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52화 (152/369)

152화

성공한 사람들은 말한다. 위기에는 항상 기회가 있다고. 그러나 그 위기를 받아들여야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강은별은 유튜브에 올릴 때 녹화 방송을 직접 수정해서 올리는 편이었다. 고로 비제이들끼리의 소소한 대화나 말장난은 거의 올리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민국은 달랐다.

그냥 녹화를 대신해주는 놈에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준 뒤 자신의 방송국에 맘대로 올리라 명하곤 하였다. 돈도 안 주고 엄청 부려먹으면서 말이다.

‘설마 예나가 이걸 본 건가? 아니, 근데 비제이라는 것도 모르는 여자가 이런 걸 어떻게 알아?’

인터넷하면 웹툰과 카페밖에 모르던 그녀였다. 어떤 루트를 타고 알게 되었는지 몰라도 큰일이었다.

‘훗… 아니야. 아닐 수도 있지. 내가 과민하게 행동하는 걸 수도 있어.’

예나가 민국이랑 유사한 비제이를 보고 나서 선보였던 행동과 일치했다. 어떻게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압박감!

“제길! 옷가게에서 여자 속옷 만지려는데 도둑질로 붙잡힌 느낌이야!”

민국은 고민했다. 끝까지 모른 척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예나가 정말로 자신을 의심하는 것인지 확인해야 하는 것인가? 참고로 민국이 아는 예나는 한 번 필이 꽂히면 어마무지한 타입이었다.

‘결정해야 한다. 예나가 정말로 나를 현대왕이라 의심하는지를 확인할지 말지.’

아직은 불확실한 민국이었으니까 말이다. 고로 민국은 결정했다. 그래… 좋다 좋아!

**

“하, 하아….”

하마터면 위기에 몰릴 뻔한 예나였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그녀는 화장실에 숨어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민국이는 분명…….’

아까 전, 화장실의 문짝에 귀를 기대고 엿들었던 그것.

‘강… 강…가…라고 했어.’

차마 성적인 단어는 속으로도 머금기 껄끄러웠다. 그런 그녀 입장에선 민국이가 그런 단어를 서슴없이 썼으리라 생각하는 게 이해가 안 됐다.

‘하, 하지만… 정말로 썼….’

3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그 부드러운 남자 민국이가! 재벌3세처럼 비싼 차를 타고 몰며 예의 바른 모습을 취할 듯한 민국이가! 실은 전혀 딴판인 본성을 소유하고 있던 것이다!

‘…….’

물론 예나는 그런 3류 드라마에 쉬이 빠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국이의 이미지가 선량했던 만큼 그런 드라마적인 이미지가 곁들어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건 단순히 민국이를 보는 여자들만의 잘못이 아닌, 민국이 자신의 잘못도 있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인정하고 싶지 않던 현실을 이제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나는 혼란스러웠다.

‘일단… 일단 나가서 민국이랑 대화를 해야겠어….’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른 척하면서 혹시나 자신에게 뭔가 거짓말을 친 게 있진 않은지…. 거짓말을 했다면 그 거짓말이 무엇인지 말이다. 비록 충격적인 진실이었지만 예나는 민국이를 통해 확답을 얻고 싶어했다. 끼이익… 이윽고 화장실 문이 열린 뒤였다.

“아, 속은 좀 괜찮아 예나야?”

“으, 응….”

화장실을 나오자 민국이 기다렸다는 듯 안방 의자에 앉아 말을 건넸다. 예나가 그의 눈을 마주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팔다리가 떨리고 민망함이 몰아쳤다. 정말 저 얼굴이 예나가 알고 있는 그 민국이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뭐… 하고 있어? 밥은 안 먹어…?”

“아, 너부터 먹고 있어. 나 잠깐 아는 지인이 보내준 영상 좀 보려고.”

“아는 지인이… 보내준 영상…?”

“응. 이거 보고 나서 밥 먹으면 계속 웃음이 나온다고 하더라고.”

“……?”

