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서라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는 분유병을 쪽쪽 빨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이미 부모의 미소로 쳐다보는 서라를 뒤로하고 민국은 창고를 뒤적거렸다. 이내 물건들을 찾은 민국이 그것들을 상자 통째로 가지고 와서는 거실에 내려놓았다.
“으랏차차차!”
“오메, 온니찡 그 상자는 뭘깝셔?”
“엇흠. 한 번 맞춰봐라. 뭘 꺼 같냐?”
민국은 당당하게 허리에 두 손을 얹으면서 물었다. 서라는 먼지 묻은 그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소리쳤다.
“정답! 시체 유기!”
“내가 조선족이었다면 정답이었을 터! 허나 틀렸다 와이프여!”
그리고 민국은 ‘이것은!’하면서 상자를 붙잡았다. 이윽고 입구 쪽을 열면서 소리치는 그였다.
“내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추억의 장난감이다!”
“우와아앗! 온니찡 바비인형도 갖고 놀았어여?”
상자 안에 가득 담긴 것은 민국이 어릴 때 자주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었다. 레고를 비롯해서 인형, 로봇, 정말 갖갖이 다 들어 있었다. 민국은 바비 인형을 잡고 놀라는 서라의 모습에 소리쳤다.
“주로 부카게에 사용했지.”
“킁킁… 핫 바비 인형 머리카락에서 밤꽃 냄새가!”
어찌 되었든 화제는 다시 장난감으로 돌아간다. 서라가 물었다.
“대뜸 이것을 왜 꺼내셨데여?”
“내가 이걸 꺼낼 이유가 뭐가 있겠냐? 너도 네가 기저귀 찼을 때를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알겠지만 아기들은 장난감을 무척이나 좋아한단 말이지.”
확실히 민국의 말대로 서라가 안고 있는 아기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상자에 가득 담긴 장난감들이 어지간히 흥미를 쏟게 만든 모양이었다. 민국은 피식 미소를 머금으면서 자신이 예전에 아끼던 로봇을 하나 건네주었다. 물수건으로 먼지를 전부 닦아낸 뒤 말이었다.
“꺄아아~~.”
“좋냐?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남자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구나 자식.”
남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화려한 장난감도 곧잘 다룰 줄 아는 아기였다. 허나 그것은 단순히 아기가 민국의 사내 유전자를 이어받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왜냐면 서라 역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바비 인형을 비롯해서 남자들이 자주 갖고 놀던 레고 박스로도 지지 볶고 싸우며 놀았으니까.
“온니짱. 난 오늘 진심으로 온니짱이 새롭게 보이네여. 온니짱이 이렇게 센스가 넘치는 남자일 줄은 몰랐어여. 늘 변태적 센스만 높은 닝겐인 줄 알았는데 말이에여!”
“이것이 바로 반전 매력이라는 거다 인석아. 이쯤 되면 이제 너도 나한테 홀딱 반하겠구나?”
“어멋! 슴가 떨려!”
아기 용품도 구매했고 식사도 마쳤겠다, 이제 하루의 남은 계획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자신들의 유전을 고스란히 받은 이 아기와 즐겁게 노닥거리는 것만이 남았다. 비록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함께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1일 부모로서 좋은 됨됨이를 보여준다면 그것도 좋은 추억이 되리라.
“받아라. 이건 레고라는 거란다.”
“갸아.”
“어헛, 먹으면 안 돼 인석아. 무엇이든 주워 먹으려는 거 보니 서라 유전자를 물씬 받긴 했나 보구나.”
장난감을 물수건으로 일일이 씻으면서 건네주는 민국이었다. 아기가 아무거나 집어서 입에 물려고 하자 완고히 막으면서 말이었다.
아기들은 어릴 때 무엇이든 깨물어서 확인해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자칫해서 기도라도 막히면 정말 끝장이다. 그전에 버릇을 확실히 만들어주는 게 좋다고 민국은 예전 육아 교육으로 배운 적이 있었다.
물론 인터넷에서 노닥거리다지만….
“온니찡이 잘 모르시나 본데 지는 1살 때 3개 국어를 배웠구만유! 주워 먹는 짓은 행님에게 유전 받은 듯!”
“네가 3개 국어를 한다고? 어디 뭘 하는 지나 말해봐라.”
“충청도어 제주도어 서울어!”
