정을 막 심하게 부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특히 술버릇이 유이라든가 유이라든가 유이라든가… 그 사람과 맞먹었더라면 민국은 징글징글했을 것이다.
“예나야. 취한 거 같으니까 일단 너네 부모님께 연락드릴게. 데려오시라고 말씀드릴 테니까….”
“아니야… 괜찮아.”
“괜찮지 않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게 내가 연락….”
휴대전화를 들어 예나의 부모님께 연락을 하려던 민국이었다. 돌연 민국이 쥐고 있는 휴대폰에 어떤 손이 잽싸게 날아왔다. 그 손은 민국의 휴대폰을 정확히 붙잡고는 완고하게 굳어버렸다.
“손 예쁘다 민국아. 너 손도 예뻤구나.”
“…….”
“괜찮지, 민국아?”
분명 말은 현재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나의 평소답지 않은 손아귀의 힘이라든가… 웃음에서 느껴지는 기백에 민국은 일순간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이윽고 들려던 휴대폰을 주머니 속으로 숨기면서 민국이 웃음 지었다.
“그래… 정 그러면 일단 여기서 자자.”
“응. 민국아. 손 예쁘다.”
‘이따가 화장실에서 연락을 드리던가 해야겠네.’
예나도 고집이 완고한 편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하긴 어려웠다. 민국은 일단 예나를 잠재운 뒤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자고 생각했다.
“예나야. 우선 그 술부터 줘볼래?”
“으응… 민국이도 마시고 싶어?”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 마당에 술을 마실 리 전무했다. 민국은 짐짓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고, 한 번 어떤 술인지 보게.”
“마시고 싶구나?”
“…….”
“마시고 싶지 민국아?”
마치 소중한 보물 대하듯 술을 품에 안고 있는 예나였다. 다른 목적으로 건네받으려고 하면 결코 줄 것 같지 않았기에 민국은 결국 예나의 뜻대로 따라주었다.
“응. 한 번 마셔보고 싶네.”
“알겠어. 찻잔 가져올게 민국아. 기다려.”
“그, 그래.”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민국을 뒤로하고, 예나는 술을 안은 채 쫑쫑 걸음으로 이동했다.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랄한 걸음 솜씨에 민국은 생각했다.
‘뭔가 강하진 않지만 강해 보이는 술버릇일세….’
어찌 됐든 예나의 술버릇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추호도 보여준 적 없는 그녀의 술버릇에 민국은 꽤나 신선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그 많고 많은 찻잔 중에 커피잔을 가져온 예나가 민국에게 건네주며 술을 들었다.
“맛있게 먹어 민국아.”
“어… 그래. 맛있게 먹을게 예나야.”
싱긋 눈웃음 짓는 예나의 모습. 민국은 그녀가 커피잔에 따라준 내용물을 얌전히 내려다보았다. 검은 액체… 딱 봐도 평범한 술은 아녀 보였다.
‘대체 뭐지? 이 술은?’
마치 흑마법사나 제작할 법한 신비로운 술이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결코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기에, 민국은 경계하면서 냄새부터 킁킁 맡아보았다.
‘와! 미친 엄청 독하네!’
그래도 민국은 여러 술자리에 나가면서 주량을 늘린 경험이 있었다. 주량 고수들처럼 폼세를 부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취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할 능력은 됐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민국조차도 이런 술을 마시면 뻑 죽어나갈 것 같았다. 민국은 마시려다가 혀를 내두르면서 웃었다.
“예나야. 이거 생각보다 술이 쎄보이네.”
예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눈웃음 지었다.
“안 마실 거야?”
“…….”
“안 마실 거야?”
왜 반복되는 질문에 강요로 보이는 것일까. 민국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왕 한 잔 받은 거 가볍게 홀짝여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맛이 조금은 궁금했기도 했고, 그래도 취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으니까 말이었다.
“그럼 어디….”
“…….”
이윽고 술을 가벼이 한 잔 들이 켜보는 민국이었다. 물론 마시던 도중 강렬히 스며드는 냄새에 잔을 비우는 건 포기했지만 말이다.
“크으…!”
“…….”
민국은 인상을 찡그리는 것으로 술에 대한 인상을 표했다. 이거… 상상 이상으로 독하다!
“맛 괜찮지 민국아?”
“…….”
어찌나 독하던지 말하기도 껄끄러웠다. 자칫 정신을 놓았으면 한 번에 훅갈 뻔했다. 민국은 속내에서 느껴지는 취기에 정신을 바짝 잡으면서 말했다.
“예나야. 아무래도 이 술은 안 되겠다…. 얼른 이리….”
“그러면 안 돼 민국아. 비울 땐 다 비워야해.”
이윽고 민국이 끝내 못 마신 커피잔의 남은 내용물을 대신 들이키는 예나였다. 꿀꺽하고 삼키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내용물을 집어삼킨 예나의 모습에 민국은 할 말을 잃었다. 얼굴도 붉지 않고, 허연 유리 같은 피부를 유지하면서 예나가 민국에게 눈웃음 지었다.
“더 마실래 민국아?”
“아, 아니야. 됐어.”
강렬히 거부하는 민국이었다. 만일 더 마시면 민국도 완전히 정줄을 놓아버릴 지도 몰랐다. 완강한 거부에 예나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는 가운데, 휴대폰이 진동 소리를 냈다. 우우우웅. 민국의 고개가 자연스레 자신의 주머니 속 휴대폰으로 향했다.
“아, 은별이구나.”
“…….”
민국의 눈길이 휴대폰으로 향해 있길 정말 다행이었다. 만일 예나가 ‘은별’이라는 단어에 반응하여 지은 표정을 보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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