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복선의 159>
쿠당탕탕탕!
산기슭을 굴러 떨어진 민국의 차는 연기를 푹푹 내뱉고 있었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무거운 빗줄기가 차의 뜨거운 열기를 식혔고, 수풀과 나무들이 웅성거리는 그곳에서 서민국은 서서히 의식을 차렸다.
“----!”
그리고 그는 끔찍한 광경을 맞이하고 말았다. 자신의 한 순간 실수로 말미암아 이뤄난 참사.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우스꽝스럽게 현재의 인생을 살고 있어도, 민국은 자신으로 인해 네 여자의 생명이 사라졌단 충격에 책임감을 가졌다.
비록 흑마법사의 도움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된 다섯 사람이었으나 그 생명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도 아니었고, 네 여자는 민국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루하루를 살 수 있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었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의무가 될 수도 있다.’
‘상관없습니다.’
흑마법사의 말에 서민국은 그리 중얼거렸다.
‘부탁입니다. 살려주십시오.’
‘…….’
그의 진지한 얼굴에 한참을 뜸을 들이다 승낙을 하던 흑마법사. 그날의 기억을 마치 재현된 악몽처럼 꿈속에서 경험하는 민국이었다.
“끄응….”
악몽과 한참을 실랑이하던 민국이었다. 흠뻑 젖은 전신으로 눈을 뜬 민국은 흐릿한 시선으로 정면을 보았다. 새근새근 자신의 품안에서 잠들어 있는 서라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나 슈밤.’
민국은 서라를 꽈악 안고 있던 손을 그제야 때어놓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해괴한 잠버릇이 서라의 온몸을 포박했던 모양이었다.
“의이잉… 온니쨩 야메떼여….”
손을 물리고 몸까지 뒤로 빼려는 찰나, 서라가 민국의 옷자락을 꽈악 붙잡고 늘어졌다. 민국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서라의 얼굴을 보았다. 숙면에 취해 있는 그녀가 이번엔 민국을 대신해 붙잡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집안에 늑대를 들이는 페이스보소. 기어코 임신을 당하고 싶은 건가?”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는 민국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서라를 강제로 덮치지는 않았다. 애초에 너무 깊게 잠들어 있는 얼굴인지라 방해하기도 뭐했다.
민국은 10분 동안 자기 품을 껴안고 있는 서라를 그대로 내비뒀다. 이윽고 서라가 잠결에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품에 있던 손길이 빠지는 순간 민국도 완전히 몸을 뒤로 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휘유. 몇 시간 잔거지?”
벽면의 시계를 보니 슬슬 오후가 찾아오고 있었다. 조금만 눈을 붙이려고 했던 게 어쩌다 보니 하루의 반을 자버리고 말았다. 민국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좀 있으면 다들 오겠네.”
은별이랑 예나, 유이는 각자 동떨어진 위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오지는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오더라도 항상 따로 따로 흩어져서 오는 것이었다.
‘유이 씨야 워낙 공기에 가까운 인간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은별이랑 예나는 고양이랑 강아지처럼 만날 으르렁거리니….’
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자신의 인기로 인해 두 여인이 시도 때도 없이 서로를 핍박하며 싸우고 있으니! 민국은 일어나자마자 잘난채를 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대충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은 뒤, 옷을 단정하게 입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끼이익, 쿵. 저벅 저벅. 옥상으로 올라가는 서민국. 워낙에 푹 잠을 잔지라 머리가 어질어질한 감이 있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것은 옥상으로 올라가 바람으로 머릿속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왜, 노을이 지는 바다의 모래사장에서 두 팔을 펼치고 눈을 감으며 바람을 느끼는 게 은근 스트레스 풀이에 좋지 않은가? 민국은 옥상을 그런 식으로 이용했다.
“깼나 보군.”
“으악! 누구냐!”
계단을 내려다보며 차츰 올라가던 민국이었다. 급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민국은 하마터면 계단의 옆 난간으로 떨어질 뻔했다. 난간을 붙잡고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민국이 소리를 지르며 정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옥상에서 치렁치렁한 검은 코트를 휘날리는, 어린 모습의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흑마법사느님?”
“그래.”
“아니, 또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요즘은 어쩐지 자주 오시는 거 같군요?”
