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그로부터 3주 뒤
민국은 대학교에서 열띤 강의를 듣고 있었다. 바깥에서만큼은 선량한 이미지를 보유해야 하기에 민국은 한 치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볼펜을 쥔 손가락 마디. 이따금씩 볼펜을 원형으로 돌리는 자연스러운 손놀림. 집중하는 시선은 오로지 교수님이 가르치는 칠판으로. 펼친 공책에는 교수님이 적은 글들을 요약하여 얼핏 이해하기 쉽게 쓴 글귀들.
'역시 난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남자.'
민국은 속으로 잘난채를 하면서 쾌재를 불렀다. 실상 잘 생기거나 예쁜 사람들은 다 이런 속내를 품는 법이었다. 주변에서도 민국의 후광 때문인지 공부를 하다가도 그를 이따금씩 쳐다보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윽고 수업이 끝난 뒤였다.
"민국아~ 오늘 친구들이랑 소개팅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러는데 같이 가줄 생각 없냐?"
간만에 남학생 한 명이 민국에게로 다가왔다. 그리 친하지 않은 편이었기에 딱 봐도 용무가 있어 접근한 것이었다. 민국은 짐짓 부드러운 인상으로 대꾸했다.
"미안하다. 나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거든."
"뭔데 그렇게 매번 바쁘냐? 그러지 말고 우리 한 번만 도와줘라. 다른 학교에서도 네 얼굴 다 알려졌단 말이야. 그래서 꼭 소개팅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더라."
외모가 잘나면 결국엔 입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는 터. 아무래도 다른 학교의 여학생들이 민국의 사진을 훔쳐보고는 맘에 들어 접촉을 시도하려는 모양이었다. 민국은 예전이었다면 인심 쓴 사람처럼 한 번 가주겠다고 말을 하였겠지만, 이제 그에겐 거절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말 미안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데려가줘."
"어, 야야! 야!"
민국은 어깨를 툭툭 두드린 다음에 먼저 반을 나갔다. 그런 민국을 별로 친하지 않은 남학생은 애써 붙잡으려고 들었지만, 이미 완강하게 거부한 탓에 붙잡기도 뭐한 터였다. 애초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을 민국도 마냥 좋아할 리는 없었다.
'예나는 오후 수업이라고 했고.'
고로 오늘은 집에 혼자가야 할 터. 어차피 가게 되면 방송에 초점을 두어야 할 판이었다. 하도 방송을 안했다 보니 랭킹도 떨어졌고, 시청자들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민국은 방송에 많이 헌신을 하는 상황이었다. 민국은 이젠 버릇처럼 휴대폰을 들어 한 여성에게 연락을 걸었다.
'앙칼진 여자여, 내 아기씨에 범벅이 되어라.'
마음 속으로 음란한 주문을 외치며 민국은 그녀가 받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연락을 하자마자 들려온 것은….
'지금은 통화 중이오니 다시 연락해주시기 바랍….'
"……."
민국은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통화를 종료하고 걸어보았다. 물론 이번에도 같은 알림이 들려왔다. 딱 봐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흐음, 많이 바빠졌구만."
민국은 하는 수 없다는 것처럼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과제가 많아졌다고 하더니, 과제 풀이를 위한 선후배간의 연락도 짙어진 모양이었다. 민국은 그리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은별이가 일편단심 성향의 여자인 것도 알고 있을 뿐더러, 민국은 이미 그녀를 완연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연락주시오 암캐여]
민국은 그리 문자만 보내둘 따름이었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간 민국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현대왕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리고 열심히 방송을 진행한 지 어연 네 시간. 이제 슬슬 체력에도 고비가 왔겠다 방송을 종료하는 그였다. 똑똑똑.
"엉?"
방송을 종료하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려왔다. 양손을 뒷머리에 두고 남은 시간을 평화롭게 보내던 민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유리로 된 현관문 너머로 보이는 선명한 잔상은,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였다.
