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예나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계단을 올라가던 민국이었다.
'이제 폭풍 임신의 때가 왔다. 제군들이여, 포탄을 준비하거라.'
가랑이 사이에 충전되어 있을 무수한 액체에게 예고하며 민국은 흥미롭게 계단을 올랐다.
"으응…. 잠시 바꿔주실래요?"
계단 끝자락을 딛은 도중, 은별의 목소리가 열린 현관문을 타고 들려왔다. 민국은 별로 대수롭게 신경쓰지 않았다.
"안녕, --야 잘 지냈어?"
"음?"
그러나 돌연 이상함을 느끼고 현관문으로 나아가려던 몸을 숨겼다. 민국은 현관문 너머로 빼곡 고개만 내밀어서 내부를 보았다. 거실 내부에서 은별은 누군가와 즐겁게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민국이 예나를 배웅하기 전에 통화를 걸었던 사람 같았다.
'뭐지? 저 말광량이 같은 웃음은?'
허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은별의 확연히 달라진 꽃다운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일반 사람들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은별과 몇 개월을 같이 한 민국은 알 수 있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피어 나는 웃음도, 뭔가 굉장히 예쁘장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어떤 놈이냐? 내가 못 본 은별이의 모습을 짓게 만든 놈이.'
이래봬도 민국도 독점욕이 충만한 남자였다. 은별의 색다른 모습에 당연지사 의문이 생길 수밖에. 은별은 민국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로 말을 이어갔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그렇게 내가 보고 싶어? 헤에~ 알았어. 좀만 기다려. 이 누나가 곧 갈게."
"호오, 동생이란 말인가."
하지만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으응, 사랑해~. 나도 너 뿐이야.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아."
'어억.'
"너도 해줘야지? 안하고 뭐해? …헤헤, 그래 나도 사랑해~."
다시 한 번 확인사살을 하듯 사랑해를 연발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설마 이것이 말로만 듣던 양다리란 말인가? 하지만 은별은 민국도 알다 시피 일편단심 성향의 여자였다. 설마 그런 그녀가 바람을 필까? 그녀를 향한 믿음이 전보다 한층 굳건해졌기에 민국도 오해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신중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민국이 짐짓 당당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휴대폰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은별이 돌아보았다.
"그 여자는?"
"갔다오."
"그래? 둘이 뭔가 수상한 얘기는 안했겠지?"
매서운 눈매로 추궁하는 은별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결코 나쁜 짓을 행할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민국은 자꾸만 그녀의 옆에 있는 휴대폰이 거슬리는 걸 느꼈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어?"
"……."
거실 바닥의 휴대폰이 급작스레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들어 데이트를 할 때마다 자주 울리는 휴대폰. 심지어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항상 연락이 오고 있었다. 민국도 저 번호를 한 두 번 본 게 아님을 본능적으로 짐작하고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번호, 자주 연락오는 것 같은데 스팸 차단 안 했어?"
"하, 할 거야."
은별이 돌연 말을 더듬으면서 휴대폰을 집어든다. 그리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 모습. 민국은 그녀가 말을 더듬는 건 부끄러울 때말고 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 의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한 차례 추궁해보는 민국이었다.
"어흠… 은별아, 근데 그거 진짜 스팸 번호 맞아?"
"…뭐?"
은별이 앙칼진 눈매로 다시금 민국을 노려본다. 민국은 오해는 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치면서 물었다.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야. 스팸 번호 치고는 뭔가 번호가 휴대폰 같아서."
"……."
그의 말에 은별은 천천히 휴대폰으로 고개를 내렸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자주 연락을 걸어오는데도 남자 친구에게 얘기를 하지 않으면 그건 신뢰를 배반하는 행위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이쯤되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볼 만도 했고 말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흡…'하면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우우우웅.
"……."
"……."
또다시 진동이 울려왔다. 이번에도 아까 전 연락을 걸어왔던 같은 번호의 사람이었다. 민국은 그것을 이젠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지켜보았다. 은별은 민국의 분위기를 다소 느낀 듯 잠시 당황하는 안색으로 휴대폰을 허둥지둥 만졌다.
