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흑화 소녀>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모처럼 쉬는 날. 아니, 사실상 쉬는 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의 자리를 느낀 은별과 민국은 짬을 내어 커피숍에서 만났다. 커피숍 2층의 둥근 소파가 있는 곳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 이윽고 민국이 고개를 들어 은별을 쳐다보며 반문했다.
“정말 무엇이든 다 되는 것이오 은별 낭자?”
“…한 번 말한 건 어떻게든 지킬 거니까 얼른 말하기나 해. 나도 내가 잘못한 건 아니까….”
은별은 작은 소리로 궁시렁거리듯 대답했다. 어이없는 오해로 심하게 다투었던 어제. 그 날 은별은 민국에게 했던 소리를 심히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오늘 부르자마자 용건을 말하길, 사례로 민국이 원하는 것 무엇이든 한 가지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을 가벼운 미소로 지켜보았다. 은별은 대답은 하지 않고 자꾸만 지켜보자 시선이 몹시 거슬렸는지 눈길을 피하다가 말했다.
“…말 안 하면 일어설 거야. 바쁘다구.”
“어허, 원하는 것 무엇이든 한 가지는 들어주겠다면서 먼저 일어서는 건 뭡니까 은별 낭자? 그러시면 안 되지요.”
“…….”
다시금 자리에 풀썩 앉는 은별이었다. 소파에 있는 근처의 베개를 양손으로 품에 안는 모습. 늘 고집이 쌔고 자존심 있게 행동하던 그녀가 이렇게 을의 관계를 택한 건 처음인지라… 조금 어색하다면 어색했다.
“흐음, 그럼 뭘 시키는 게 좋을까.”
“…….”
턱을 괴고 여유롭게 자기 볼을 검지로 툭툭 건드리며 구상하던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을 조금은 불안하게 쳐다보는 은별. 아무래도 민국이 일반 남자들과는 다르게 이상한 곳에 두뇌가 잘 돌아가는 만큼, 어떤 극악무도한 제안을 할 지 심히 두려웠다. 이윽고 민국이 손뼉을 짝 치더니 검지를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헤어지자.”
“…….”
은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당차게 계단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다. 민국이 ‘으어어 장난이야 장난’하면서 붙잡고 늘어졌다.
“…원하는 게 그거면 해줄게. 나도 충분히 네 맘 이해하니까.”
“농담입니다 은별 낭자. 너무 풀 죽어 있길래 기운 내라고 한 소리여요.”
농담도 실로 위험성이 있는 농담이었다. 이윽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은별을 다시 자리에 앉힌 뒤 진정시키는 민국이었다.
“난 그냥 많은 건 바라지 않고 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어. 너무 감추어 두지 말고 힘든 일 있을 때 오해 안하게끔 얘기해준다던가.”
“…정말 그게 다야? 따로 원하는 건 없고?”
민국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그리고 나도 눈치 없이 일 크게 만드는 건 자제할 테니까. 은별이 네가 걱정하는 건 최대한 배제해야지.”
“치….”
은별은 가볍게 고개를 홱 돌렸다. 민국은 그런 은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 때라면 표정 변화조차 없었을 은별이었지만, 그의 따뜻한 배려가 크게 마음에 와닿았는지 은별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사랑해 은별아.”
“…나도.”
***
그리고 하루가 흘렀다. 민국에게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물어보던 예나는, 다행히 오해가 잘 풀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안도와 더불어 쏟아지는 묘한 실망감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신을 자꾸만 자책하는 예나였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짝사랑을 한다는 건 항상 자신의 마음을 갉아먹는 짓이었으니까.
“아직도 그 서민국인가 뭔가 하는 자식으로 고민하고 있어?”
예나의 동성 친구, 나이도 같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으나 예나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여자 아이. 남자들에게 양다리 걸치기는 일쑤였고 자유분방하며 자신만의 이득을 취하는데 초점을 두는 여자였다. 현모양처 스타일의 예나와는 어울리기 심히 어려운 스타일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대학교 때부터 곧잘 어울려 예나의 고민 상담을 들어주기 일쑤였다.
“…….”
예나는 말없이 고개만 까닥였다. 사람 마음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예나의 동성 친구는 ‘아우~ 진짜.’하면서 말을 이었다.
“내 말 듣고 한 번 뺏어보겠다고 말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모양이야?”
“하지만….”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답답해 못 봐주겠네. 나 같으면 그 시간에 콱! 하고 내 걸로 만들어버렸을 텐데 말이야.”
