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54화 (154/369)

154화

<변태는 괴롭다>

“…정말?”

“그래. 정말이야.”

대학교에서 생활하는 서민국의 모습도, 비제이 노릇을 하는 현대왕의 모습도, 사실상 서민국이 갖추고 있는 모든 면모였다. 허나 그 중에 가장 서민국의 실제 모습에 가까운 성격이 무엇이냐 하면 역시 비제이 노릇을 하는 현대왕일 것이었다.

그는 방송을 처음 접한 까닭이 물질적인 소득 때문이 아닌, 단순히 자신의 재미 때문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그 일을 시작했고 그것이 어쩌다 보니 직업이 되어 지금은 돈도 벌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는 상당히 뭐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비제이 중에는 영 좋지 못한 이미지를 심고 있는 사람들이 잦았다. 그리고 앉아서 돈을 쉽게 번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일부 외모를 이용해서 쉽게 쉽게 버는 사람들도 있었다. 허나 그만큼 누구보다 노력해서 재미난 방송을 살리기 위한 노력파도 존재했다.

현실은 외모를 이용하여 편하게 먹고 살려는 일부의 비제이들 때문에 전체 비제이들까지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민국이 억울해 할 팔자는 아니었다.

그는 인성이 소위 쓰레기에 가까운 막장 비제이를 하고 있었으니까.

“정말…이구나.”

예나는 고개를 내리 숙이면서 민국의 시선을 피했다. 민국은 다짐한 눈빛으로 예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역시… 그렇구나.”

이미 확신을 하고 있던 예나였다. 허나 자기 혼자 확신하는 것과, 상대방에게서 확신을 얻는 건 역시 유난히 차이가 있었다. 예나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민국이 짐짓 웃음 지으면서 말했다.

“역시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거지?”

“으응….”

예나는 진솔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시치미를 땔 이유가 없었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이 민국을 만나러 온 까닭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오늘… 웹툰을 보다가 우연히 현대왕이란 닉네임을 발견했거든….”

“…….”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길래 궁금해서 검색해보았다가… 오늘 녹화되어 있는 방송을 봤어.”

민국은 의문이 풀린 듯 등받이에 편안히 등을 기댔다. 그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그렇구나.”

“…….”

“예상한대로네.”

민국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예나를 신뢰하긴 했지만 그녀가 머금었을 충격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 사실상 가늠은 어려웠다. 민국은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은 하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아니야… 비제이를 하는 거야 사실 내가 따질 문제가 아니니까….”

“본심을 숨긴 걸 미안해하는 거야.”

비제이를 하는 거야 사실상 숨기든 말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민국이 지금까지 예나를 맞춰주기 위해 속내를 숨기고 행동해왔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늘 진심으로 행동해왔던 예나를 속였던 짓이기에, 민국은 그에 대해 사과했다. 예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정면의 민국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예나야.”

“…….”

“진심으로 행동하는 게 무서웠어. 아무래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잃어버리기 싫었거든.”

민국의 솔직한 모습에 예나의 눈빛이 또 다른 의미로 흔들렸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그치. 아무리 그래도 10년 이상을 함께 알아왔던 사이잖아.”

어쩌면 자기 가족보다도 서로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두 사람이었다. 이런 두 사람이 여태까지 스킨쉽 한 번 없었다는 게 실로 우스울 정도다. 이윽고 예나가 시선을 내리다가 물었다.

“은별 씨는… 남고딩인 거지?”

“흐음… 이걸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하지만 이미 다 안 거 같으니까 솔직하게 얘기할게. 맞아.”

“콩딱지나… 그 강강님은…?”

“맞아. 그 두 사람도 네가 예상하는데로. 강서라, 최유이 씨야.”

“…….”

“셋 다 비제이를 하는 사람이고, 셋 다 나랑 방송을 했었어.”

예나는 뜸을 들이다 중얼거렸다.

“그래서 바캉스 때도 서로 조금씩 눈치를 봤던 거구나.”

“미안해.”

예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해는 되니까….”

하지만 머리로 이해를 하는 것과 감정으로 이해하는 건 조금 달랐다. 예나는 하필이면 민국이 그런 중요할 수 있는 사실을 자신에게 숨겼다는 게 조금 화가 났다. 그 때문인지 예나는 돌연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 세 사람은 민국이 네가 방송하는 걸 전부 봤겠네…?”