서라도 민국을 도와서 상자의 장난감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장난감을 내려놓을 때마다 아기는 즐거운 듯 거실 바닥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만져댔다. 그러다가 자칫 몸에 안 좋은 실수를 하려고 하면 민국이나 서라가 한 번씩 나서서 제제했다. 이것은 나쁜 짓이라면서 민국이 눈을 보고 가르치는 모습에 서라는 미세하게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민국은 굉장히 잘 생겼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굉장한 노력파다. 노력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적은 없지만, 항상 혼자 있을 때 공부는 기본이요 자기 능력을 투철히 쌓아가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은별이와 비슷한 과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민국은 아기를 대하는 것에도 꽤나 정성을 들이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건 근처에서 지켜보는 서라도 아주 쉽사리 통감할 수 있었다.
‘정말 온니짱은 좋은 아빠느님이 되겠군여.’
그의 뚜렷한 눈빛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던 서라였다. 돌연 손가락에 끼고 있는 장난감 반지로 이목이 향했다. 아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지를 낀 서라의 모습에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었다. 마트에서 있던 그 일이 떠오르자 서라는 기분이 더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결심한 듯이 소리쳤다.
“온니짱! 온니짱은 나님이랑 1일 가족인 만큼 이 아기를 키울 의무가 있어여! 고로 소꿉장난 한 번 하는 게 어떨까 해여!”
“호오라, 소꿉장난이라. 10년하고도 플러스 5년 만에 듣는 제안 같구만.”
“온니찡은 보통 소꿉장난하면 무슨 역할했나여? 나님은 항상 석사 공부를 마치고 해외에서 돌아온 3살 어린이 했었는뎅!”
“나야 뭐 대통령 했었지. 그냥 일반인하고 싶다고 요청해도 애들이 애원하면서 제발 대통령 해달라, 네가 그걸 해줘야 소꿉장난이 산다고 울면서 부탁했었거든. 이것이 이 몸의 패기랄까?”
둘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아기는 뭐가 그리 좋은지 그저 손뼉을 치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새로 새로 등장하는 장난감들에 정말이지 기분이 좋은가 보다. 민국과 서라가 그 모습에 미소 짓다가 서로의 시선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하는 거지여?”
“나야 뭐 동의했다.”
“좋았음여! 그럼 놔는… 짜자안!”
서라가 상자에서 장난감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아까 전의 바비 인형이었다. 민국의 부카게 전용 장난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서라는 한 손으로 쥔 바비 인형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면서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나님은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홀로 외로움을 타는 와이프를 하겠음여! 온니찡은 뭘 하실 거져?”
“훗. 야 그럼 뭐 답은 하나뿐인 거 아니냐? 난 두 개 할란다.”
민국은 두 가지 역할을 골랐다.
“집에 있을 아내와 자식을 떠올리면서 열심히 회사에서 일을 하는 남자랑, 그런 아내를 노리고 NTR을 시도하려는 옆집 남자.”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동인지 냄새가 나네여!”
“애야 넌 뭐 할 거냐?”
민국이 아기에게 역할을 물었다. 민국의 물음에 아기는 웃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까아?”
“어휴. 귀여워 죽겠네.”
“모에모에하다능.”
소꿉놀이에 출연하는 역할은 결국 와이프, 자식, 남편, 이웃 남자로 지정되었다. 아기의 손에는 작은 금발의 어린아이 장난감이 들려 있었고, 서라의 손에는 바비 인형이 들려 있었으며, 민국의 왼손에는 남편 역할인 짱구 신형만 피규어와 오른손에 고질라 장난감 이웃 남자가 장착되었다.
민국이 서라와 눈싸움을 하듯 마주하면서 은밀하게 신호를 보냈다.
“자, 그럼 시작하지.”
“이응.”
그리고 지금, 여기서 전설이 시작된다.
“돌아오셨세여 여봉? 배 고프시졍? 아니면 피로가 풀고 싶으신가여? 식사? 목욕? 아니면… 저?”
“나 지금 회사 가는데?”
“알면서 해본 건데영? 개그도 못 받아주는 센스 없는 남편 노잼… 바이바잉.”
바비 인형을 좌우로 흔들며 인사하는 서라였다. 민국은 과묵한 남편으로 신형만 피규어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이윽고 집안에 아기와 홀로 남은 서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까아까아~.”
“남편찡은 항상 회사만 신경쓰공… 나는 관심이 읎나봐영. 아기찡 나님에겐 오로지 그대밖에 없네영!”
“까아아~.”
