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민국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이것이 실제 서민국의 모습이란 말인가? 예나는 조금 주춤했지만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민국이도 받아들일 자신이 있어.’
강은별. 그 여자는 서민국의 이런 본래 모습을 알면서도 그를 받아들였다. 그건 외모나 키 같은 기타적인 분류도 존재하겠지만, 이런 극악무도한 변태적인 성향도 온전히 받아들일 정도라는 건 서민국이란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자명했다.
때문에 올바르게 부모 교육을 받고 자라온 예나로서 한 치 물러날 수 없었다. 강은별… 그녀보다 예나가 훨씬 민국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단 사실을 여기서 증명하고 싶었다.
‘쓸데없는 고집이라 해도….’
“엇험, 여기 병사들에겐 한 가지씩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있고 지키고 싶어 하는 게 있어! 그걸 알면서도 너는 이 전쟁에서 병사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생각이야 한예나?”
“하지만… 다들 그걸 알면서도 전쟁에 참여한 거니까….”
“부질없는 소리! 전쟁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허나! 자신의 가족과 친구와 그 외 소중한 사람들을 위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들도 모두 죽음을 두려워해!”
“…….”
쿵!
“한예나! 너는 너의 병사들에게 살인을 저지르라 명할 것인가! 그게 과연 그릇되지 않은 결단인가!”
울컥울컥 앙금이 쌓였지만 한예나는 가까스로 참았다. 이것이 민국의 본래 모습인 것이리라… 이걸 이해하고 포옹해주어야만 진정으로 민국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예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잡고 있는 병사를 앞에 내세우려고 했다.
“어헛 또!”
“…….”
결국 병사를 내려놓고 다른 말을 움직였다. 왔다리 갔다리 같은 곳만 방황하는 예나의 병사들이었다. 덕분에 민국의 병사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고, 그 결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민국은 현재 예나에게 왕노릇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번엔 저기 창밖에다가 ‘아! 오늘은 콜라가 담긴 순대국을 먹고 싶다!’라고 소리쳐봐.”
“…….”
“어허! 이 몸이 말을 하지 않더느냐!”
민국의 으름장에 예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서히 민국의 집 창문 쪽으로 향해서, 열려 있는 바깥 너머를 향해서 두 손을 입가에 모았다. 그리고는….
“오, 오늘은 콜라가 담긴….”
“더 크게 말해야지.”
“콜라가 담긴…!”
“더 크게!”
“콜라가 담긴 순대국이 먹고 싶어!!!”
정말이지 최대의 힘을 발휘해서 악을 지르듯 외친 예나였다. 가쁜 숨을 내쉬는 예나의 뒷모습에 민국이 대견스럽다는 듯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럼 그래야지. 아주 잘했다 노예.”
“…….”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예나를 보면서 민국은 자리에 앉았다.
“자, 이제 네 차례야 한예나.”
“…….”
“어허! 또 병사를 움직여서 칼을 휘두르게 할 셈이냐? 한예나! 너는 칼을 만든 장인들이 고작 사람을 죽이기 위해 무기를 만든 것인 줄 아느냐?! 박물관에 달아두고 사람들 구경하면서 기쁜 미소 보게 하려고 만든 거 아니겠어?!”
“…….”
“아니 아니! 저것 보소! 와~ 한예나 너무하네~. 기어코 병사를 앞세워서 살인을 시키려고 하네. 살인은 어느 이유에서도 정당하지 못해! 막말로 한예나 너의 소중한 사람을 누군가가 죽인다고 하면 과연 그게 좋겠어? 싫지? 근데 한예나 너는 지금 그런 짓을 저지르려는 거야 한예나!”
민국의 교훈 서린 충고는 끊임없었다. 체스판을 둔 지 어연 30분. 이제 왕이랑 퀸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도 민국의 충고가 계속되자 예나는 멘탈이 산산조각으로 부수어지는 걸 느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직감하는 그녀였다.
이건… 이건 보통 멘탈로 되는 게 아니라고…. 자신이 보듬어주기에는 너무 멀리 가 있는 사람이라고…. 그 순간 예나는 아주 크게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어? 어어?! 어어어!!!”
“…….”
“와~ 한예나 기어코 여왕의 손으로 병사를 죽이게 만든 건가? 첫 살인이네!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할 수 있지!”