“어… 그렇지? 다 봤지?”

“진짜 네 성격도…?”

민국은 ‘흐음’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예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볼래….”

“응?”

“나도 보고 싶어…!”

붉어진 얼굴로 예나가 민국을 응시했다. 민국은 흠칫거렸다.

‘저 눈은!!!’

소꿉친구 10년. 예나의 눈빛만 봐도 무슨 마음을 품었는지 곧장 알 수 있다. 고로 지금 예나의 눈빛은 예상치 않다는 걸 민국의 당황한 얼굴이 알려준다.

‘결심한 걸 끝까지 밀어붙이는 눈빛! 해줄 때까지 완고한 의지로 관철을 시킬 때의 눈빛이다!’

“하, 하지만 예나야. 내가 너에게 지금 이렇게 대하는 것도 내 나름의 본심이고.”

“하지만 그 세 사람은 내가 모르는 너의 모습을 안다는 거잖아…? 나만 모르는 거고….”

민국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건 그렇지.’라고 대답했다. 예나가 대뜸 사과했다.

“미안해 민국아… 정말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싫은 걸….”

“으음.”

민국은 팔짱을 끼며 고심했다. 일단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예나는 신중한 모습이었다. 크게 실망을 하고 돌아서도 될 판에 이해해주니 고마웠다.

“나야 내 본심대로 행동하면 좋겠지만 예나 네가 적응할 수 있을까 싶어서. 상상 이상으로 많이 다를 텐데?”

“괜찮아….”

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응해볼게….”

노력해본다는 것이었다. 예나는 한 번 노력하기로 맘을 먹으면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있었다. 그런 근성을 모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민국도 오랫동안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알겠어. 정 그러하다면.”

“…….”

“그럼 잠시 안방으로 갈래? 식사는 다 한 거지?”

빈 접시들을 보면서 민국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예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시들을 싱크대에 전부 옮긴 민국이 손을 씻고 안방으로 향했다.

“음. 어떻게 보여주는 게 나을까.”

“…….”

천천히 따라온 예나. 민국은 대뜸 자기 본심대로 행동하자니 적응이 안 됐다. 무엇보다 예나에게 보여준 자신의 모습은 약 10년을 지속해온 모습이었다. A라는 사람을 대할 때 모습을 오랫동안 버릇처럼 유지해왔는데 대뜸 바꾸라 하면 솔직히 바꾸기 어려운 게 사람이었다.

“그래, 게임을 하자.”

“게임…?”

“응. 의식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수 있으니까, 차라리 어떤 게임을 하면서 차차 보여주는 게 예나 너에게도 편할 거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였다.

“응… 그래도 좋아.”

“오케이. 그럼 게임은 체스로 하자. 아! 그리고 조건을 하나 걸자.”

손뼉을 치면서 체스에 내기를 더하는 민국이었다.

“체스에서 병사가 한 개씩 먹힐 때마다 상대방에게 원하는 걸 시킬 수 있는 거야.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어, 어떤 것이든…? 그건 민국이 너나 나나 좀 그렇지 않을까…?”

“호오. 포기할 거면 포기해도 돼. 다만 그렇게 하면 넌 내 진짜 모습을 못 보겠지.”

“…….”

“음하하하하하!”

서서히 본모습이 드러나는 서민국이었다. 예나는 다소 도발스러운 그 웃음에 조금 욱했는지 동의했다.

“알겠어… 할게.”

“그래, 그럼 체스판 꺼낼 테니까 기다려.”

큰 키로 장롱 위에 있는 체스판을 꺼낸 민국이었다. 바닥에 펼친 다음에 하얀 말과 검은 말을 각자 위치에 놓는다. 예나가 돌연 묻는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하는 건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따, 그걸 모르시면 어떡합니까.”

“…….”

평소 때라면 ‘그래? 그럼 내가 가르쳐줄게.’라고 부드럽게 리드했을 민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예나에게 굳세게 따지고 있다. 그래도 예나는 오기로 참기로 했다. 일단 체스판에 대해서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으니, 알고 있는 만큼 실전에 사용해보자고 결심했다.