예나는 말문을 굳게 다물었다. 조금이라도 이 친구를 닮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예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의 교육을 통해 단단히 옹고가 되어버린 도덕심이, 마음속의 양심이 그 행위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제 그토록 심하게 싸워놓고 곧장 화해를 하고 돌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큰 벽을 느꼈다. 그쯤 되면 민국도 헤어질 법한데… 끝까지 붙잡고 있었고 말이다. 은별이나 민국이나 예나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단단한 끈에 이어져 있던 것이었다.
“후아아….”
“…….”
턱을 괴고 이를 지켜보던 예나의 친구였다. 풀이 죽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극도로 안쓰러워 보였는지 책상을 검지로 툭툭 두들기던 그 친구가 입을 열었다.
“이 수단은 쓰려고 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겠네.”
“응…?”
“자. 이거 한 번 봐봐.”
예나의 친구가 학교 가방을 뒤적이더니 어떤 물건을 꺼내놓았다. 예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녀가 꺼내는 물건들을 보고는 당황했다.
“술… 술?”
“그래. 그것도 아주 도수가 높은 술이지.”
학교 가방에 술을 넣고 다니는 것부터 이미 학생으로서의 자세는 어긋났다고 볼 수 있었다. 허나 그녀는 그것도 신경 쓰지 않는지, 책상에 올린 술을 가리키면서 전문적으로 설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 술은 일반 맥주나 소주와는 차원이 다른 술이야. 한 잔 꿀꺽 하는 순간 이성을 잃기 일쑤지. 아무리 절제력이 좋은 어떤 인간이라도 한 번에 취하게 만들 수 있어. 대신 그만큼 간이 많이 피로해지고 다음 날 해장국 열 그릇은 마셔야 정신을 차리겠지만 말이야. 내 삼촌이 술장사를 하는데 이게 그토록 형님들에게 많이 팔린다네? 어때, 끌리지 않아?”
“하, 하지만 그건….”
술을 마셔서 이성을 끊기게 만든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나는 그것도 모르겠을 뿐더러 그런 방법은 결코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 언제까지 그리 죽치고 지켜보기만 할 건데? 이제 좀 빼앗아야 하지 않겠어?”
“…….”
“인생은 원래 뺏고 빼앗기는 거야. 돈도, 술도, 남자도.”
그러며 학생들이 오고가는 테이블에서 예나의 손에 술을 쥐어주는 친구였다. 비록 양심 없고 도덕적인 행위도 물로 보는 친구였지만, 사람과 사람 관계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심리박사였다. 그것을 감안하면 결코 허투루 들을 조언은 아니었다.
“…….”
예나는 마지못해 받게 된 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술은 아직 정식적으로 발매가 되지 않은 술로서, 친구의 삼촌이 따로 제작한 강력한 물건이라고 설명하였다. 그 술의 이름은….
‘흑화 소주.’
이름부터 범상치 않아 보였다.
끼이익, 쿵.
집으로 돌아온 예나였다. 자기 방문을 닫고 공부하는 책상으로 걸어간 예나는 그곳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던 그녀의 이목이 어딘가에 집중되었다.
“…….”
입술을 굳게 닫은 채로 예나는 그 물건에 손을 뻗었다. 수중에 거머쥔 그것은 사이즈가 양주 급인지라 들기가 좀 버거웠다. 이윽고 두 손을 써서 책상에 내려놓은 예나는 수 초 동안 그 양주 급 크기의 소주병을 바라보았다.
[흑화 소주]
과연 저 흑화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에서 붙여진 것인지 예나는 알 수 없었다. 허나 겉면에서부터 드러나는 검은 빛깔의 외부는 뭐라고 할까… 주량 고수들도 감히 엄두를 내기 껄끄러운 기백을 내뿜는다고나 할까?
‘이걸 마시면….’
예나는 기본적으로 주량에 자신이 없었다. 술자리에 가도 물로 대신하기 급급했고, 선배들이 주는 것도 거부할 수 없어 몇 잔 꼴깍 삼키긴 했지만, 도를 지나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끝까지 거부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직 정식으로는 발매되지 않았지만 남녀 사이에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는 ‘흑화 소주’를 손에 넣었다.
‘그냥… 다시 돌려줄까…?’
애초에 자기 술버릇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예나였다. 거하게 마셔본 적도 없는 그녀가 일반 술로는 엄두도 못 내는 도수 높은 술을 과연 마실 수 있을 것인가? 예나는 자신이 없어 그냥 내일 다시 돌려주자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안 되겠어….’
주섬주섬 꺼냈던 양주급 소주를 다시금 가방에 집어넣는 그녀였다. 애초에 이런 걸 공짜로 받는 것도 민폐라 생각하는 그녀였다.
“…….”