"예나야?"
"으…응. …안녕?"
민국은 본능적으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보아하니 예나가 보낸 문자 메시지 하나가 있었다. 방송에 집중하느라 휴대전화를 못 본 것이었다. 머리를 긁적인 민국이 현관문을 열어젖히면서 예나를 마중했다. 예나는 허연색 원피스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 원피스는 성숙함을 어필하는데 충분했다.
"문자 답장 못해서 미안해. 그러고 보니 오늘 약 바꾸러 오는 날이었지?"
"응…. 답장 못한 건 괜찮아. 방송 중인 거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예나도 세 여자만이 알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고로 민국의 의문스럽던 행동들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민국의 또 다른 성격에 대해서는 적응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부담스러워 안 해도 돼. 지금 내 모습도 진짜 내 모습이니까."
"응… 그렇지?"
전에 민국의 완전 딴판인 모습을 보여줬다가 그만 예나를 크게 울려버렸다. 예나가 그토록 울던 것은 민국으로서도 일생일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충격이 좀 컸다.
고로 예나에겐 다른 여자들보다 상냥하게 대해주는 게 낫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윽고 민국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약을 꺼내기 위해 안방으로 향했다.
예나는 어느 덧 안방으로 들어와 민국이 장롱 위에서 007 가방을 꺼내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으랏차차! 자, 여기."
"응. 고마워 민국아."
"아니야. 이건 내 의무잖아."
민국의 책임감 있는 말에 예나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슬쩍 저도 모르게 컴퓨터 쪽을 바라본다. 방금 전 방송이 끝났음을 증명하듯이 민국의 방송용 마이크와 해드셋이 어질러져 있었다. 예나가 조심스럽게 민국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 방송은… 잘했어…?"
"아? 뭐 그냥 그렇지. 늘 하던 거니까 이젠 익숙해."
"그렇구나… 그래도 대단해. 성실하게 무언가에 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예나는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방송이란 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이지 쉽게 돈을 버는 일처럼 보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언가 컨텐츠를 제작해서 진행한다는 건 실상 굉장히 체력을 많이 빼는 일이었다. 마냥 재미로만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상냥함에 씨익 미소 지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으응…."
예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침묵이 오갔다. 평소 때라면 식사라도 한 끼 하고 가라고 말했을 민국이었겠지만, 여자 친구가 생긴 이후로 그런 말은 선뜻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여자 친구를 향한 애정이랄까… 그런 것이겠지.
"…잘들 노시는구만?"
그때 어디선가 난데없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갈 때였는데 아쉽게 놓쳐버리자 예나는 조금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민국과 예나였다. 민국은 급작스레 등장한 익숙한 여인의 모습에 당황했다.
"으아닛? 은별 마님이 왜 지금 이 시각에?"
"왜? 나 없었으면 아주 둘이서 알콩달콩 잘해보려고 했어? 참나…."
열려 있는 현관문으로 들어온 은별은 신발을 벗고 거실에 입성했다. 예나는 말없이 그런 은별을 지켜보았다. 은별은 그런 예나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가볍게 꾸벅 인사하고는 민국을 보았다. 손을 내미는 은별이었다.
"약 줘. 나도 약 다 떨어졌단 말이야."
"호오, 죄송하지만 이 약은 서비스로 제공되는 물품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일종의 대가를 치러야만 받을 수 있는 특수한 제품으로서…."
"일종의 대가로 정강이 때리기 선물해줄까?"
"기다려보십시요. 곧장 갖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의자로 올라가는 민국의 모습에 은별은 '하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예나는 그런 은별을 말없이 쳐다볼 따름이었다. 이윽고 약을 꺼내서 내려온 민국이 그것을 은별에게 건네 보였다.
"자, 받으시오."
"…그래. 나 한 시간 뒤에 다시 집에 가봐야해. 또 과제 있거든."