“자, 그럼 준비된 거 같으니 시작하지.”

“응….”

“저장된 무기는 충분한가 한예나?”

민국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드립이었다. 그러나 그 드립이 민국의 면전에서 나오는 건 예나에게 실로 생소한 일이었다. 묘한 신선함에 예나는 그만 희미하게 미소 짓고 말았다.

“응… 충분해.”

“좋아, 그럼 이제 오퍼레이션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하지. 선빵은 레이디 퍼스트로 나부터.”

“…….”

“태클을 안 거는 게 예나답구만!”

그리고 체스판에서 병사 하나를 앞에 내세우는 민국이었다. 예나도 ‘음….’하면서 어떤 걸 움직일까 고르다가 병사를 골라 움직였다.

“아니 거기다가 움직이면 어떡해?”

“응…? 이거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맞아. 태클 걸려고 한 건데?”

“…….”

다음 병사를 움직이는 민국이었다.

“자, 빨리 하시와요.”

“으응….”

이윽고 예나가 병사를 움직였고, 민국이 말을 이용해서 그것을 잡았다.

“으랏차!”

“아…!”

예나가 탄성을 지었고, 민국은 팔짱을 끼며 ‘흠흠!’ 콧숨을 내뿜었다.

“진 사람은 왕의 명령에 따라야하지. 이건 일종의 왕게임이야. 예나,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나?”

“…….”

그 어떤 것이든 해야 한다. 그러자 예나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민국의 본모습에는 막장스러운 변태성도 다분히 존재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무언가 변태스러운 짓을 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민국이라면 난 무엇이든….’

“코에 손 넣어봐.”

“으응…?”

“코에 손을 넣으라 하지 않았느냐. 노예여.”

“코, 코에 손…?”

“그러하다. 짐이 명령하지 않는가. 서둘러 하라.”

민국은 이제 슬슬 필이 오는지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누워서 다른 손으로 엉덩이를 벅벅 긁고 있었다. 예나는 그런 민국의 모습에 심히 이질감을 느꼈지만, 그가 명령한 것도 다소 황당스러워서 아무 말을 못했다.

이윽고 눈을 금붕어처럼 뻐끔뻐끔거리고 있을 때 민국이 재촉해왔도, 예나는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유지하며 손가락을 서서히 자신의 콧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렇게…?”

“더.”

“이… 이렇…게?”

“깊숙히 더.”

“…….”

푹. 검지 하나를 자신의 콧구멍에 넣는 예나였다. 왠지 순간적으로 감정이 욱함과 동시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민국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예나를 보고는 대놓고 폭소를 하기 시작했다.

“푸헤헤헤헤헤헤!”

“…….”

“자, 이제 네 순서야.”

언제 비웃었냐는 마냥 평소대로의 얼굴로 돌아온 민국이었다. 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체스판을 보았다. 이윽고 병사 하나를 움직여서 민국의 병사 하나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민국이 손으로 대뜸 체스판을 가리면서 소리쳤다.

“잠깐!”

“……?”

“지금 그 병사를 움직이려고 하는거야? 그 불쌍한 병사를?”

예나가 뜸을 들이다가 반문했다.

“왜…? 잡아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한예나. 너는 지금 저 병사를 이용해서 애꿎은 나의 병사를 붙잡으려고 하는 거잖아. 어찌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냐?”

“…….”

말을 못하는 예나에게 민국은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마냥 소리쳤다.

“네가 지금 죽이려고 하는 나의 병사는 이 전쟁이 끝나면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가서 고백을 하겠다고 결심했어. 비록 사망 플래그가 꽂힌 불우한 녀석이지만, 그래도 그 운명대로 흘러가게끔 놔둘 생각이냐? 넌 그토록 매서운 아이였어 한예나?”

“…….”

“실망이다 한예나!”

울컥하는 한예나였다. 떨리는 눈동자로 붙잡았던 병사를 내려놓고는, 다른 병사를 앞으로 움직이는 그녀였다. 덕분에 민국의 죽을 뻔한 병사는 죽지 않았고, 민국은….

“푸헤헤헤헤헤!”

“…….”

좋다는 마냥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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