그리고 대학 교수님이 내준 문제를 풀이하기 위해 공책을 꺼내는 예나였다. 비록 민국에 관한 건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아직도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눈앞에 있는 공부부터 집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시간쯤 경과했을 때일까?
‘됐다….’
집중하는 스타일답게 쉬는 시간 없이 공부를 마친 예나는 공책을 덮었다. 책상의 작은 시계를 돌아보며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내일 아침 일찍 학교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한 시간만 자유 시간으로 놀고 취침해야 할 것 같았다.
‘민국이는 오늘도 방송했을까…?’
요즘 들어 성실하게 방송에 임하는 민국이었다. 예전 녹화 본을 보니 방송을 너무 게으르게 했다고 하든가… 그 후로 시청자들에게 욕을 완창 먹어서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하루도 빼먹지 않는다는 것 같았다.
“…….”
그가 막장 랭킹 1위로 통하는 비제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심히 놀랐지만, 이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예나였다. 그의 비제이로서의 모습이든 현실에서 예의 바르게 꾸민 모습이든, 결국 민국은 민국이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새파란 하늘, 그딴 거 없는 현대왕입니다.”
역시나 오늘도 방송을 한 모양이었다. 오늘자 녹화 분 영상이 현대왕 방송 홈페이지 밑 칸에 깔려 있었다. 예나는 요즘 들어 남는 시간을 독서에 할애하기 보단, 그의 나온 방송을 꼬박꼬박 시청하는데 몰두했다. 비록 예나의 도덕적인 정체성으로는… 그의 컨셉이 취향에 맞지는 않았지만 많이 적응해가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어떤 방송을 했을까…?’
민국을 짝사랑하는 만큼, 그가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방송에 임했을지, 이제는 흥미를 갖고 임하는 예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일까. 오늘은 그녀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방송을 진행하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모태솔로인 시청자들을 위해 내 여자 친구와 방송을 하기로 했지. 나오시오 암캐.”
“누가 암캐야? …정말.”
“…….”
합동 방송이었다. 불과 어제만 해도 그토록 심하게 싸웠던 두 사람인데, 현재 진행하는 방송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사이 좋은 모습이었다.
“어허, 지은 죄가 있으면 죄인은 숙이고 들어와야 할 터! 어찌 그것을 모른단 말이오?”
“…하아.”
또다시 투닥투닥대며 말싸움을 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속히 연인 관계에서나 볼 법한 사랑싸움일 뿐이었다.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손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
결국, 못 보겠는지 방송을 꺼버리는 그녀였다. 피하고 싶어도, 차마 피할 수 없는 운명. 이런 게 짝사랑의 비극인 걸까? 예나는 무거워지는 마음에 잠시 동안 고개를 내리 숙이고 있었다.
“…….”
그러다 돌연 책상 옆에 놓여 진 가방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유일한 동성 친구. 그녀가 건네주었던 ‘흑화 소주’가 떠오른다.
‘너의 그 성격이 문제라면 차라리 술에라도 의지해봐! 언제까지 도망치기만 할 건데? 그러다가 걔네들 사이 더 두터워진다?’
커플들이 싸우고 나면 사랑이 더 두터워지듯이, 민국과 은별도 매한가지일 것이었다. 그 사실을 오늘자 방송을 통하여 확실히 직감했다. 예나는 이제 도망치느냐 부딪히느냐는 두 갈래 길에 서게 된 셈이었다.
“…….”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나 그녀도 싸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성에 어긋나서 그녀를 망설이게 한다면….
‘차라리… 차라리…!’
이윽고 가방에 있는 흑화 소주를 주섬주섬 꺼내드는 예나였다. 책상에 내려놓은 그것을 얌전히 지켜보던 그녀. 이윽고 흑화 소주의 뚜껑을 개봉하고 부엌으로 가서 컵 한 잔을 가지고 오는 그녀였다.
“…….”
술에 의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이 흑화 소주라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 도수를 지니고 있는가도 확인해야 했다. 예나는 이참에 자기 전에 한 번 그것을 확인해보자고 생각했다.
“…….”
그리고 조심스럽게 흑화 소주의 내용물을 잔에 따라 홀짝여보는 그녀였다.
“!”
그리고 그 순간! 아주 가볍게 홀짝인 것이었으나, 코로 스며드는 독한 냄새와 함께 예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쿵! 그대로 이마를 책상에 들이박고 기절하는 그녀였다.
“…….”
아니, 기절한 것일까? 기절했다기 보단 단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진 듯한 느낌만 들었다. 이윽고 책상에 이마를 박고 엎드려 있던 예나가 입을 열었다.
“프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