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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74화 (174/369)

174화

“미, 민국아…?”

당연히 전후사정을 모르는 예나 입장에서는 급작스레 들이닥친 그 광경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혹을 머금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는 예나. 하지만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예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민국은 오로지 은별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국의 눈매 역시 기존에 볼 때랑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사나워져 있었다.

“시골에 가서 어떡할 건데. 그 자식이랑 만나서 자고라도 올 거냐?”

“하…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지사 민국은 ‘뭐?’하면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은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서민국…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네가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데, 애초에 내가 만나려는 애는….”

“단호하게 말하는 건데 가지 마라. 무조건 안 된다!”

“…또 내 말 끊었어!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 그만해…!”

둘 사이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예나였다. 더 이상 지켜만 보고 있다간 큰 일이 터질 거라 예감한 예나가 잽싸게 다가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은별과 민국은 난데없이 등장한, 익숙한 인물의 모습에 잠시 당혹의 눈빛을 머금는 모습이었다.

“예나야? 너 아까 전에 분명….”

“과, 과자… 슈퍼마켓에서 과자 사러 갔다가….”

손에 들고 있는 과자를 보여주는 예나였다. 당황하는 민국. 은별도 마찬가지였지만 먼저 눈빛을 똑부러지게 한 건 그녀였다. 이윽고 은별이 자기 할 말을 정확하게 피력했다.

“네가 뭐라고 하던 난 갈 거야! 그러니까 말리지도 마! 그리고 내가 만나려는 애는 사람이….”

“뭐? 야 이 여자야!”

“아오! 끊지 말란 말이야 멍충아!”

흥분의 도가니! 서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난 모습이었다. 예나는 살아생전 소꿉친구인 서민국이 이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보았다. 고로 이 상황을 어떻게 중재해야 할 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윽고 민국이 소리쳤다.

“그래. 그럼 한 번 말해봐라. 그놈이 누군데?”

“…듣고 나서 후회나 하지 마. 넌 진짜 실수한 거야.”

은별은 가볍게 호흡을 모았다가 뱉었다. 마치 사막의 총잡이들끼리 심기일전의 결투를 벌이기 전 준비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말했다.

“고양이.”

“뭐라고?”

“고양이 샤리. 바보야!”

사람의 이름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튀어나온 이름은 심히 익숙하지만 의외의 것이었다. 은별이 내뱉은 발언에 민국은 잠시 동안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중재하기 급급했던 예나 역시 또 다른 모습으로 굳어버렸다. 은별이 씩씩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자꾸 얘기하려는데 끊어먹고! 애초에 내가 다른 남자 한 명 만나겠다고 시골까지 내려갈 것 같아? 생각을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했어!”

‘안녕, 샤리야. 잘 지냈어?’

‘냐옹 냐옹!

‘그렇게 내가 보고 싶어? 헤에~ 알았어. 좀만 기다려. 이 누나가 곧 갈게.’

참고로 샤리는 수컷이었다. 전에 민국이 집에 놀러왔을 때 소개시켜주면서 은별은 말한 적이 있었다. 고로 남자인 것은 자명했다.

‘으응, 사랑해~ 나도 너 뿐이야.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아.’

‘냐앙.’

‘너도 해줘야지? 안 하고 뭐해? …헤헤, 그래 나도 사랑해~.’

본래 고양이란 사랑이고 자시고 느끼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기 주인의 목소리가 나오는 전화기가 신기해서 소리를 냈을 뿐, 은별이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은별은 자신의 하나뿐인 고양이가 말대답을 꾸벅꾸벅 해주는 것만으로도 심히 사랑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이랬던 거라고!”

드디어 부풀려졌던 오해가 순식간에 풀려버렸다. 허나 민국은 한 번 품었던 의심을 쉽사리 그칠 수는 없었다.

“왜 그 고양이가 네 집에 없고 시골에 내려가 있냐?”

넌지시 던지는 질문에 은별은 팔짱을 끼면서 대답했다. 그녀의 억양이 조금은 진정돼 있었다.