"잠깐만. 일단 끄고 나서 얘기해줄…."
"어디 한 번 누구인지 확인해보자."
"…야!"
학교 같은 과 선배였고, 모임에 섞여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를 만들어선 안 되었다. 괜히 안 좋게 일이 부풀려지는 꼴은 은별 역시 보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같은 번호로 연락이 와도 꿋꿋이 참던 민국이었고, 아까 전 그런 의문스러운 꼬락서니를 봤으니 한 번 누구인지 확인해볼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민국은 담담해진 표정으로 은별의 휴대폰을 가로챘다. 당황하면서 소리치는 은별을 뒤로하고 민국이 통화 버튼을 누른 다음에 귀에 부착했다.
"여보세요."
"어? 그거 강은별 씨 휴대폰 아닙니까?"
들려온 소리는 어떤 사내의 목소리였다. 은별은 아무것도 모르는 민국이 통화를 받자마자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면서 옷을 늘어지게 붙잡고 흔들었다. 그리고는 그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거 빨리 내놔…! 얘기해준다고 바보야…!"
"예. 강은별 씨 휴대폰 맞는데요."
"허, 누구십니까 그러면?"
"그쪽이야 말로 누구십니까. 저 은별이 남자 친구…."
도약해서 휴대전화를 가로채는 은별이었다. 그러자마자 귀에 양손으로 휴대폰을 부착하는 은별. 아무리 질이 떨어져도 선배였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건 어려운 것이었다. 굽신굽신거리면서 은별은 말했다.
"선배…! 제가 이따가 전화할게요!"
그리고 통화를 뚝 끊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홱하고 사납게 몸을 돌리는 은별. 민국도 어느 덧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건 은별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눈싸움을 하던 은별이 사나운 음성으로 물었다.
"뭐하는 거야?"
"너야말로 지금 뭐하는 거냐?"
민국도 평소라면 은별에게 굽신거리면서 비위를 맞춰주겠지만, 이건 연인으로서 신뢰가 필요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도 자기 의견을 피력할 때는 알고 있었다.
"스팸 번호라고 해놓고 왜 남자가 받냐? 그리고 선배라니, 대학교 선배냐?"
"……."
잠시 노려보던 은별은 그 부분에선 말문이 막혔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신중하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스팸 번호라고 한 건 이유가 있었어. 이 선배, 항상 나한테 찝적댔단 말이야. 같은 과에 모임의 리더라서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너한테 말했다가 네 성격에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입 다문 거였어."
진솔하게 말하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민국이 그 말을 쉽사리 믿기는 조금 어려웠다.
"그거 거짓말 아니냐?"
"…뭐라고?"
"후우, 은별아. 내가 보통 이렇게 따지는 타입은 아닌데. 사실 나 아까 전에 네가 누구랑 통화하는 거 봤다."
"……."
은별은 말문을 굳게 닫았다.
"심지어 사랑한다고까지 하더라. 내가 예나를 배웅하는 틈을 타서 말이지."
"그, 그건!"
"근데 스팸 번호라고 말했던 그 남자는 알고 보니 모임에서 함께하는 과 선배 남자고. 지금 내가 널 믿기에는 네가 의심가는 행동을 몇 가지 한 것 같다."
은별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민국은 자신이 하려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너는 내가 그 새끼랑 대화하는 걸 왜 가로채는데? 꼭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로 보이지 않냐?"
"…하?"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은별이었다. 사나워진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강은별!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을 했잖냐 지금. 심지어 아까 전에 시골에 내려가겠다면서 누구 만날 것처럼 굴던데, 그것도 사실 남자 아니냐?"
"미친! 지금 장난해? 진짜 어이없구나 너!"
은별은 울컥했지만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국도 오해가 쌓일 대로 쌓인 터라 자기 할 말을 하기에만 급급했다.
"누군지 몰라도 시골 내려가지 마라. 그놈 누군지 몰라도 만나면 진짜 가만 안 둘 거다."
