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43화 (143/369)

143화

"……."

당연지사 유이는 경계하는 눈빛을 지었다. 아무리 칵테일바라고 해도 결국엔 술집 아닌가? 도수가 높은 칵테일도 판매하는 것을 경험이 전무한 그녀도 알았기에 견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민국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착각이 심한 여자군요 유이 씨."

"……."

"제가 당신을 술에 취하게 한 뒤 이러쿵저러쿵 으쌰으쌰 할 생각이었다면 뭣하러 칵테일바로 데려가겠습니까? 오히려 취한 당신이 더 무서운데 말입니다."

그러하다. 유이의 술버릇은 정말이지 지나가던 사람들도 전부 깨갱거리게 만들 것이었다. 유이는 그 말에는 차마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디 마땅히 대화 나눌 만한 곳도 없는 거 같아서 여기로 정한 거니까 그냥 따라 들어와요. 정 칵테일 마시기 어려우면 주스나 마시면 되지."

"……."

그리하여 유이를 데리고 칵테일 바로 들어온 민국이었다. 인사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은 민국은 칵테일 메뉴판을 둘러보았다.

'오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맞은편에 앉는 유이.

"유이 씨, 혹시 이 칵테일들 중에서 아는 게 있습니까?"

"……."

유이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도 칵테일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민국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요."

"네네."

이윽고 민국의 부름에 직원이 한 달음에 달려왔고, 민국은 메뉴판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여기서 괜찮은 칵테일 뭐가 있을까요? 도수가 높지 않은 거로요."

"도수가 높지 않은 거로 말입니까? 어디 그럼…."

이윽고 직원이 괜찮은 것들을 체크해주기 시작했고, 민국은 자세히 설명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거 이걸로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카운터로 돌아가는 남자 직원을 뒤로하고, 민국은 맞은편의 유이를 보았다.

"그래도 화 좀 풀었더니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네요."

"……."

"너무 그렇게 기운 없이 있지 맙시다. 재미 없당깨요."

그러면서 민국은 남자 직원이 주고 갔던 물 한 잔을 입에 머금었다. 유이는 그런 민국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만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때문에 현재 다가온 민국조차도 실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 접근한 건 아닌가 싶었다.

무조건 신뢰했던 저격고수, 강철남까지 그런 식으로 음모를 꾸미고 접근했었으니까.

"기다리시던 칵테일 나왔습니다."

"오, 금방 나왔네요."

칵테일이 금방 주문 제작이 되었고, 민국의 앞에 놓인 것은 푸른색 바다 같은 느낌의 칵테일이었다. 유이의 앞에 놓인 건 단맛이 느껴질 듯한 핑크빛의 핑크고래 같은 칵테일이었고 말이다. 민국은 한 모금 입에 머금어본 뒤 중얼거렸다.

"맛있네요. 유이 씨도 한 번 드셔보시죠."

"……."

"어서요."

민국은 친절하게 맞은편의 칵테일을 가리켰다. 마냥 성드립만 치기에 바쁘던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자신을 동정해서일까. 아니면…. 유이는 일단 칵테일이 나왔으니 만큼 한 모금 마셔보기로 했다. 후루룩.

"……."

"어떻습니까? 맛 죽이죠?"

물론 핑크빛의 칵테일은 마시지 않은 민국이었지만, 그래도 직원이 꽤나 잘 추천해준 것 같았기에 좋은 맛일 거라 추측했다. 이윽고 호평을 기다리던 유이는 빨대에서 입을 때고 가만히 앉아있는 유이를 보면서 '에라이'하고 말했다.

"공기 같은 캐릭터 영원히 간직해라. 두 번 간직해라."

"……."

입이 심심했던 민국은 계속해서 칵테일만 빨아댈 따름이었다. 정작 대화를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으나, 그녀는 입도 뻥끗할 생각을 안했으니 말이다.

"……."

유이는 그런 민국을 외면하면서 칵테일의 빨때에 다시 입을 붙일 따름이었다.

**

그로부터 20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민국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본래라면 지금쯤 은별이가 학교를 끝내고 와야만 했다. 하지만 모임 과제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건 어렵다고 하였으니, 민국은 이제 슬슬 가는 게 어떨까 싶었다.

'어차피 이 양반도 자살 기도 같은 건 안할 것 같으니까.'