“…부모 태생이 길 고양이었던 지라 유전적으로 도시에서 살기 험난했나봐. 의사 선생님도 샤리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시골에 잠시 내려 보내는 게 어떠냐고 했어. 그게 길고양이들에겐 최선이라고.”

그리고 은별은 가볍게 콧숨을 내뱉었다. 뜨거웠던 체온이 이제야 좀 식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민국은 여전히 믿지 못했다.

“진짜 고양이라고?”

“그래! 네가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한 거야!”

이번엔 민국이 가볍게 숨을 끌어 모았다가 내뱉는 모습이었다. 만일 그녀의 말이 옳다면 민국이 지나치게 오해해서 싸운 셈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행동들이 신뢰를 떨어뜨리게 한 만큼, 민국은 완전히 납득하고 넘어가긴 어렵다고 느꼈다.

“그럼 지금 네 집에 한 번 가봐도 되냐?”

“뭐?”

“나도 은별이 널 믿고 싶지만, 네가 아까 전에 보여준 행동 때문에 솔직히 믿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니까. 집에 가서 전에 봤던 고양이가 없으면 네 말이 맞는 거겠지.”

은별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민국을 노려보았다. ‘아직도 날 의심하는 거구나?’하면서 중얼거리는 그녀. 하지만 자기 역시도 돌이켜보면 민국을 답답하게 만든 건 맞았다. 고로 그의 선택대로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 따라와.”

“미안해 예나야. 괜히 이상한 일로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사납게 돌아서서 길을 거니는 은별의 뒤를 따르기 전에, 가만히 넋을 잃고 있는 예나를 달래는 민국이었다. 민국의 달램에 예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민국아…. 오해… 꼭 풀렸으면 좋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나는 순간 자신이 가졌던 감정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헤어질 정도로 심각하게 다투던 방금까지의 두 사람. 만일 거기서 누군가 이별을 고했더라면 예나에겐 민국의 빈자리에 들어갈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그만 해버린 것이다.

‘난 나쁜 여자야….’

한 순간, 민국의 갈등이 해소되길 바라지 않고 더 고조되길 바랐던 자신의 바램에, 예나는 자책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길을 거니는 먼 치의 두 사람을 바라보는 예나였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 공간은 없었다.

***

“만일 내 말이 맞으면 넌 제대로 사과해! 난 양다리나 피울 정도로 도덕성 없는 여자는 아니니까!”

“그래. 네 말이 사실이면 내가 지나치게 오해한 거니 정당하게 사과하도록 하지.”

은별은 휴대폰까지 수중에 드러내고 아무것도 누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혹시나 집에 전화해서 부모님께 빨리 고양이를 숨겨 달라 하는 의심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덕성에 대한 자존심은 누구보다도 강철 같은 그녀였으니까.

- 다음에 내리실 역은 ……….

“내려.”

이윽고 역에 도착하자마자 은별이 선두로 내리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렸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간극이 생기는 건 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평소 때는 민국이 먼저 은별을 달래거나 진정시켰는데 이번엔 그런 일도 없었다.

은별은 그런 민국과 현재의 민국을 비교하면서 묘하게 마음이 떨리는 걸 통감했다.

“…….”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말도 없이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은별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은별은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어요 엄마!”

짐짓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활기차게 인사하는 그녀였다. 그러자 은별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면서 인사했다.

“다녀왔니? 어? 민국이도 왔구나?”

“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민국도 예의 바르게 눈웃음 지으며 인사했다. 사실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에게 대처하는 방법일 뿐이었다. 괜히 두 사람이 싸운 것을 티내면서 가족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은별의 아주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민국을 때리려던 때와는 다르게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잘 놀다 가렴.”

“감사합니다.”

“올라와.”

민국만 들리게끔 까칠한 음성으로 옹알거리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은별을 따라 계단을 오르는 민국. 얼마지 않아 은별의 방문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은별이 문손잡이를 잡으면서 민국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말 돌리기 없음이야.”

“은별이 너야 말로.”