뭔가 말하는 게 어색했다. 마치 꾸민 듯한…. 하지만 민국이가 보려고 하는 영상이 무엇일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천천히 민국이가 있는 안방으로 가보는 예나였다.

“하하하하…! 폭풍 잠수!”

“뭐, 뭐하는 거야 멍청아!”

“크헤헤 이것이 내 패기다. 덤벼라 영웅왕. 왕은 고귀한가?!”

“…….”

안방에 도달한 그녀의 눈에 비춘 것은, 막장 행세를 하고 있는 어느 또라이의 영상이었다. 파뿌리 TV 막장 비제이 랭킹 1위. 그 누구도 손에 넣을 수 없는 또라이스러움은 영상 속에서도 역시 빛이 났다.

‘현대… 왕…!’

예나는 그 영상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채고는 눈을 크게 떴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영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

“…….”

어색하게 미소 짓는 민국이었고 예나는 그런 민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민국은 마치 아닌 척하면서 말을 이었다.

“만석이 형도 참, 이게 뭐가 웃기다고 하하.”

“…….”

“지워버려야지 하하. 예나야, 너부터 밥 먹고 있어. 나 잠시 메일만 확인하고 갈게 하하.”

“으, 으응….”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하는 예나였고, 민국은 모니터에 일부러 켰던 영상을 껐다. 예나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부엌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뭐야….’

마치 현대왕이라는 비제이를 처음 접했다는 듯 어색하게 웃는 서민국. 또한 현대왕의 또라이스러움이 결코 자기 취향은 아니라는 듯 곧장 영상을 꺼버리고 있었다. 예나는 화장실에서 들었던 소리로 말미암아 확신을 했던 것도 잠시, 다시금 혼란을 머금게 되었다.

‘왜 민국이가 현대왕의 영상을 보면서 웃고 있지…? 마치…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것도 하필 이런 타이밍에 뜬구름 잡듯이 말이다. 예나는 부엌의 테이블에 앉아 수저를 들려는 순간 생각했다.

‘혹시… 들킨 거야?’

서민국이 현대왕인지 추궁하기 위해 찾아왔음을 기어코 들켰단 말인가. 예나는 다시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걸 느꼈다. 만일 들킨 거라면… 민국은 자신이 절대 현대왕이 아닌 것처럼 어필하기 위해 저리 행세를 하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정말로 민국이가 현대왕에 대해서 일말도 모르던 사람이었다면?

‘그 화장실에서 들었던 소리도 내가 만일 잘못 들은 거라면…?’

민국이가 비록 여자에게는 상냥하다고 하되, 남자에게 대하는 태도는 또 다를 수 있었다. 학과 사람들에게는 남녀 불문하고 늘 친절하고 부드러운 그였지만 또 진정한 친구 앞에서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어쩜 화장실에서 통화를 했던 사람이 예나가 알고 있는 그 강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예나는 다 알고 있었다. 다른 쪽으로 생각을 전환해보려고 해도 되지가 않았다. 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을… 이미 그녀는 알아버린 것이다.

‘…….’

또한 그와 더불어, 민국이 왜 이토록 그 진실을 예나에게 숨기고 싶어 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녀 역시 지금 민국이가 현대왕이라고 확신을 갖게 된 상황에서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으니까. 진실을 보고 나서도 이토록 부정을 하려한다는 건, 그간 쌓인 민국이의 선량한 이미지가 뒤엎어지는 게 두려워서겠지.

‘아니…야.’

하지만 예나는 밥을 먹다가 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비록 충격은 먹었지만, 그래도 결코 그 선량한 이미지에만 매료되어서 좋아했던 예나는 아니었다.

필시 겉으로 만든 그 이미지 속에도 민국의 본심은 은근히 잠재되어 있을 테고, 예나는 그 잠재된 매력 중 한 가지에 꽂힌 걸 수도 있었다. 또한… 십년 이상 알았던 사이였다. 고작 겉으로 보이는 것 한두 개에 빠져 드라마를 꿈꾸는 여성은 결코 아니었다.

‘민국이는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난 고작 그런 거 하나 때문에 사람을 버리고 그러지는 않는다고….’

