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유이는 원래 말이 없는 타입이었다. 어떤 급작스러운 위기나 상황이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순조롭게 대처하는 것 같아도 속내로 이렇게 저렇게 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고로 유이는 부엌에서 튀어나온 인물과 더불어 예상 못한 생물체에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그녀가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부, 부엌에서 사람 두 명이 태어났다!”
민국은 최선을 다해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이미 현실적으로 이 상황은 그가 혼자서 타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라는 등을 바닥에 붙인 채로 눈길만 위로 올려 거실의 유이를 보았다. 만세 삼창하듯 양팔을 펼친 채 오버하는 모습으로 굳어버린 민국. 그와 마찬가지로 굳어버린 서라.
그 예기치 못한 현황에서 유독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으아아아앙!”
울음보를 연신 터트리고 있는 아기였다. 서라는 품속에 있는 아기의 울음을 재차 의식하고는 등을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
“지, 진정하라능! 지금 울 상황이 아니라능!”
“으아아아앙!”
“으앙 내가 울고 싶담!”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자 울먹이는 서라였고, 유이의 고개는 자연스레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의문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민국은 움찔거리다가 두 손을 내려놓았다. 이젠 그에게 마지막 비기밖에 남지 않아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네년의 기억을 없애버릴 수밖에! 비기 기억 없애기 술…!”
투다다다닥!
“끄아아아악!”
그대로 고꾸라지는 민국이었다. 도무지 몸싸움으론 유이를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철퍼덕 쓰러진 치로 민국이 신음하는 가운데, 한창 울어재끼던 아기가 민국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빠빠!”
“…….”
유이는 그 목소리에 다시금 거실 바닥의 민국을 돌아보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이제부터 넌 홍길동이야! 난 네 애비가 아니다!”
민국의 마지막 최선책. 하지만 그 말에 울음을 더 터트리는 아기. 민국이 ‘이크!’하면서 후다닥 아기에게로 달려갔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자신의 실수에 아기가 더 울먹이자 결국엔 달랠 수밖에 없었다.
“으아 슴가슴가찡. 혼란의 도가니에여….”
“…….”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서라는 이제 반쯤 포기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아기가 ‘마마!’하면서 서라의 품을 꽈악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민국과 서라가 함께 아기를 달래는 가운데, 유이는 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혼란스럽던 머릿속을 서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기의 얼굴…. 눈매, 피부, 입술, 비주얼부터 왠지 저기 저 두 사람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
그렇다면…. 유이는 자연스레 그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되었다.
“불륜….”
“무슨 불륜이야 슴가왕아! 오해라고! 오해야!”
“오해예여 가슴찡 으헝헝 그러지 말아염.”
유이는 불륜을 극도로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강철남과의 사건 이후, 사람을 가지고 논다는 짓 자체를 도무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이다. 때문에 민국을 일순간 최악의 남자로 이미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민국과 함께 완강히 부정하는 서라의 모습에 유이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후우, 결국 얘기할 수밖에 없겠군요 가슴 씨.”
“…….”
아기의 울음소리를 BGM으로, 민국은 숨기려 했던 오늘의 비밀을 결국 발설하게 되었다. 물론 듣는 동안 유이는 표정 한 구석 변하지 않았다. 비록 머릿속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지만 말이다. 이윽고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잠시 정리를 하던 유이가 고개를 돌려 다시 서라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보았다.
“그럼 저 아기는….”
“그래요. 서라와 내가 흑마법사가 준 알약을 먹고 낳은 아기입니다.”
뽀얀 피부. 7개월에서 1년 사이는 되는 아기였다. 도무지 하루아침 사이에 낳을 수 있는 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흑마법사’라는 인물이 거론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는 지구인에게 정체불명의 존재. 유이의 강인한 공격 자체도 대수롭지 않게 코웃음을 치며 막던 그녀였다. 심지어 자신들을 살려준 구원의 장본인! 그녀가 준 개발 아이템이라면 일반인들에게 불가능한 비상식도 초월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인 셈. 유이는 이에 대해서 무슨 말을 거론해야 할 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유이의 고개가 자연스레 민국에게 돌아갔다.
