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71화 (171/369)

171화

<대립>

“만날 손을 잡고 애교 부리고 앙탈을 부린다고? 만날 서방님이라 부르고 주인님이라 해준다고? 메이드 복은 언제 입어준다고 했어 멍청아! 자꾸 말도 안 되는 루머 퍼트려서 나 난감하게 만들래?!”

오늘은 강은별과 데이트를 하는 날. 백화점이나 사거리가 아닌, 사람이 우글거리는 마을 시장에 들어와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은별은 해킹 사건이 있던 날, 민국이 지껄였던 발언에 대해 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해킹범 속 뒤집히라고 지껄였던 말이었으나 이로 인해 은별도 영향을 조금 받고만 것이다. 자꾸만 시청자들이 ‘진짜 메이드 복 입어줬어요?’하면서 쪽지를 보내왔었다.

“아니 그럼 메이드 복 안 입어줄 생각이었소?”

“내가 메이드 복을 왜 입어 이 찌질이 변태야! 누가 네 성적 취향에 곧이곧대로 따라줄 거라 생각해?!”

“크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메이드는 맞지 않는 거 같으니 간호사를….”

“뭐든 다 안 돼! 그런 거 해줄 생각 절대 없으니까 착각하지 마!”

단호하게 단결 짓는 은별이었다. 허나 민국은 그녀의 강한 부정에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 팔짱을 끼면서 오히려 태연하게 대처하는 그였다.

“그리 말해도 결국엔 해줄 걸 난 다 알고 있지.”

“…….”

은별은 사나운 눈빛으로 민국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속내를 들킨 건 당연지사. 자꾸만 자신의 속이 훤히 들어다 보이는 듯한 느낌에 은별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흥.”

“훗.”

자신감 있게 웃음 지은 민국이 동네 시장을 거닐면서 은별을 보았다.

“자, 맘에 있는 거 있으면 무엇이든 사시오 은별 낭자. 내 어떤 옷이든 다 사주겠소. 우선 저기 있는 저 촌스런 옷부터 입어보는 게 어떻소?”

“하아…. 내가 무슨 거지인 줄 알아? 너한테 물건이나 사서 받게?”

은별은 이래 보여도 개념녀였다. 절대로 남자에게 호위를 받아서 다음에 문제 생기는 일을 만들지는 않았다. 철벽처럼 보이기도 할 테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사람을 배려하는 그녀의 인간적인 행동이었다.

“…오히려 내가 사줘야겠네. 그렇게 햇볕 받고 있으면 피부 빨리 노화하거든. 자, 이 모자라도 하나 챙겨.”

“오오. 은별이가 먼저 나한테 물건을 사주다니. 내 이 모자는 우리 가문의 보물로 찍어두도록 하지!”

시장에서 고른 모자를 선뜻 건네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그것을 받아 품속의 강아지와 얼굴을 비벼대듯 부비부비거렸다.

서라가 했으면 심히 귀여웠겠지만, 남자인 민국이 하면 아무리 잘 생겨도 변태스러워 보일 수밖에. 은별은 변태를 쳐다보는 눈빛으로 ‘에휴….’하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에 뚜렷하게 반응하는 민국이 결코 나쁠 리는 없었다. 은별도… 실은 민국의 그런 행동이 싫은 것도 아니었고 말이었다.

“고맙소 은별 낭자. 내 이 답례는 아기씨로 하도록 하지.”

“필요 없으니까 고이 보관해두세요. 쓸데도 없는 걸 왜 자꾸 강조해요?”

경어로 가볍게 비아냥거려준 은별이었다. 우우웅. 그때 휴대폰이 울려왔다. 한 번 울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진동하는 걸로 볼 때 필시 연락이었다. 은별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을 바라보았다. 발신자는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은 어느 인물이었다.

“누구야?”

곁에서 지켜보던 민국이 물었다. 다소 진지해진 그의 음성에 은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민국을 지켜보던 은별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의 연락을 거절한 뒤 말했다.

“스팸 연락. 요즘 들어 자꾸 이런 게 오네.”