지는 이미 죽일 대로 다 죽여 놓고 남에게만 무어라 하고 있다. 물론 전쟁의 실재판에선 그런 생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놀이인 체스였다. 민국은 지금 너무 몰입할 대로 몰입해서 자기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것이었다!
“야만한 여자! 한예나!”
“……!”
그 외침이 결정타였다. 가슴에 커다란 비수가 꽂힌 예나가 여왕으로 죽였던 민국의 병사를 체스판 바깥에다가 두려고 했다. 하지만 그 두려던 손짓은 멈추었고, 얼마지 않아 쥐고 있던 병사를 체스판에 그대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딸카당….
“응?”
“…….”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행동에 그제야 몰입을 멈추고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의문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던 것도 잠시… 민국의 눈이 서서히 커다래지기 시작했다.
“야만해서….”
“…….”
“미안…해….”
“…….”
이건 뭔가 잘못됐다. 뒤늦게서야 사고회로를 돌리려던 서민국이었다.
“살인해서… 미안….”
“어, 어라?”
“애꿎은 생명을… 죽여서… 흐윽!”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돌연 울기 시작하는 한예나였다. 민국은 크게 당황한 얼굴로 어찌할 줄 몰랐다.
“예, 예나야?”
“미, 안… 해! 으흑! 병사를… 죽여서… 으흑! 미안… 흐윽!”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그녀.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민국의 쌀쌀 맞은 핀잔에 가슴에 웅어리가 진 것처럼 울먹이기 시작했다. 당연지사 민국은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심히 혼란스러웠다.
“예, 예나야? 어차피 이거 다 장난인데… 다 내가 진심으로 한 게 아니라 농담으로 한 건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가리고 있던 양손을 내려놓으면서 천장을 보고 꺼이꺼이 우는 예나였다. 우는 모습이 얼마나 서글프던지, 서민국의 안티팬이 100배로 증가할 것 같았다.
“여왕으로 병사 죽여서 미안…! 흐윽! 끅… 으아아아아아아앙!”
“으아! 예나야!”
완전 어린애처럼 우는 그녀의 모습에 민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 못했다. 정말이지… 방송을 할 때는 다 이렇게 막장짓을 하면서 놀거나 하였다.
똘끼 충만한 짓도 은별이나 유이가 있는 앞에선 온전히 행했었다. 그러나 예나는 그런 여인들과는 다르게 민국이 앞에서는 평온한 현모양처였다. 할 말이 있어도 머뭇거리고… 용기를 내고 싶어도 쉽게 내지 못하는… 민국이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여리고 상처 많은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 예나에게… 그런 예나에게 그리 험한 말들과 비수 꽂는 말들을 하였으니…!
“흑흑 끅…! 아흐흑흑! 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진정해 예나야…! 내가 잘못했어! 이건 내가 잘못한 거니까!!”
“병사 죽여서 미안해 민국아…! 으아앙!”
예나를 붙잡고 사과를 하려던 민국이었다. 바닥에서 일어난 예나가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울면서 달려가던 예나는 그만 쾅하고 화장실 문에 코를 들이받고 말았다. 민국이 다른 의미로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예나야!”
“살인마… 끅! 같, 아… 끅! 서…! 미안…해…끅! …으아앙!”
“…….”
끼이익! 쿵! 화장실 안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는 예나였다. 철컥! 문까지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민국은 여러 의미로 안절부절 못하면서 예나가 있는 화장실로 다가가 문을 두드릴 따름이었다.
“예나야? 문 좀 열어봐 예나야. 내가 잘못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예나였다. 화장실에 쩌렁쩌렁 울리는 그녀의 울음 소리에 민국은 입을 다물었다.
‘미친!’
민국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동안 서민국이 비제이로서 상대한 여자들은 한 번씩은 크게 반격을 하거나 화내기 일쑤였다. 예나 같은 타입은 지금까지 없다 보니… 꽤나 신선한 모습에 맛이 들려서 막무가내로 갈구어댄 게 문제였다. 그만 M 본능에서 S 본능으로 넘어가 사디스트 기질을 선보인 것이다.
“으아… 어쩌지….”
“으아아아아아앙!”
“예나야! 미안해 예나야! 정말 내가 잘못했어! 엎드려 빌까? 엎드려 빌면 좀 괜찮아지겠니?”
보이지도 않을 텐데 민국은 예나가 있는 화장실 문을 향해서 삼 세 번 엎드리면서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나의 울음소리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로부터 약 10분이 지나서야 그녀의 상태가 서서히 진정되는 걸 알 수 있었다.
