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마우스에서 손을 때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예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면서 걸음을 물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닐…거야 내가 아는 민국이는…."
언제나 여자를 배려할 줄 알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그런 남자였다.
"그런 민국이가 이런… 이런 파, 파파, 파렴치한…."
그렇다. 비제이 현대왕은 그 누구보다도 파렴치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여자를 욕할 줄 알고, 타인을 위해 욕할 줄 알고, 공과 사를 구분하기 위해 욕할 줄 아는… 그런 남자였다. 애초에 예나가 알던 민국이와는 너무나도 반대 성향이 짙은 인물이었다.
"……."
다시금 모니터로 향해 용기를 내서 재생 버튼을 눌러보는 예나였다.
"은별아! 엣헴!"
"……."
"민국아~."
예나는 그 타이밍에 재생 버튼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금 그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어보았다. 은별아, 민국아, 은별아, 민국아. 이름 앞에 있는 성자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목소리만 들을 때는 그 누가 들어도 예나가 아는 서민국과 강은별이 맞았다.
'둘 다… 인터넷 방송을 하는 비제이…?'
예나는 현대왕과 남고딩의 흔적을 알아보기 위해 이런 저런 녹방을 확인해 보았다.
"저희 둘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으헤헤헤헤."
현대왕이 남고딩과 사귀기로 고백한 날짜의 영상. 이때는 서민국이 한예나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고백을 하던 날이었다. 예나는 그 고백을 듣고 벙이 쪄서는 한동안 민국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었지….
'…….'
그러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예나는 다음 영상을 짚어보았다. 이번엔 콩딱지와 현대왕이 치고박고 노는 영상이었다.
"아따 온니쨩 데스까 그러시면 안 되지와요!"
"이건 누가 들어도 강서라… 그 아이야…."
강서라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다면, 그녀라는 것을 곧잘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특히 '온니쨩 데스까'같은 걸 현실에서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예나는 자신의 불안한 예상이 서서히 확신으로 다가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은별이 이 앙칼진 년! 빈유 같은 여자롤세!"
"빈유라고 하지마 멍청아!"
"빈유… 맞아…."
예나는 은별이의 가슴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는 없어도 너무 없었다. 때문에 여기 현대왕에서 지껄이는 빈유라는 단어가 몹시도 공감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공감은 한층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민국이도… 은별 씨도… 여기 영상에 나오는 모든 거랑 걸맞아…. 하지만… 콩딱지 이 사람은 왜….'
왜 남자일까? 왜 성별이 남자인 걸까? 말투나 하는 행동은 딱 봐도 강서라와 일치했는데 말이다.
'믿지 못하겠어… 아니, 믿을 수 없어!'
다시금 의자에서 드르륵 일어나는 예나였다. 혼란이 맴도는 그녀의 얼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부터 자신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창 머리를 골썩이던 그녀였다.
"……."
우연치 않게 그녀의 눈길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민국이에게… 연락해서….'
연락해서 묻는들 뭐라고 할까? 민국이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걸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만일 맞다고 하면 자기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예나는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할 지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민국아… 왜… 왜 그런 거야… 대체 왜….'
왜 그런 음탕하고도 천박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방송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예나는 확신하기에는 조금 이르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을 조금 늦추자고 생각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 거야….'
이렇게 마음속으로 골을 썩혀봤자 자기한테만 불이득이다. 예나에겐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서민국과 실제로 접촉하는 게 좋을 것이었고. 또르르르르르르…. 뚜르르르르르르….
"으음 여보세요."
"민, 민국아?"
"누구, 아? 예나야?"
왠지 낮잠을 자고 있던 목소리 같았다. 예나가 조금 미안해하면서 두 손으로 휴대폰을 부착하고 물었다.
"미안해. 자고 있었어? 다시 끊을까?"
"아, 아니야. 그런데 왜 연락했어? 오늘 밤에 보기로 한 거 아니었나?"