“은별 씨에겐….”
“어휴! 말하면 안 됩니다! 저 죽어요 이 사람아. 사람 죽는 꼴보고 싶으세요?”
“그래도 말해야….”
“슴가슴가찡! 사랑과 전쟁은 드라마일 뿐 현실에서 실현되면 위험위험해여!”
민국과 합세하는 서라였다. 서라를 잠시 쳐다보던 유이는 입을 닫았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여자 친구에겐 말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말하지 않음으로서 상처 받는 게 있을 것이다. 적어도 유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이 씨.”
“…….”
“…야 이 여자야! 말하면 다 죽는다니까! 끝이야!”
크게 노하면서 소리치는 민국이었으나, 유이는 기존에 강철남에게 배신 당했던 흔적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 싶은 맘이 굴뚝이었다. 이윽고 유이가 몸을 돌려 현관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아직 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려 한다는 건 딱 봐도 은별에게 연락을 하려는 셈 같았다. 아기가 울음을 지속해서 터트리는 가운데 민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유이에게로 달려들었다.
“슈밤! 너 죽고 나 죽자! 비기 가슴 만지…!”
투다다다다닥!
“인생 씨버얼….”
바람처럼 날아서 쓰러지는 민국이었다. 처참한 몰골로 쓰러지는 그의 모습을 유이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런데 돌연 그 순간이었다.
“꺄아아~.”
“……?”
“읭?”
연거푸 울음 짓던 아기에게서 해맑은 웃음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심지어 손뼉까지 짝짝 두 번을 치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그 신선한 모습에 당연지사 유이의 고개도 아기에게 돌아갔다. 서라는 품에 있던 아기가 진정을 하자 그제야 미소를 피웠다.
“됐다능! 드디어 미션 컴플렉트했음!”
“꺄아아~.”
“온니짱 맞는 거 보고 좋았나 봐영!”
민국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유이는 해맑은 웃음의 아기를 계속해서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아기가 유이 쪽을 보면서 다시금 손뼉을 치면서 웃어댔다. 그러자… 심쿵!
“……!”
아기의 얼굴을 보긴 했으나 정면샷으로 대놓고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당연지사 아기에 대해 면역력이 떨어지던 유이로서는 심장에 그대로 정신적 쇼크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쇼크가 나쁜 것이라 하기에는 다소 뭐했다.
“…….”
현관으로 향하려던 유이의 몸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라가 ‘읭…?’하면서 이번엔 유이의 언동에 의문을 표하는 가운데, 유이가 저벅저벅 아기에게로 다가갔다. 앉아있는 서라의 품속 아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 마찬가지로 몸을 숙이면서 앉는 그녀.
“꺄아꺄아!”
“…….”
유이는 마치 지구상에서 볼 수 없는 신비한 생물체를 본 것 마냥 흥미로운 눈동자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 60억분의 1에 가까울 만큼 환상의 비주얼을 가진 아기였다.
지나가는 스무살 처녀조차 사랑에 빠지게 만들 만큼 얼굴이 예쁘고 아름다웠다. 만일 아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듣게 되면 크게 실망해서 자살할 지도 몰랐다!(?)
“…….”
“예, 예쁘졍?”
서라가 품속의 아기를 가볍게 흔들면서 보여주었다. 아기는 대뜸 코앞에 있는 유이에게로 손을 뻗고 있었다. 유이는 새하얗고 작디작은 아기의 손아귀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꺄아~♥”
“……!”
유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평소 유이에게서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진정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자만이 짓게 할 수 있는 얼굴! 유이는 심장 박동수가 서서히 높아지는 가운데,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꾸욱 잡고 위아래로 흔드는 아기를 보았다. 웃고 있는 얼굴이… 웃고 있는 얼굴이….
“……♥”
유이는 저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런 유이의 얼굴을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서라로서는, 면전에서 보는 그녀의 다양한 표정에 신선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신음하면서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서 일어나는 민국이었다.
