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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63화 (163/369)

163화

강철남과의 쓰라린 아픔에서 이별한 지 2주가 흘렀다. 죽음에 가까운 얼굴로 감정 없이 행동하던 것도 이제 조금은 괜찮아졌다. 역시 시간은 치유의 약이라고, 옛날 어른들이 하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물론….

‘…….’

투둑, 투둑. 유이는 재빠르게 키보드를 놀리고 있었다. 서적에서 읽어본 C언어에 대한 강좌를 하나 하나 읊고 숙지하여 그것을 시험 삼아 사용해보는 것이었다. 워낙에 타고난 두뇌를 가진 터라 유이는 일반인이 어려워하는 것들을 금세 시도하고 성공하였다.

‘…….’

이윽고 테스트를 마친 유이가 잠시나마 파뿌리 TV 방송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비록 취미였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시청자들도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비제이로서의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하지만… 한 편으로 유이는 생각했다. 그들 역시 자신을 이용하는 게 아닐까?

‘…….’

강철남과 만남으로서 그가 그녀에게 선물해준 건, 사람의 믿음에 대한 의심이었다. 못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늘 부정하면서, 그래도 세상에 선량한 사람 한 명은 있겠거니… 그게 부디 자신을 사랑하고 포옹해줄 수 있는 남자겠거니… 유이는 기원했었다. 하지만 그 선량한 기도는 산산조각으로 부수어졌고,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내면 속에 있던 믿음에 대한 신념 역시 뿔뿔이 입자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

유이는 마우스를 놀려서 파뿌리 홈페이지 창을 꺼버렸다. 딸칵. 지금은 아직이었다.

아직 자신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이 쉽사리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이미 한 번 닫힌 이상 다시 열어낸다는 건 억지에 불과했다. 유이는 이 의심을 평생 동안 짊어지고 살 숙명이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 사람은 믿어선 안 된다. 아무리 믿음을 주고 진심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해봤자 돌아오는 건 이용과 농락밖에 없다.

겉으로는 다 해줄 것처럼 굴어도… 결국 그 뒤에서는 호박씨를 까면서 비웃음만 그려댄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사람 따위는….

‘큰 슴가답게! 넓은 포옹력을 가지란 말입니다 유이 씨!’

“…….”

선량한 자아를 다시금 꾸짖던 찰나였다. 또 한 번 그 우스꽝스런 목소리가 자신의 심금을 울려왔다. 유이는 가슴 중심부로 손을 서서히 얹었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변태에다가 하는 말들도 유치한 어린이들의 장난과 같았는데. 대체 무엇일까?

“…….”

중심부에 얹은 손을 주먹으로 만드는 그녀였다. 혹시나 자신의 비어버린 자리를 위로해주기 위해 다가온 그한테 호감을 느낀 거라면, 그건 지극히 바보 같은 행위라 유이는 생각했다. 갑작스런 사고로 얼토당토 그가 없으면 안 되는 몸이 되었으나, 결국엔 그도 강철남과 다를 바 없는 남자였다.

유이의 몸을 탐닉하길 바랄 늑대 같은 생물일 테고…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기 위한 장사꾼일 터였으니까. 그녀는 마음을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마음을 죽이고, 시골 산들에 있는 허수아비처럼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의 인생에 더할 나위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결심은 평생 끊기지 않으리… 마우스에 다시 손을 올리던 유이였다. 툭.

“…….”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손과 부딪힌 병으로 향했다. 어젯밤 민국에게서 받아온 병이었다. 그가 생산해낸 아기씨를 약 일 년이라는 유통기간 동안 보존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흑마법사가 팬 서비스로 모처럼 개발해준 신 아이템이라는데, 그만 그 병 속에 담겨 있던 하얀 액체를 슬그머니 엎어버리고 말았다.

“……!”

병이 엎어지면서 흘러나온 하얀 액체가 가파른 경사 길을 내려가듯 움직인다. 얼마지 않아 자신의 살결이 닿는 곳에 도달하려는 하얀 액체의 모습에 유이가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허벅지를 물렸다.

뚝. 이목으로 확인해도 끈적함이 물씬 풍겨나는 그 액체가 한 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유이는 이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병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

아무래도 오늘 한 방울 마신 뒤 병의 뚜껑을 힘없이 닫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병속에 보존한다 한들 입구가 허술하면 결국엔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유이는 손이 축 늘어지는 걸 느꼈다. 가능한 한 오늘은 혼자 있고 싶었는데…. 모처럼 혼자 있게 되었겠다, 마음을 편히 늘어뜨리고 생활할 계획이었는데, 한 순간의 트러블로 말미암아 그만 그 계획이 와해돼버렸다.