“헐. 너 혹시 어느 웹하드 사이트에서 추진하는 이벤트에 포인트 받으려고 번호 입력했냐? 문자 인증하고 나면 스팸 관련 문자 휴대폰에 날마다 온다고 이용약관에 써져 있었을 텐데?”

“…너 자꾸 나 음란한 여자처럼 만들래? 안 그래도 너 때문에 요즘 들어 나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청자들 늘어났단 말이야!”

은별도 참으로 요즘 들어 고민이 많아지는 때였다. 민국이 그런 은별의 머릿결을 자연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다른 놈들이 널 음란하게 봐도 난 너 자체를 볼 거니까.”

“…등신.”

“그래, 내가 말로만 듣던 8등신이지. 깔창 꼈으니 9등신인가?”

신발에 착용한 깔창이 몇 센치 정도인지 확인하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그런 민국을 보면서 두근거리는 맘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높아지는 심장 박동수는 은별이를 심리적으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어떻게 날이 가면 갈 수록 이렇게 사람이 좋아지기만 하는 건지 은별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설마 나… 쓸데없이 일편단심이 강한 거 아니야?’

불현듯이 그런 자문까지 할 정도였다. 왜 사람 중에 본질적으로 한 자리에 머무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고, 한 자리에 쭉 있길 바라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만일 그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은별은 후자일 것이었다.

지나가는 남자들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것처럼 생겼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마음은 더 여리여리한 법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어디 갈 건데?”

“흠, DVD방이나 갈까?”

“거길 가느니 차라리 영화관을 가지?”

“어리석군 은별이여. DVD 방은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이 아니야.”

어찌 됐든 결국엔 택하게 된 장소는 은별의 집이었다. 애초에 연인들의 데이트라는 것도 결국엔 장소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다, 산, 길거리, 백화점, 근처 동네. 신선한 변화를 꿈꾸기엔 한국이란 땅이 워낙에 좁았고… 결과적으로 연애라는 건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가장 주됐다.

“오, 네가 말로만 듣던 아킬레스건 최민식이냐?”

“그런 이름 아니라고 했잖아. 샤리라고.”

은별은 품에 안은 고양이, 샤리를 민국에게 보여주었다. 샤리는 눈매가 날카롭고 조금 똑부러진 모습이었다. 근처에서 그것을 쳐다보던 민국이 미소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왠지 성격이 너랑 닮았을 거 같은데.”

“날 닮았으면 좋은 거죠. 얘가 얼마나 똑똑한지 앞가림도 얼마나 잘하는데요~.”

“엇흠, 내 쪽에 와서 한 번 안겨 보거라 샤리여. 나는 네 주인의 주인. 변강쇠라고 한다.”

민국이 양팔을 펼치면서 샤리를 안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은별이 팔을 풀어주자 샤리는 민국에게 안기기는커녕 바닥으로 내려왔다. 민국은 ‘호오’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녀석 역시도 은별과 막상막하를 다투는 암컷이로군.”

“미안하지만 수컷인데?”

“뭐시! 수컷이라고?!”

민국은 은별의 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머물고 있을 수컷 고양이 샤리…. 민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음에 완강하게 엑스 표를 그렸다.

“반댈세. 이곳에서 둘끼리 동거하는 거 반댈세.”

“반대고 자시고 그쪽에겐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도 없거든요?”

“남자친구인데 왜 없어 이 여자야? 애초에 고추를 가진 동물이랑 한 집 한 방에서 같이 잔다는 게 말이 돼? 그러다가 덮쳐지면 어쩌려고! 난 내 여친이 그런 쪽으로 상처 받는 건 보기 싫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얼굴을 붉히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의 표정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난 그 표정이 맘에 들어. 그 수치스럽고도 앙칼진… 하지만 나를 향한 마음을 피할 수가 없는 그 표정!”

“하아….”

은별은 더 이상 상대해봤자 자기만 지친다고 생각했는지 한숨만 푹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컴퓨터가 있는 쪽으로 향해 의자에 앉는다. 전원을 키고 파뿌리 TV에 접속하자마자, 그녀는 현대왕의 방송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사건이 있던 당일의 녹화 방송을 틀어본다.