"교수들이 못 됐구만! 우리 은별양의 눈가에 다크서클을 피게 만들다니!"
은별의 눈가에는 확실히 짙은 다크서클이 깔려 있었다. 이윽고 그 말을 쉽게 못 넘기겠는지 은별이 '다크서클…?'하더니 손거울을 꺼내 자기 얼굴을 살핀다. 외모 관리에도 열심히인 그녀인지라 다크서클은 하나의 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씨익 웃으면서 민국이 느끼한 멘트를 한 차례 쳐주었다.
"괜찮아. 넌 다크서클도 보석처럼 예쁘니까."
"…버터처럼 느끼한 소리하지 말아줄래? 아무튼! 한 시간만 있다가 갈 거야."
"그래, 한 시간이면 사랑을 나누기에 충분하겠군."
이제 속마음을 숨길 필요도 없겠다, 민국은 당당하게 밝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중간에서 지켜보는 예나는 가슴이 자꾸만 저릿저릿한 걸 느꼈다. 아무리…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결국엔 위치란 게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은별은 민국의 여자 친구였고, 예나는 아니었다. 그저 소꿉친구…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닐 뿐. 이쯤에서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옳은 길이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예나는 짐짓 웃음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갈게."
"응? 아니야 예나야. 좀 더 있다가 가도 돼."
"아니야! 생각해보니까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우물쭈물거리면서 물러나는 예나였다. 역시나 현실이란 것은 심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은별도 예나가 집안에 계속 있는 게 영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민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예나를 보내기로 했다.
"그럼 내가 밖에까지 배웅해줄게."
"아,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에이, 그래도 소꿉친구로서 기본 도리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겠어? 기다려봐."
그리고 가볍게 자켓만 옷에 걸치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그런 민국이 자신을 비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가볍게 중얼거렸다.
"아래에서 이상한 일 있으면 죽어."
"이상한 일은 우리 둘에게만 있을 뿐."
협박에 맞서는 민국의 음란한 드립. 이윽고 예나가 조곤한 모습으로 민국을 따라 현관문으로 나섰다. 그리고 천천히 민국을 따라 신발을 신고, 은별을 바라본다. 은별은 또 과제 탓인지 우우웅하고 휴대폰이 울려왔고 '여보세요.'하면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을 미소 지으며 쳐다보다가 예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배웅해줄게 예나야. 나가자."
"응…."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가 바깥으로 나왔다. 사실상 제대로 된 배웅이라고 하기도 뭐했지만, 그래도 단 둘이 되니 사이 좋게 인사하기는 편했다.
"고마워 민국아. 나중에… 또 약 떨어지면 연락할게."
"그래. 나야 말로 오늘 연락 못 받아서 미안해. 다음에는 꼭 받을 테니까 연락해줘."
"응… 고마워."
그리고 깍듯하게 민국에게 인사하는 예나였다. 민국은 그런 예나에게 손을 흔들어준 다음 몸을 돌려 잽싸게 계단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홀로 남은 예나는 쌀쌀하게 부는 가을 바람에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윽고 근처의 슈퍼마켓을 발견한 그녀가 돌연 떠오른 예슬이의 얼굴에 입을 열었다.
"예슬이 과자 하나 사줄까…?"
올 때 맛있는 거 하나 사달라고 부탁했던 예슬이었다. 돌연 그 부탁이 떠오르자 예나는 슈퍼마켓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이윽고 슈퍼마켓에서 과자 하나를 사서 민국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되돌아가던 중이었다.
"만나지 말라면 만나지마!"
"……?"
익숙한 외침이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었다. 예나는 뭔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 둘이 집 앞에서 나와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은별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호통치는 민국을 쳐다보았다. 민국은 은별의 반문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반문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시골 내려가서 한 번 만나고 오겠다는 게 그리 잘못이야?"
쌀쌀한 가을 바람이 불었다. 심상치 않은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