결국 민국에게서 약을 재충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유이는 슬그머니 휴대폰을 들었다. 애초에 휴대폰이란 것을 곧잘 쓰지도 않는 편인지라 다루기도 어색했는데… 유이는 민국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내는데 기능을 찾느라 까먹어서 우여곡절하였다.

띠링.

[저기….]

이윽고 메시지를 보낸 유이였다. 메시지로 보내는 문장조차도 극도의 소심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시간이 흘러도 반응은 없었다. 유이는 조금이나마 의문이 생겼다. 여자라면 가리지 않는 그 사람이 연락을 걸었는데도 끝까지 무시할 리 없었다. 반응을 해도 1초 만에 반응을 했지….

“…….”

휴대폰을 보면서 전화 통화를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원치 않았다. 유독 말재주가 없는 유이는 항상 민국과 전화 통화를 할 때 농락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불리한 조건은 피하는 게 좋았기에, 유이는 그냥 의자에서 드르륵 일어났다.

“…….”

어차피 만나야만 받을 수 있는 약이니까… 유이는 그의 집으로 향하자고 결심했다.

***

“행님. 근데 얘는 몇 살일까여?”

“흠. 겉보기에 한 7개월 8개월 된 애 같지 않냐?”

“에잉, 그래도 한 살은 되겠져 행님. 혼또니 보는 눈이 없으시네여!”

“그럼 왜 물어본 겨 이 하루 여편네야.”

“그냥여. 심심하잖아여.”

마트 1층으로 내려온 민국과 서라였다. 이번엔 민국이 서라를 대신해서 아기를 품에 안았다.

“지는 괜찮은디유?”

“넌 그냥 물건이나 들어 인마. 난 아내가 허리 아픈 일은 시키지 않는다.”

“우와, 페이스북에서 자주 보는 호구남 느낌!”

서라는 2층에서 아기 용품을 구매하는 동안 혼자서 계속 아기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성장기인 고등학생이었다.

아무리 무게가 작게 나가는 아기라 한들 계속 들고 있으면 몸에 무리가 많을 것이었다. 서라는 놀리듯이 말했지만 서도, 민국의 따스한 배려에 내심 웃음을 보였다.

이윽고 민국이 품에 안은 아기에게 ‘우쭈쭈~’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아가야 이 아빠가 너에게 인생 교육을 해주고 싶구나. 우선 넌 얼굴이 예쁘니까 알아서 남자들이 많이 꼬일 거란다. 최대한 많이 이용해먹으렴. 그게 인생을 편히 사는 방식이란다.”

“행님은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들을 잔뜩 만들어 혼자 여자들을 독차지 할 셈인가여?”

“후후, 하렘 계획은 원래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지. 한 명의 어장관리녀가 열 명의 초식남을 생성해낸다! 그럼 아홉 명의 여자는 내 것이 되는 게 기본 논리지.”

서라였기에 망정이지 은별이었으면 정강이 한 대를 쳤을 것이다. 민국은 품에 안은 아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뒤 1층 로비를 걸었다.

“야, 생각해보니 우리 아침도 안 먹지 않았냐?”

“그러고 보니 공복이라고 뱃속의 초인종이 자꾸만 까꿍까꿍 소리를 내넴.”

“얘도 밥 좀 먹어야 할 거 같고, 어디 앉아서 골라보자.”

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 1층에는 식당들이 가득이었다.

비록 사람들이 많이 활개를 치는 마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조용한 분위기가 오히려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놀러 와서 대화를 나누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민국은 찌개류를 판매하는 식당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품에 안고 있던 아가를 서라에게 건네주자, 서라가 양손으로 받아 안는다. 민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넌 뭐 먹을래?”

“지는 산후조리 상태라서 맛있는 게 많~이 먹고 싶구만유.”

“흠. 관계 맺고 아이 낳은 지 두 시간 된 셈이니까 몸이 많이 안 좋겠군. 오냐, 어디 한 번 골라봐.”

서라가 기다렸다는 듯 찌개 류의 식당이 아닌, 맥도날드 쪽을 가리켰다.

“불고기 버거랑 감자칩, 그리고 밀크쉐이크랑 콜라 먹고 싶네유!”