예나는 오늘 약속을 떠올리고는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과는 정확히 일곱 시간 전이었다.
"응… 저기 그게…."
"……."
"빠, 빨리 가서 받고 오는 게 좋겠어서! 혹시나 실수해서 늦어버릴까봐…."
예나는 대충 둘러댔다. 실상은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비록 큰 거짓말이 아니었으나 예나는 왠지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 내심 민국이에게도 미안했다.
"흠, 아무래도 그렇지? 역시 목숨이 달린 문제니까."
"어, 어? 으, 으응…."
더 쉽게 납득해주니까 미안함이 벅차올랐다. 지금 당장에라도 거짓말이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랬다간 숨겨진 진실에 닿기 어려워질 것 같았다. 예나는… 그토록 민국이가 숨기고 있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
"으음, 그러면 지금 올래? 어차피 나도 그 준비하는데 얼마 걸리진 않을 거 같으니까."
"주, 준비…?"
"아 준비가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니고… 그냥 옷 갈아입고 그러는 거."
"아… 으응, 아, 알겠어! 빨리 갈게!"
그리고 통화를 끊은 예나였다. 마치 도둑이 제 발 지린 마냥 '휴우…'하고 간 떨어질 듯 숨을 내쉬는 그녀.
'이렇게 착한 민국이가 정말 그런 짓을 했을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왕이란 작자의 영상 게시물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간에 예나는 슬그머니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하였다. 최대한 단정된 복장으로 계단을 내려온 예나를 맞이한 것은 그녀의 동생, 예슬이였다.
"언니! 어디 가요?"
"으응, 잠시 나갔다 오게요. 어머니 말 잘 듣고 있어야 해요?"
"네!"
예슬이가 '빠빠!'하면서 손을 흔든다. 예나는 그런 예슬이에게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주면서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을 나온 예나는 길을 거닐면서 창창한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
그녀의 부드럽던 걸음은 어느 덧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절도 있게 바뀌어 있었다.
**
마침내 민국이네 집에 도착한 예나! 바깥에서 민국이의 집 2층을 올려다보던 예나는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가슴에 한 손을 얹었다.
'괜찮을 거야… 민국이가 그럴 리 없어….'
절대로, 자신이 아는 민국이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예나였지만 행동은 그것이 진짜인지 판단하기 위함이 짙었다. 이윽고 예나가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손등으로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정적이 오는가 싶더니 현관문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끼이익.
"예나야, 어서 와."
"으응… 민국아. 안녕."
그러자 깔끔하게 입고 예나에게 인사하는 서민국! 방안에서조차 서민국은 깔끔하고 단장된 옷차림이었다. 예나는 그것을 자연스레 훑으면서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서민국은 반달 같은 웃음으로 그런 그녀를 맞이했다.
'이런 민국이가….'
'으헤헤헤 씨발! 폭풍 잠수!'
'그런 사람이라고…?'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는 얼굴! 민국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예나. 그런 예나의 시선에 민국이 '응?'하면서 의문을 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야… 묻기는 무슨…."
묻었다면 잘 생김이 묻었으리라.(…ㅋ) 예나는 사뭇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내리 숙였다. 그의 앞에서는 자꾸만 가슴이 콩닥콩닥거리는 게 별 수 없는 청춘이었다.
"그럼 잠시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약이랑 먹을 것들 가져올게. 아, 혹시 식사는 했어?"
예나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안 했지…?"
"그래? 그럼 오늘은 내가 요리해줄게. 너 늘 나한테 도시락 싸주곤 했었잖아. 이제 내가 보답 좀 해줘야지."
"……."
예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부드러운 쇼맨쉽은 정말이지 여자들의 마음을 녹이기 일쑤였다. 이윽고 안방으로 안내한 민국이를 따라서 들어온 예나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항상 둘러보던 곳이었기에 익숙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응? 뭐 찾는 거 있어?"