정작 예나의 동성 친구도 남자들과 막무가내로 노는 타입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영악한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가? 예나가 그 친구의 그 점 하나 때문에 다른 것들을 모조리 무시하진 않지 않는가?

‘은별 씨는 이걸 다 알고 있던 거겠지… 그러니까 둘만의 비밀이 있던 거고… 더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던 거야….’

이제야! 왜 서민국이 예나의 고백에 그토록 머뭇머뭇거렸는지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진실을 알게 됨으로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예나였다.

‘왜 말을 안 한 거야 민국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나라면….’

나라면 그런 것조차도 받아주었을 텐데!

‘말하도록 만들겠어….’

예나는 민국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포옹력이 큰 여자였다.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 증명되고 있었다.

예나는 밥을 먹다 말고 확고해진 결실의 눈빛을 지었다. 어차피 민국이의 성격상… 가만히 있으면 끝까지 얘기하지 않고 입을 다물 것이다.

설렁설렁 에둘러서 얘기를 해봤자 아닌 척 무시하겠지! 그러나 예나는 이제 그런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았다.

‘말하도록 만들 거야…!’

무엇이든 뚫으려는 창! 그것이 될 준비를 만사 기울이는 예나였다.

‘방금 그 얼굴은… 훗, 그렇군.’

그와 반대로 민국은 의도적으로 영상을 보여주었을 때 선보였던 예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민국은 마치 세계 복싱 대결에서 12라운드를 앞두고 의자에 앉아 있는 복싱 선수를 연상케 했다.

‘들켰단 말인가, 후훗.’

기어코 들켜버리고 말았다. 예나라면 결코 닿고 싶어 하지 않았을 진실…. 그 무궁무진한 진실에 기어코 닿아버린 것이다. 민국은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슈범… 이젠 어떡하지?’

민국은 다른 사람들에겐 알려줄 수 있다 한들, 예나에겐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까닭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로 예나의 현모양처스럽고 온순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들이 아는 인터넷의 이슈조차도 별로 귀에 기울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연예인이든 일부 관련된 기사든 절대로 관심도 안 갖고, 오로지 주변에 있는 자기 할 일에만 충실했다.

그런 그녀였다. 그랬기 때문에 민국에게 매사에 친절했고 온순하게 굴 수 있던 것이다.

‘이런 내 모습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면 친구 사이도 끊길 위험이 있어.’

민국은 진지하게 그리 생각했다. 아무리 예나가 자신을 좋아한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겉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그토록 막장끼가 다분한 민국의 본성을 이해해줄 여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은별이가 있구나.’

은별이는 제외로 두자. 민국이가 봐도 특이한 케이스였으니까.

‘어찌 됐든, 이건 위기다.’

피해야해. 예나가 추측을 한 현황도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한 번 필이 꽂히면 끝까지 가는 타입…. 비록 은별처럼 직관력이 우수한 타입은 아닐 지 언 정 의심을 가지면 끝까지 캐묻는 타입이었다.

그것이 노골적이든 간접적이든. 민국은 오랜 시절 예나와 친구 사이를 했던 만큼 그녀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생각했다.

{자신의 본모습을 결코 그녀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알게 되는 순간 친구 사이는 끝이 날 것이라고.}예나에겐 미안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자신은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드러난 서민국이라 생각했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수많은 여자들의 이상이 될 수 있는 그런 모습만을 갈구하는 것이라 추측했다.

정말로, 정말로 미안하지만 말이다.

‘이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대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민국은 결심했다. 무엇이든 막는 방패가 되자고. 끼이익, 의자에서 일어난 서민국은 부엌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예나가 밥을 먹다가 반쯤 고개를 돌렸다.

“…….”

“…….”

두 사람의 감정이 담긴 시선이 교차하였다. 뚫기 위한 창과 뚫기 위한 방패가 서민국의 집이라는 콜로세움에서 심기일전을 펼칠 판이었다. 민국이 짐짓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다가왔고, 그 미소를 맞받아치는 예나의 미소 역시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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