서라의 연기에 맞춰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기는 그저 금발 머리의 캐릭터를 잡고 허공으로 붕붕 움직일 따름이었다. 서라의 열연에 반응하듯 민국은 고질라 장난감을 움직였다. 이웃 남자 역할인 캐릭터였다.
“똑똑.”
“읭? 누구시져?”
“콜록 콜록. 이웃집에서 이사 온 남자입니다. 떡 돌리려고 하는데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
“넹~ 어서 오세여.”
“어휴, 미인이시군요. 가슴도 쭉빵한 게 밤마다 남편분이 아주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남편분은 어디 가셨나요?”
“직장 가셨는데여? 그걸 왜 물어보시는 거져? …핫! 마사카!”
마사카 : ‘설마’라는 일본어
“혼또니 내 몸을 탐닉하기 위해 찾아오신 건가여? 지는 유부녀라구여!”
“후후, 들키고 말았군. 하지만 내 굵고 아름다운 것은 너에게 반응하고 있다. 나의 것은 네가 유부녀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꺄아앗!”
그리고 서라의 캐릭터가 덮쳐지려는 순간! 현관문 근처에 있는 어떤 액자를 발견하는 고질라 캐릭터!
“아닛! 저것은!”
“???”
“서, 설마… 너의 이름은 황천길에 가서 좆되고 싶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황천좆?”
서라가 바비인형의 고개를 천천히 까닥였다.
“넹… 내가 바로 황천좆이에여… 어떻게 날 아시는 거짐여?”
“이,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이윽고 볼펜을 들어 고질라의 얼굴에 점을 찍는 민국이었다.
“나 모르겠어? 나 한강좆! 한강에 가서 좆되고 싶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
“하앗!”
서라가 때를 노려서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너는 날 아프게 해~ 내 모든 걸 다 주는데~ 왜 날 울리니~’하는 BGM을 휴대폰으로 틀었다. 이미 아기는 자기 금발 캐릭터만을 쳐다보며 홀로 즐겁게 놀고 있었다. 민국과 서라는 과연 비제이답게 서로의 소꿉놀이에 극도로 몰두하고 있는 상태였다. 서라가 소리쳤다.
“당신… 북한군들에게 휩쓸려서 북한으로 넘어간 거 아니었나여…? 어떻게 남한에 돌아오신 거져…!”
“내, 내는… 내는 남한 동물래이 자슥들을 처단하기 위해 여기에 온 거시여! 북한의 돼지떡갈비김정은의 명을 받아…!”
한창 몰입하던 때였다. 민국의 팔꿈치가 무언가를 툭하고 건드렸다. 서라와 민국의 고개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돌아갔다.
“아, 이런!”
“오메나!”
소꿉놀이를 하던 것을 중지하고, 민국은 분유병을 다시금 새웠다. 분유병의 뚜껑을 느슨하게 닫아두었었는데, 그게 그만 민국이 툭 건드려서 바닥에 떨어지자 풀리면서 분유가 바닥 사방에 퍼지고만 것이다. 민국이 혀를 내두르면서 중얼거렸다.
“아이고야, 분유 이거 하나밖에 안 사왔는데 또 사와야겠네.”
“행님. 근데 왜 우리만 소꿉놀이하고 있져? 원래는 아가랑 같이 하는 거 아니었나여?”
“근데 쟤는 아기 역할이니까 아기 역할에 충실하는 거잖아? 쟤도 나름대로 몰두하고 있는 거여.”
“아항~.”
어쨌든 이 정체 모를 스토리의 소꿉놀이를 끝까지 진행하려던 두 사람이었다. 막 다시금 몰입하려던 그때… 똑똑.
“응?”
“읭?”
어디선가 들려온 노크음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은 현관문이었다.
현관 유리문으로, 선명하게 외부 내부가 비추는 유리는 아니었던 지라 누구인지 보이지는 않았다. 허나 민국은 일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익숙한 듯한 잔상은…! 민국이 알고 있는 세 여자 중 한 명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서민….”
“헉! 유이냐?”
“…….”
“아니아니, 유이 씨입니까? 뭐예요?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
밖에 있던 유이가 슬그머니 주머니 속에 있던 하얀 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아주 조그만 소리로 입을 열려고 했다.
“액체….”
“꺄아~.”
그러나 돌연 들려온 내부의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민국과 서라의 당황한 눈빛이 일제히 아기에게로 향했다. 아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여전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