"으…으응? 아, 아니야! 그런 거 없어…."
예나가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곧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곧 준비해서 올게."
"응 고마워…."
그리고는 예나가 사뿐히 침대에 앉자, 그것을 목도한 민국이 웃음 지으면서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은 안방과 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방에서 예나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민국이는 알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 사실을 어림짐작하고 있는 한예나.
"……."
당연지사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게 되었다.
'민국이가… 민국이가….'
범인은 반드시 사건 현장에 증거를 남겨둔다고 했다. 그것이 의도한 일이든, 의도치 않은 일이든. 예나는 만일 민국이가 현대왕이라면 비제이와 관련된 물건이 분명 있으리라 감안했다.
"……."
이윽고 예나의 시선이 어디론가 고정됐다. 그곳에는 컴퓨터 한 대가 놓여져 있었고, 본체를 비롯해서 각종 컴퓨터 부품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유독 눈에 띄는… 컴퓨터 전용 마이크가 하나 있었는데.
"……."
예나는 소리가 나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가 그것을 붙잡아 보았다. 조심스레 디자인을 확인해본다.
'옛날… 마이크야….'
예나는 마이크 뒤에 적힌 제품명을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그리고 그 제품명 그대로 게이버에다가 검색해 보았다. 그러자….
[방송 전용 마이크.]
라는 글자가 훤히 띄어져 있었다.
'…….'
"예나야!"
"아! 응…?!"
부엌 안에서 외치는 민국이었다.
"볶음밥 할 건데 고추장 좀 넣을까? 김치 볶음밥하려고 하거든."
"응… 아, 아무거나 다 좋아! 민국이가 해준 거라면!"
"그래? 다행이네."
다시금 요리에 몰두하는 서민국. 후라이팬을 가지고 볶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예나가 한숨을 쉬면서 다시금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방송용 마이크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예나가 컴퓨터 쪽의 서랍장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서랍장에는 역시 아무것도 없을까…?'
비제이랑 서랍장의 도서들이 관련될 것 같진 않았다. 이윽고 컴퓨터 쪽으로 다시금 고개를 돌리는 예나였다.
'…….'
그럼 역시 모든 것은 이 컴퓨터 안에 숨겨져 있을 터. 예나가 우물쭈물 입을 놀렸다.
"미, 민국아!"
"응? 왜 그래?"
"그… 커, 컴퓨터 좀 한 번 켜봐도 돼?"
"어? 컴퓨터?"
민국이가 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애초에 예나는 민국이의 물건을 단 한 번도 함부로 만진 적이 없었다. 그것이 가장 기본이 되는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었다. 이윽고 민국이의 말을 기다리던 예나였다. 잠시 뜸을 들이는 듯한 민국. 그런 그의 행세에 이상함을 느끼던 찰나….
"그래, 그럼 잠시 사용해."
"고…마워…."
그리고 컴퓨터 전원 버튼을 곧장 누르는 예나였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한 시라도 빨리 켜지길 기다렸다.
볶음밥을 하고 난 뒤 민국은 안방에 줄창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컴퓨터 확인은 불가능할 테니까! 이윽고 컴퓨터의 메인 화면이 등장했고, 민국이가 오는지 안 오는지 둘러보던 예나가 곧장 고개를 들이밀면서 마우스를 딸칵딸칵 움직이기 시작했다.
"……."
민국이에게 매우 미안한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같아도 너무 같은 점이 많지 않은가! 그냥 쉽게 흘겨 지나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윽고 하드 드라이브의 폴더들을 뒤적이던 예나였다. 무언가 하나 대단한 것을 발견하고는 '아…!'하고 탄성짓는 그녀였다.
"……."
야동 파일이었다. 폴더함 이름은 야구 2012년 베스트 영상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 그 내용물은 하나같이 굉장히 야한 영상들이었다. 예나가 얼굴을 붉히면서 순간적으로 마우스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