“크어어….”
“…….”
“아무튼… 안 된다 이겁니다…. 말하면 죽는다니까요.”
휘청거리면서 일어나는 민국. 그에겐 이 건에 대해 은별에게 추호도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민국의 소리를 듣긴 들은 건지, 유이가 홱하고 사납게 몸을 돌려 민국을 보았다.
서라가 다시금 분위기가 사나워진 유이의 뒷모습에 눈을 크게 뜨는 가운데… 민국이 힘빠진 눈길로 유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투다다다다닥!
“으어어어어어어어억!”
“…….”
투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으아아아아아아악! 내 살과 살이 찢겨지는 아픔이다아아아!”
절규를 지르면서 천장을 향해 높이 날던 민국이었다. 높이 날던 새가 추락할 때는 정말이지 처참하다고… 민국은 이제 끔찍해진 몰골로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또다시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는 아기.
“꺄아아!”
“…….”
유이는 보다 날세게 발차기를 날렸던 만큼, 이마에 땀 한 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스윽 소매로 훔치면서 유이는 아주 희미하게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웃는 아기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민국이 희생당한 것이다.
“…….”
서라는 이젠 말없이 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금 품속 아기에게로 몸을 숙인 유이. 아기는 유이에게 이제 완전히 호감이 가는 듯 두 손까지 뻗고 있었다. 서라가 그런 아기의 행동에 ‘의잉?’하다가 물었다.
“만져보고 싶으셈여?”
“꺄앙.”
“슴가슴가찡! 아기가 슴가찡의 푹신함을 느껴보고 싶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영?”
“…….”
아기와 몸을 밀착하는 것은 생전 처음인 터. 비록 이성적인 상대도 아니었고, 나쁜 맘을 먹기에는 너무나도 어렸던 아기인지라 괜찮았지만, 그래도 접촉하는 것엔 조금 망설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꺄아!”
하지만 해맑은 함박웃음을 보는 순간 그 염려도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유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고, 서라가 ‘그럼 잠시 맘마 품에서 떨어지는 거예여?’하면서 아기를 설득하고는 유이에게로 건넸다.
유이는 마치 소중한 다이아몬드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아기에게로 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민 두 손으로 소중히 아기를 붙잡고 끌어 당기자, 아기는 좋다는 듯 유이의 목덜미를 작은 손으로 안았다.
“…….”
“꺄아앙!”
“…….”
마치 작고 온순한 강아지 같은 모습이다. 아니, 어느 귀여운 강아지도 이 아기의 귀여움은 감히 흉내할 수 없을 것이다. 유이는 박동질치는 심장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하며, 품에 안은 아기를 막연히 내려다보았다. 유이의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아기였지만 그 힘도 너무 약해 마냥 보기 좋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예쁘졍?”
“…….”
서라의 물음이었고 유이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서라와 유이만이 알 수 있는 공감성이 싹트고 있었다. 그건 바로… 아기가 무지하게 귀엽다는 사실! 심지어 민국과 서라의 피가 싹튼 아기였으니… 아무리 민국이 또라이라도 얼굴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맘마!”
“헤헤, 여기 있당깨여. 걱정 말랑깨여.”
서라가 웃으면서 아기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민국은 다시금 ‘끄어억’거리면서 좀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말하면 안 된다 끄어어 말하게 둘 수는…!”
“…….”
이윽고 되살아나는 민국의 기척에 곧장 몸을 돌린 유이였다. 슬슬 부활하던 민국은 정면에서 공격 태세를 취하는 유이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 부활하면 무적 3초간 존재합니다 유이 씨!”
“…….”
투다다다다다다닥! 다시금 천장을 높이 나는 민국이었고, 이젠 옷까지 넝마가 되어버린 몰골이었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기절해버린 그의 모습에 아기는 ‘꺄~.’하며 손뼉치고 좋아했다. 비록 사람이 천장을 나는 게 신기하고 재밌어서 웃는 것이었으나 말이다.
“…….”
유이는 내심 흐뭇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