“참으로 산후조리구나! 됐고 찌개나 먹어라.”

“읭….”

애초에 아침으로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 건 서라 몸에도 안 좋았다. 민국은 가뿐히 찌개 두 개를 시켰고, 이내 음식들을 들고 서라에게 다가왔다. 서라는 자신이 사주었던 장난감 상자를 만지는 아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꺄아아~.”

“그렇게 맘에 드시나염? 때어드려염?”

“꺄아!”

“엣엣흠! 하지만 이 상자의 봉인이 풀리면 세상이 멸망할 거예여 각오는 하셔야 해여!”

마치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마왕과 용사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듯 중얼거리는 서라였다. 이윽고 서라가 상자깍을 뜯어 장난감을 보여주었다.

그 장난감은 피규어 같이 생긴 어린 여자 캐릭터에, 목에는 웬 커다란 반지 고리를 줄로 해서 달고 있었다. 서라는 꽤나 잘 만든 장난감에 감명의 눈동자로 바라보다 소감 풀이를 했다.

“모에하네여.”

“꺄아~ 꺄아~.”

“갖고 싶나여? 받으세여.”

장난감을 흥미 깊게 쳐다보며 두 손을 뻗는 아기의 모습에 서라가 그것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양손으로 장난감을 이리저리 만지던 아기가 좋다는 듯 까르르 웃어댔다.

“꺄아아아~!”

“히히~.”

서라는 품속에서 웃는 아기의 모습에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엄마라고 보기에는 겉으로 모자라 보이는 구석이 있었으나, 그래도 부모로서 자식을 따뜻하게 키우려고 하는 애정은 일말 느껴졌다. 음식들을 들고 온 민국은 그것을 가벼운 미소로 지켜보았다.

“식사 대령했으니 드시지요 하루 아내여.”

“어머엇? 감사해여 서방님… 소인 찌개가 콜라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사와여.”

“그럼 콜라를 사서 찌개에 부어줄 테니 마시는 건 어떻겠소?”

“헤헤! 마시는 건 더치페이?”

가벼운 말장난과 함께 민국이 피식 웃으면서 수저를 들었고, 서라 역시 마찬가지로 들려고 했다. 그러나 품에 있는 아기가 장난감을 어루만지면서 놀고 있자 쉽게 먹지를 못했다. 민국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서라에게서 아기를 데려오려고 했다. 근데 그때였다.

“까아!”

“으잉?”

민국에게 아기를 넘겨주려던 찰나, 서라는 아기의 행동에 순간 의아함을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피규어 같은 장난감에 달린 반지를 때서 흔들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웃긴 건… 서라의 검지 손가락 한 쪽을 붙잡고 막 흔들고 있는 것이다. 서라는 이 광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중얼거렸다.

“주, 주겠다는 거냐능?”

“꺄아아~.”

“온니찡.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됨?”

아기를 받으려던 민국이 두 손을 회수하더니 ‘훗’하고 가볍게 웃었다.

“한 번 아기가 원하는 데로 해봐. 그게 맞으면 뭔가 행동을 보이겠지.”

“으읭….”

설마 아니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생각을 하기엔 아이의 겉모습이 너무나도 어려 보였다. 그리고 서라의 생각은 필시 맞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을 갖추지 않은 아이가 호감을 선물한다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 이렇게 하면 되냐능?”

“까아~.”

서라는 아기의 눈치를 보면서 아기의 수중에 쥐어져 있던 반지를 빼내 자신의 검지에 끼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아기를 바라보는데….

“까아아!”

“…….”

기다렸다는 듯, 하릴 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뼉을 탁탁 치는 아기. 서라는 심장이 쿵하는 건 둘째치고,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파도처럼 물씬하게 밀려오는 걸 느꼈다. 민국이 그런 아가를 받아 품에 안은 다음에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아가야, 지금 서라에게 선물 준 거 맞지? 우리 와이프에게 선물 준 거 맞지요?”

은별이가 들으면 야단맞을 소리였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그리 행동하는 게 도리인 것이다. 민국의 물음에 아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손뼉을 치면서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서라는 그런 아가의 소리가 들리긴 하는 건지… 마냥 검지에 낀 장난감 반지를 흔들리는 눈동자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민국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너 주는 거란다. 아기가 착하네.”

“의… 의응….”

애써 감동한 것을 숨기려 노력하며 서라가 나머지 손으로 반지를 낀 손을 감쌌다.

“혼또니 착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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