그래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준 게 다행이라 생각하는 민국이었다. 유이도 계속 고개만 내리 숙인 채 가만히 있으니, 민국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나가자고 얘기하려고 들었다. 드르륵.

"유이 씨, 이제 갑시다. 여기 계산이요."

"네!"

직원이 있는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려던 민국이었다. 의자에서 막 일어났던 민국은 뭔가 흔들흔들거리는 맞은편을 보고는 의문을 품었다. 이윽고 당면을 보자 유이가 조금씩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오오 출렁출렁."

"……."

"이 아니라, 유이 씨 또 왜 그러십니까?"

문득 질문을 던졌지만 반응도 없는 유이였다. 민국은 자꾸만 몸을 흐느적흐느적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강한 의문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가 마셨던 칵테일을 들어서 확인하는 민국이었다.

"……."

냄새도 맡아보고 스리슬쩍 한 입 마셔본 민국이었다.

"……."

잠시 침묵하는 민국. 이윽고 카운터의 직원에게로 향해서 물음을 던진다.

"저기요."

"네네."

"혹시 이 칵테일. 도수가 높나요?"

그 말에 직원이 잠시 눈을 크게 뜨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도수가 높은 편은 아니에요. 보통 음료 수준이죠. 손님이랑 마신 거랑 비슷할 거예요."

"아, 근데 술 경험이 전무하거나 그런 사람이 마시면 취할 정도인가요?"

"으음… 사람에 따라 그럴 텐데. 아마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사람이면 많이 취할 거예요. 근데 그런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오메나 씨발."

"……?"

민국은 두려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흐느적거리는 유이가 이젠 공포의 분위기로 다가왔다.

"여기 계산이요."

"네."

"빨리 해주세요. 이 가게 난장판이 되기 전에 어서요!"

"아, 네!"

민국의 재촉으로 허겁지겁 거스름돈을 쥐어준 직원이었다. 민국은 그것을 받자마자 후다닥 유이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한 쪽 팔을 부축해주면서 천천히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유이 씨. 빨리 밖으로 나갑시다."

"……."

"부디 참으시옵소서. 여기서 봉인 해제되면 난리납니다. 경찰에 끌려가요."

그녀의 술버릇을 알았기에 민국은 최대한 자제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카운터의 직원이 유이의 모습에 '안녕히 가세요….'하면서 얼떨떨하게 인사했다. 민국은 그 인사를 받아주는둥 마는둥하면서 일단 유이를 칵테일바 건물 아래 층으로 데려왔다. 무사히 밖으로 데려온 민국이 곧 그녀를 근처 벤치에 앉혔다.

"휴우…."

잔뜩 긴장했는지 이마에 나 있는 땀을 닦으면서 민국은 안도했다. 허나 그 순간이었다.

"휴우?"

"……."

"휴우…?"

민국이 내뱉는 한숨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소 여린 목소리였지만, 나름대로 파워풀함이 갖추어진 사악한 음성이었다. 민국의 고개가 자연스레 유이가 앉아있는 벤치로 돌아갔다.

"휴우라고 했냐 지금!"

"으아악!"

벌떡 일어난 유이가 민국의 멱살을 붙잡았다. 강력한 완력에 이끌린 민국이 눈을 크게 뜨면서 경악했다. 맞은편의 유이는 어느새 악마로 변해 있었다!

"휴우? 휴우…? 날 보니까 한숨이 나오나 보지?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 보지!"

"아, 아닙니다! 그럴 리 없습네다! 정신차리십쇼 유이 씨!"

"정신은 이미 차리고 있어!"

버럭 소리치는 그녀였다. 눈빛에는 독기가 담겨 있었다.

"왜? 이제 너도 날 갖고 노냐? 내가 이렇게 무시 당하고 사니까 우스워 보여?!"

유이의 진심 어린 분노였다. 어디까지나 술버릇으로 말미암아 튀어나온 진심이었지만, 민국은 그 진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당황하던 표정이 서서히 진지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윽고 무섭지만… 유이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민국은 말을 이었다.

"원래 세상이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어쩌겠습니까?"

"뭐야!"

"살려주세요."

위압감에 비굴하게 굴면서도 민국은 할 말을 이어갔다.

"유이 씨는 확실히 일반 여자들과는 다르게 얼굴도 죽이고 몸매도 죽이고 가슴도 큽니다."