마지막 계단을 성큼 올라와서 질문하는 민국이었다. 흑마법사는 민국에게서 고개를 돌려 노을이 져가는 수평선을 보았다.
“제품 제작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어서 말이야. 마법이란 건 참 알다 모를 거더군.”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분이 골머리가 썩히는 게 있다니 놀랍습니다요.”
그 말에 흑마법사가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것도 완전히 살리는 건 아니지. 흑마법엔 항상 일정한 조건이 붙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고환은 괜찮나?”
“훗, 하렘왕이 될 저에게 이 정도는 양반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걸어오는 모양새에서 다리가 조금씩 휘청였다.
“그래? 아쉽군. 정력에 도움 되는 아이템이나 하나 줄까 했는데.”
“흑마법사느님의 아이템은 항상 만능이지요. 부디 저에게 또 한 번 모세의 기적을!”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지만,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흑마법사다. 이 정도 비굴함은 오히려 양반이 아닐까? 흑마법사가 실소를 더 짙게 그을렸다.
“서민국.”
“예. 왜요.”
“또 죽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흑마법사의 옆에 섰던 민국이었다. 그의 고개가 흑마법사에게로 돌아갔다.
“그 여인네들도 살갗에 곰팡이가 피기 직전에 복원했기 때문이었지. 사실상 그보다 늦었더라면 해결책은 없었을 거야. 하나의 조건을 달고 산다는 건 가슴을 만져야 한다는 조건을 갖춘 너라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
요즘 들어 언급이 되고 있진 않았지만, 민국은 여전히 여자의 가슴을 만져야 하루를 살 수 있는 몸이었다. 물론 그 생명치는 여자친구인 강은별을 통해서 얻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강은별이 워낙 여자 친구로서 똑 부러지고 현명한 타입이었기에 말이다.
민국은 지고 있는 노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크게 숨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요즘 자꾸 그 악몽을 꾸어서 답답해 죽겠네요.”
“죄책감인가?”
“그렇겠죠. 비록 술에 취해 달려든 트럭 운전사가 제일 나쁜 놈이었지만, 그 와중에 친구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제 죄책감도 상당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운전을 했던 민국이 가장 덜 다친 결과를 낳았었다. 옆좌석의 은별을 비롯해서, 뒷좌석의 모두들 실로 참혹한 몰골이었었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책임져야죠. 앞으로도 책임질 거고 계속 그럴 겁니다.”
“호오, 그게 쉽지 않다는 건 문어다리를 좋아하는 자네가 더 쉽게 알지 않나? 한 여자와 백년을 산다는 건 하나의 야동만 백년을 본다는 것과 같은 이치일 텐데?”
“훗. 괜찮은 비유였지만 한 가지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 흑마법사님.”
민국은 잘난채하듯 말했다.
“5년마다 성형을 조금씩 시키면 5년마다 다른 야동을 보는 것처럼 보일 테지요! 심지어 저는 하렘왕이 될 남자이니 5년에 네다섯 명의 새로운 여자와 자는 게 되는 겁니다!”
흑마법사는 그냥 희미하게 비웃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욕도 하지 않았다. 그게 그녀의 특이한 성향이라면 성향이겠지.
“와, 욕을 안 먹으니까 오히려 내가 캥기네. 흑마법사님 사람 마음 흔드는 법 좀 아시나 봅니다?”
“그나저나 서민국.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흑마법사가 대뜸 서민국에게로 몸을 돌렸다. 서민국은 늘 진지하지만 한층 진지해진 흑마법사의 얼굴에 침을 삼켰다. 이 양반은 서민국조차도 예상을 뛰어넘는 양반… 왠지 무언가 용건을 언급하려는 듯한 행위에 민국은 대답을 기다렸다.
“천원만 주게. 자일리톨 사먹게.”
“그게 본론입니까?”
“본론은 아니고 갑자기 떠올라서 말이야.”
천원을 건네주는 민국이었고, 그것을 고스란히 받는 흑마법사였다. 민국이 한 마디했다.
“당신이 판타지 계의 일진입니까?”
“이걸 받아.”
품속에서 007 검은 가방을 꺼내 건네주는 흑마법사였다. 그것을 받은 민국이 의문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뭡니까?”
“너의 액체를 소중히 보관해줄 병들이지.”
‘열어봐도 되요?’라는 민국의 물음에 흑마법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가방 내부를 확인하자 투명하고 작은 병들이 보였다. 그것을 하나 쥐어본 민국이었다.