평소 때라면 반격도 안했을 텐데, 민국의 그런 말대꾸에 울컥하면서 은별은 문손잡이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드러난 은별의 방 내부! 언제 보아도 참으로 정리 정돈이 잘 된 방이었기에 한 눈에 들어왔다. 민국은 방에 발을 디디자마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은별은 닫은 방문에 등을 기대고 이를 지켜보았다.

“흐음.”

“…….”

마치 범죄가 일어났던 현장을 살피는 형사처럼 이리저리 침대 아래부터 장롱까지 샅샅이 살피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없군.”

“…….”

“없구나 은별이여.”

방에 고양이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은별의 말이 사실임을 서서히 직감하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방문에 기대고 있던 등을 때면서 말했다.

“내 방만 보기 그러면 다른 방들도 보여줄까?”

“아니, 됐다.”

어차피 고양이도 자기 주인의 낌새가 느껴지면 다가오는 법이었다. 고양이의 울음소리도 한 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민국은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은별을 바라보면서 민국은 입을 열었다.

“미안.”

“…….”

과민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곧잘 사과하는 민국의 언동에 은별은 감정이 울컥했다. 이윽고 민국에게서 고개를 돌리면서 은별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내가… 어떻게….”

“…….”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은별은 마음이 많이 옥죄이는 걸 느꼈었다. 억울함이 풀리고 나서야 그 감정이 그대로 토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민국은 천천히 은별에게로 다가가서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은별은 그런 그를 가볍게 밀쳐내려고 하면서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오지 마 바보야….”

“잘못했어. 하지만 나도 많이 참았다고.”

서로가 바빴던 만큼 함께 할 시간도 많이 줄어 있었다. 그 와중에 은별은 민국의 일정에 지장이 가게끔 만들기 싫어 사정을 숨겼었고, 민국은 은별의 그런 행동이 이상했음에도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것이다.

나름대로 서로를 배려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그 결과의 말로가 이것이었다. 민국은 자꾸만 밀쳐내는 은별을 결국 와락 껴안았다.

은별은 그제야 민국의 가슴팍에서 울음이 터지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흑….”

“미안. 정말 미안.”

그리고 은별의 등을 토닥이는 민국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앙금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나, 나도.”

몇 분 후, 어느 정도 진정을 하고 난 뒤였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민국은 옆에 있는 은별이 천천히 꺼내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은별은 차마 부끄러운지 부어 있는 눈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피하면서 사과했다.

“미…안해….”

“…….”

“…나한테 치근대는 대학 선배는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했는데도 계속 대시를 해왔었어. 심지어 우리 학과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선배였던 지라 다들 함부로 할 수도 없었고…. 어쩌다 보니 모임의 리더 자리까지 하게 되어서. 그리고 그 사실을 알면 네가 신경 쓰느라 자기 일도 못할까봐….”

“…….”

“샤리는… 말하려고 했지만 너도 나도 바빴으니까. 어차피 잠시동안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시골에 보내는 거였고….”

“…….”

“말 안한 게…… 오히려 폐가 될 줄은 몰랐어….”

민국이 찬찬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은별의 앞이마를 지저분하게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조금 정돈해주었다. 그 손길을 느낀 은별이 조심스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민국도 말했다.

“확실히, 그 선배 얘기를 이전에 들었더라면 난 부리나케 달려들어서 일만 크게 만들었겠지.”

“…….”

“네가 무얼 걱정했는지 알겠고, 무얼 위해 날 신경 써줬는지 알 것 같아. 나야말로 오해해서 미안해 은별아.”

“…….”

또다시 글썽거리는 은별의 눈동자. 민국은 찬찬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은별이 눈물을 또다시 훔치면서 한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쳐내려고 했다.

“자… 잠깐! 지금 얼굴이 영….”

“괜찮아.”

그리고 화해의 의미로 입술을 맞추는 두 사람이었다. 물론 입술만 맞췄다면 거짓말일 터. 흔들림 없는 시몬스 침대가 곁에 있으니 두 사람은 간만에 새 생명을 낳을 준비를 할 것이었다.

나머지는 상상에 바란….

============================ 작품 후기 ============================

공지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어제 올렸던 두 편이 상당히 문제가 많아서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메인 파트 내용도 다시 준비될 예정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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