"가슴 크다고 얘기하지마!"

"좋은 건데 왜 얘기하지말래 이 여자야!"

"없애버리겠어!"

"살려주세요."

또다시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장점이 있다는 건 곧 단점이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와 시샘을 받을 수밖에 없단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단점만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그 누구보다 천운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요."

그 말에 유이가 잠시 민국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천운?'하면서 비릿하게 비웃음을 그렸다. 그건 진짜 술에 취했을 때나 드러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부모가 없어서 무시 당했고, 가슴만 크다고 변태적인 시선을 받고, 재능이 있으면 그걸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들만 가득한 게 천운이라고?"

유이의 진심이 드러나고 있었다.

"당신 같은 남자들도 항상 내 몸만 보고 날 노려. 강철남 그 새끼도 마찬가지야. 물론 너도!"

"그건 당신 가슴이 유난히 크니까 그런 거지!"

"뭐야!"

"살려주세요!!!!"

이번엔 진짜 구조 요청을 하듯 외치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살려달라고 비는 와중에도 민국은 말을 이어갔다.

"유이 씨 가슴을 보는 건 당신 가슴이 그 어떤 가슴보다도 탐스럽기 때문이고, 남자들의 본능적인 욕구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당신이라면 자기 아기를 낳아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거죠."

"거짓말하지마! 다들 말은 그런 식으로 하면서 진심으로 다가오는 남자들은 하나도 없었어!"

많은 사람을 원한 게 아니었다.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만 자신의 곁에 있어주었다면 그것으로 족했을 텐데. 유이는 끝내 그 정도 구원도 받지 못했다.

"있을 겁니다."

"……."

"정말 있어요. 유이 씨."

하지만 민국은 그 말에 곧잘 반박했다.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술에 취한 유이는 그 눈을 보는 순간 흥분한 표정 그대로 굳어버리는 자신을 느꼈다. 유이는 어디까지나 진실된 남자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이 세상은 가면 갈 수록 타락하고 있고, 그건 단순 사회 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고 있다. 이성과 놀기를 장난으로 알고, 그저 자신만의 쾌락을 충족시키기에 한 시 바쁜 사람들. 그것을 마냥 나쁘다고 하기에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터라 비난하긴 어렵겠지. 허나 세상엔 그저 자신만의 쾌락이 아닌, 서로 간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배려하는 연인도 존재하는 법이었다.

민국은 그런 사람은 타락한 이 세상에도 아직까지 존재할 거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저라던가 말입니다."

"……."

"어떻습니까 유이 씨? 이참에 저를 좋아해서 제가 거느리는 여인 중 한 명으로 거듭나는 게? 나는 하렘왕이 되고 당신은 진실된 남자를 만나고!"

"……."

"세상에 나보다 진실된 남자가 있을 거 같으면 나와보라 하십쇼! 저는 바람을 필 때도 당당하게 제 여자친구에게 나 바람 핀다! 라고 소리칠 남자입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허가를 맞고 바람을 핌으로서 그것은 바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죠!"

"……."

"푸헤헤헤헤헤헤!"

투다다다다다다다다닥! 거친 발차기 굉음과 더불어 민국은 또다시 하늘을 날았다. 하늘을 날던 도중 돼지 소리를 쉴 틈 없이 뿜어대던 민국이었고, 이윽고 처참해진 몰골로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마는 그였다.

"으에에에에 기모찌…. 기모찌요…."

"……."

그렇게 쓰러진 민국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유이였다. 술에 다소 약하기 때문인지, 술버릇으로 그나마 정신을 버티고 있던 그녀가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민국은 그런 유이의 모습을 목도하고는 잽싸게 일어서서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안아주었다.

"어우 늦을 뻔했네. 머리부터 부딪혔으면 사망이었습니다 유이 씨."

"……."

취기에 목말라 서서히 눈을 감는 그녀를 보면서 민국은 말을 이었다.

"언젠간 이런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겠죠. 그러니까 기운 내십쇼 유이 씨."

"……."

"집에 갑시다."

꿈속에 우연히 던져지는 듯한 그런 목소리를 들으면서, 유이는 오기로라도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사람 마음이 언제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듯이, 강철남으로 인해 구멍 났던 그 빈자리가 또 다른 누군가로 채워지는 걸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제 방송 에피소드 갑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