"……."
열었던 입을 잠시 다물던 은별이었다. 이내 그녀도 그동안 쌓였던 일말의 앙금이 떠올랐는지, 한층 사나워진 음성으로 묻는 모습이었다.
"가만두지 않으면 네가 어쩔 건데?"
"……."
"와~ 정작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만나지 말라니, 어이없어. 애초에 내가 시골에 내려가려는 이유가 뭔지 알아?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의심 받을 행동을 해놓고 그딴 놈 만나겠다고 시골에 내려간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말을 가로채는 민국이었다. 과민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연인 사이의 사소한 오해는 언제나 과한 갈등을 일으키는 법이다. 은별은 다른 말이 심히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그딴 놈…?"
"……."
"지금 그딴 놈이라고 했어…?"
주먹을 불끈 쥐고 바들바들 떠는 모습. 평소 때라면 은별도 이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민국이 칭한 '그딴 놈'은 은별에게 꽤나 소중한 존재였다. 민국은 은별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딴 놈이라는 말이 그렇게 남자 친구를 죽일 듯이 노려볼 정도로 심하게 들렸나 보군."
"핫!"
은별은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가 다시 민국을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서서히 서로 간의 말이 지나치게 독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넌 그렇게 양심적이라서, 여자들 사이에서 뻔뻔스럽게 나 저울질하고 그랬어?"
"지금을 얘기하는 거라면 그건 저울질이 아니지. 예나나 유이 씨, 서라 같은 경우는 그때 사건 때문에 내 책임도 있듯이…."
"웃기는 소리하지마! 네가 정말 나랑 그 여자들을 저울질하면서 비교하던 게 아니라면, 어째서 바캉스 날에 같이 데려간 건데?"
그것은 지극히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민국이나 은별이나, 이전 일, 그리고 오래 전 일에 대한 앙금이 조금씩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캉스에 관한 건은 어디까지나 은별이가 가진 오해였다. 이번엔 민국이 한숨을 쉬게 되었다.
"바캉스에 갔을 때 예나 모습 봤으면 알겠지만 그땐 내가 너한테 완전히 방향을 돌렸단 걸 알려주려고…."
"그런 모습을 굳이 2박 3일인 바캉스에서 보여주시려고 했어요? 참으로 일편단심스러운 남자네요! 하지만 어쩌나? 결국엔 그쪽이 원하던 하렘 계획이 되어버렸네요?"
은별도 이젠 이성을 잃었는지 팔짱을 끼면서 한 쪽 다리를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상처를 받은 것을 그대로 갚아주려는 듯이, 못할 말을 하는 모습이었다.
"실은 애초부터 그러려고 했던 거 아니야?"
"뭐라고 했냐 지금."
민국의 눈빛도 사나워져 있었다. 은별은 순간 물러날 뻔했으나, 곧 비웃음을 그리면서 물었다.
"왜? 이제는 폭력까지 쓰시게요?"
"……."
"아닌 척하면서 여자들이랑 나하고 저울질하고, 몰래 카메라로 사람 마음 장난치고, 그래놓고 이젠 내가 너랑 다른 남자끼고 양다리 치는 여자로 만드는구나?"
"야! 강은별!"
"소리치지마! 나도 못 지를 줄 알아!"
버럭 지르는 민국을 따라 대드는 은별이었다. 사실상 큰 앙금은 아니었다. 그냥 서로 간에 갖고 있던, 신뢰로 버틸 수 있는 가벼운 불만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타이밍 속에서 생긴 불운은 항상 가벼운 불만도 크게 만드는 법. 작은 불씨는 일말의 바람으로 말미암아 산불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갈 거야."
눈을 글썽이던 은별이었다. 애써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참으면서 현관으로 향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의 손목을 붙잡았다. 은별은 완강하게 그를 밀쳐내려고 저항했다.
"하지마!"
"너야말로 시골 내려가서 그 자식인가 뭔가 만나지마!"
이리하여 그런 사투 끝에, 바깥까지 나오고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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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 추천 거의 못 받는다에 한 표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