“흑… 끅….”
그리고 잠시 후였다. 끼이익…. 딸꾹질하듯이 훌쩍이긴 했지만, 꽤나 진정된 모습으로 예나는 눈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민국은 매우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예나를 올려다보았다. 예나의 눈은 하도 울어서 인지 퉁퉁 부어 있었다.
“미안해 민국아… 내가 병사를 죽….”
“아냐 아냐! 어차피 체스잖아? 그리고 그런 병사 죽여 봤자 하나도 문제없어! 어차피 그놈 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을로 돌아 가봤자 여인에게 고백하고 바로 차일 걸? 전형적인 오타쿠 새끼라서 답은 불보듯뻔해!”
“여왕이 살인마가 돼서 흑….”
“어휴! 여왕이 왕을 지키려고 한 건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예나 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넌 올바르고 그릇되지 않은 짓을 한 거라고!”
그 말에 ‘흑… 끅….’거리던 예나였다. 얘기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는 듯 예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게… 아니…야….”
“…….”
“무엇보다… 내가… 민국이 널….”
“…….”
“네 진짜… 모습을… 흑!”
울음이 서려서 조금 거슬릴 수도 있지만, 그녀의 진심은 계속 전달되었다.
“진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너무 분…해….”
“…….”
“미안……해… 민국…아….”
울먹이면서 얼굴을 가리는 예나였다.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던 민국은 곧 희미하게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넌 이미 날 이해해줬어.”
“…….”
“충분히. 정말 고마울 만큼.”
예나가 천천히 얼굴을 가리던 손을 땠다. 민국은 어느 덧 꿇고 있던 무릎을 피고 일어서 있었다. 그녀의 글썽이는 눈동자가 민국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응… 정말이야.”
민국은 진지하게 토로하듯 얘기했다.
“솔직히 난 예나 네가 내 진짜 모습을 보면 많이 실망할 줄 알았어. 어쩌면 실망은 했지만 얘기하지 않는 걸 수도 있지. 그래도 네가 이렇게 받아주려고 노력하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내가 실수했다는 걸 자각했어.”
“…….”
“예나야. 새삼스레 깨닫는 거지만 넌 정말 좋은 여자야.”
민국이 말을 이었다.
“내 소중한 친구고.”
씨익 미소 짓는 민국의 얼굴에 예나는 눈을 떨었다. 이윽고 예나가 ‘하지만….’하면서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급우울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민국이 ‘응?’하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야만하니까….”
“…….”
“민국이 네 곁에 있기는… 어렵겠….”
다시 울음을 쏟아내기 위해 바들바들 떠는 그녀. 한예나의 모습에 민국은 방금 전 체스를 할 때 그녀에게 했던 마지막 소리를 떠올렸다.
‘야만한 여자! 한예나!’
“…….”
아무래도 농담 짙은 그 소리에 크게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민국은 그제야 자기 잘못을 확실히 떠올렸다.
예전에 은별이 몰카 사건 때도 이러지 않았던가? 마음을 다 알고 있는데도 그만 그 상황에 감정이입해서 상대방의 마음은 일체도 생각지 않았던 민국이었다. 민국은 그녀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서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예나야! 내가 너에게 야만하다고 했던 건 어디까지나 장난이었어! 오해하지마! 하지만 그게 너에게 정말 심한 상처로 다가갈 줄은 난 몰랐어! 아니, 알 수 있었지만 그 상황에 몰두하느라 네가 상처 받을 걸 몰랐어! 정말 미안해! 어, 하지만 사과만으로는 마음이 내킬 것 같지 않으니까 으어어.”
민국이 ‘딱!’하고 검지와 엄지를 맞부딪혔다.
“서민국 소환 전용 티켓 한 장을 줄게.”
“서민국… 소환 전용 티켓…?”
민국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든지 무슨 일이 있을 때 연락을 하면 네가 있는 곳 어디든 달려 가주는 거야!”
“…….”
“어때? 괜찮지? 방금 그 말은 정말 미안해! 내가 심했어!”
진심으로 사과하는 민국이었고, 선물까지 주고 있었다. 예나는 글썽거리던 슬픔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민국이 어떠냐는 듯 조심스레 묻고 있었고, 예나는 얼마지 않아 퉁퉁 부은 눈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