{현대왕, 가만두지 않겠다.}

“이 사람이 그 해커란 말이지? 내 팬이라 자칭한?”

“팬보단 스토커에 가까웠지. 네 방송 항상 꼬박꼬박 챙겨보는 것 같더라.”

“지금도 방해 들어와?”

“글세.”

민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은별은 그런 민국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면서 추리하는 그녀였다. 적어도 달풍선을 많이 투자했던 팬들은 아니었다.

달풍선을 일정치 이상 투자하게 되면 그 팬은 은별의 방송에서 높은 계급으로 변모하였는데, 그리 되면 존재감이 짙어져서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은별의 방송 컨셉은 친목스러운 분위기였던지라,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팬들은 한 치도 빠짐없이 외우곤 하였다.

“몰래 눈팅하면서 보는 사람인가 보네…. 하지만 정말 내 팬이라면 이런 짓은 하면 안 되는 건데.”

“집착이 심한 팬이야 어디든지 있으니 말이지. 은별이 너도 조심해.”

은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의 지금 충고는 꽤나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었다.

해커들이 주로 좀비pc를 통해서 해킹을 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고전적인 수법은 파일 합치기였다. 하나의 게임과 좀비pc 파일을 합쳐서 그것을 게시판에 올려두거나 메일로 뿌리면, 사람들이 그것을 다운받고 자기도 모르게 좀비pc로 컴퓨터가 침략당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바이러스의 경우 확장자가 exe인 경우가 많고, exe까지 변환할 정도의 뛰어난 해커는 드문 편이었기에 피할 수 있으면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민국이 exe 확장자 파일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고 아무 게임이나 받아서 그런 것이겠지.

“자, 그럼 은별양. 오늘 데이트도 끝물인 것 같은데 이제 남은 건 하나 아니겠소?”

“네. 이제 집에 가세요.”

“어허, 언제까지 튕기기만 할 셈이오? 나 이제 너무 굶주렸단 말이오.”

저돌적으로 대시를 하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은별은 완강히 거부했다.

“내가 너랑 그런 짓을 하면서 놀기에는 시간이 이제 얼마 없거든? 나 과제도 더 해야 해.”

“아닛? 그러면 아까 전 그 시간들을 나는 헛되이 소비했단 말인가?”

민국은 실로 아깝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은별은 그냥 대놓고 무시하면서 컴퓨터 쪽 책상에 과제에 관련된 공책을 펼쳐 보였다. 민국은 원형 의자를 끌고 와 은별의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무슨 과젠데? 나도 도와줄 테니 어디 줘봐라.”

“그쪽은 가만히 있는 게 도움이거든요?”

“뭘 모르시는군. 이 몸이 과제 풀이에 협조를 하면 한 시간 걸릴 일도 30분 만에 뚝딱 끝낼 수 있지. 그럼 나머지 30분은 너와 융합을 해서 아기를 낳을 수 있다 이 말이야.”

새침하게 민국을 노려보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에게 치아가 드러나게끔 미소를 지었다. 은별은 이젠 익숙해졌겠다, 별로 크게 반감도 가지지 않으면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공책을 그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자, 이거야.”

“다행히 나도 아는 거네.”

“푸는데 족히 한 시간은 걸릴 거야. 둘이 같이 한다 해도. 융합은 아마 오늘 무리일걸?”

밤도 늦고 부모님도 직장에서 돌아오시겠다, 과제 풀이를 마치자마자 잠에 들어야 하는 은별이었다. 고로 은별은 절대적으로 민국이가 원하는 그 짓을 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민국은 아무렴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풀고나 가줘야겠네.”

“…그래도 풀겠다고?”

“내 여친의 일인데 못해줄 게 없지 않소?”

민국의 적극적인 행동에 은별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민국이 웃으면서 마주하자 은별이 홱 고개를 돌려 과제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왜? 감동했나?”

“…아니거든?”

“훗. 감동했군.”

“아니라고.”

은근슬쩍 은별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민국이었다. 물론 어깨로 그것을 쳐내면서 완강히 거부하는 은별이었지만 말이다. 우우우웅… 침대의 휴대폰은 여전히 진동을 울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