“그곳에 네 아기씨를 보관하면 유통기한이 하루가 아니라 일 년으로 느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지.”
“엇? 슈밤!”
그야말로 과학의 발견이었다.
“어떤 선물을 들고 오셨나 했는데 리얼 편리한 거군요. 허허, 역시 흑마법사느님.”
“그럼 이제 난 가봐야겠군.”
“예압. 오늘도 건강하시고 만세무강하십쇼.”
좋은 아이템을 손에 넣었다며 민국은 희열을 외쳤다. 아무래도 만날 정액을 소비시키다 보니 다리가 휘청거리고 몸이 피곤해지는 경향은 있었다. 이 유통기한 1년짜리 병만 이용한다면 민국이나 다른 여인들이나 한층 편해질 터였다.
‘정말이지… 무지하게 고맙구만.’
민국은 흑마법사에게 내심 고마운 마음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걸 느꼈다. 아무리 이 세계인이고 현실 세계의 사람들과는 이질감이 드는 족손이라 하여도, 결국엔 노력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건 지구인과 공통된 점이었다.
이 제품을 만드는데 든 시간이나 노력도 어느 정도는 있을 텐데, 민국은 최소 식사 한 끼라도 대접해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비제이 방송한다고 별의별 것 다 해줬는데 말이야.’
생각해보면 의문스럽고도 뿌듯한 것이었다. 흑마법사는 그저 민국이의 팬이라 자칭하면서, 희귀병으로 말미암아 죽어갈 때도 도움을 주었고 자신의 이성 친구들이 죽어 갈 때도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도 여러 아이템을 제공해 친구들과 갈등이 일어나면 항상 도움이 되곤 하였다.
“어이 흑마법사님.”
민국은 고개를 들어 흑마법사가 있는 곳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민국은 한 발 짝 늦고 말았다. ‘어이쿠야’소리를 내면서 민국은 머리를 긁었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여인이여. 참.”
가방을 닫아 손에 쥔 뒤 민국은 옥상 끝자락으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그리고 노을이 완전히 져버리고, 이젠 서늘한 바람만이 불고 있는 보랏빛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고맙습니다. 죽지 않을 거니까 안심하세요.”
민국의 결심은 그 누구보다도 강단이 있었다.
***
“여긴 누구! 나는 어디!”
“일어났냐.”
“으앗! 내 옷에 왜 땀이 이렇게 많이 나 있는거져? 고도의 쉰 냄새가 나네여! 심지어 머리까지 끈적끈적… 오, 온니쨩 혼또니 덮치신 건가여!”
침대에서 일어난 서라는 자신의 몸을 감싸면서 물러나는 연기를 하였다. 민국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를 하면서 바닥의 물건만 정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서라의 연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여인네의 처녀를 범하고도 한 치 미안함이 없는 남자! 도도한 카리스마에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자애들이라면 빠지겠지만 나님이 그럴 거라 생각하면 오산임요!”
“됐고 이거나 받아.”
“이게 뭥미?”
휙! 민국이 어떤 물건을 던지자 나이스 캐치를 하고 쳐다보는 서라였다. 민국이 설명해주었다.
“내 아기씨들이 고이 모셔다 들어 있는 병이지. 흑마법사가 준 거야. 거기에 담아두면 1년이란 유통기한 동안 계속 사용할 수 있어.”
“우왕! 그럼 이것만 있으면 굳이 형님네 집까지 아장아장 기어올 필요가 없어진다는 거임? 형의 끈적끈적한 면상을 볼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거임?”
“그래 이 자식아. 진짜로 범하기 전에 그 입 다물라.”
‘기억시옷!’하면서 약통을 주머니 속에 넣은 서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온니쨩. 언니찡들은여?”
“이미 다 갔지.”
“헐? 혼또니요? 나님을 왜 안 깨우신거져!”
“깊게 잠들어 있길래 다들 깨우지 말라고 하더라. 그래서 놔뒀지 뭐 별 수 있냐.”
“읭… 언니찡들 가슴 주물럭거리고 싶었는데.”
서라의 농담이었고, 민국은 흑마법사에게서 받은 가방을 닫으려는 찰나였다. 틱.
“뭐냐 이건?”
“? 왜 그러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