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리하여 최유이 구하기 프로젝트가 성사되었다. 최유이의 무엇을 구해준다는 것인지는 어렴풋이 아리라.
사랑과 더불어 사람과의 신뢰를 완전히 저버린 최유이, 그녀! 민국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어렴풋이 그녀가 얼마나 사람이란 존재에게 크게 실망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비단 그런 사람만이 있으랴? 절대 아니다!
'나 같은 진솔한 변태도 있다는 걸 그녀에게 깨닫게 해줘야 한다!'
픽업아티스트처럼 졸렬하게 속마음을 숨기고 접근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서민국은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민국은 장롱에서 옷을 꺼내서 고를 때 바바리 코트를 입을까 했다. 물론 속옷은 안 입고 말이다.(???) 왜냐하면 바바리맨처럼 진솔한 변태가 어디 또 있겠는가?
'음, 농담 농담.'
아침부터 혼자서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서민국은 오늘 일정을 떠올렸다. 밤에 서라와 예나가 찾아올 것이었고, 은별은 대학교가 끝나는 즉시 유이가 사는 전철역으로 올 것이었다.
은별은 유이가 사는 집 위치를 아예 모르고 있었으니 나중에 민국이 데려가서 배웅해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 고로 지금은, 오늘까지 학교를 나가지 않는 민국이 홀로 유이를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이 유이 씨]
[답장 좀 해보시라유]
[아따, 시방 거시기 출렁이는 그대의 가슴을 내 아니께, 답장 좀 해보시라유]
민국은 유이에게 몇 번이고 연락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휴대폰 연락도 통 받지 않았고, 메시지도 받고 있는 건지 마는 건지 답장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메시지로 글자를 전달하면 일체 반응도 안하던 그녀였으니….
'슈방, 설마.'
민국은 돌연 안 좋은 징조를 떠올렸다. 상상의 나래에 빠지는 서민국이었다. 삐용삐용!
'아이고! 시방 옆집에서 이게 무슨 일이래요!'
'왜 왜? 옆집에서 왜 그러는데?'
'글쎄 어떤 가슴 큰 여자가 갑자기 자살했다는 거 아녜유! 정말이지 큰 일이래유!'
'오메! 집값도 떨어지고 소중한 우리나라의 여자 인재도 사라지다니! 이런 지옥 같은 일이!'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으로 안타까워하는 남자들과 여자들. 근데 그 순간, 유이가 살던 집 땅에서 무언가가 팍하고 터져 나오는데.
'엇!'
'어엇!'
'서, 석유다! 석유야!'
'세상에! 가슴 큰 여자 집에서 석유가 나왔어!'
그리고 한국은 아랍처럼 석유 나라로 등극하여 세계 경제적 1위 국가가 되는….
"아침부터 딸을 쳐서 그런가,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쏠리네."
정신 차리고, 단장을 마친 민국은 집을 나왔다. 곧장 지하철을 타고 유이네 역으로 향한다.
"휘유우~."
이윽고 휘파람을 불면서 유이네 역에서 내린 민국은 곧장 길을 찾기 시작했다.
"으음, 오늘은 길을 잃진 않으리다."
당연한 것이었다. 민국은 적어도 길치는 아니었다.
"근데 어디 방향이지?"
다만 방향치였다. 덕분에 혼자서 헷갈리는 방향을 고루잡느라 10분 걸릴 걸 30분이나 해맸다. 가을답지 않게 뜨거운 햇볕에 핵핵거리면서 더워하던 끝에, 마침내 유이 집에 당도한 민국이었다.
"입냄새도 오케이, 키도 오케이, 내 외모도 만사 오케이군. 자, 어디 한 번 들어가볼까?"
유이는 민국이 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민국이 알려주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연락을 몇 번이고 했고, 메시지로 찾아가겠다고 남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체 답장이 없으니 이건 뭐….
"어이 유이 씨!"
민국은 현관문을 탕탕 두드렸다. 똑똑거리면 왠지 반응이 없을 것 같아 거세게 쳤다.
"유이 양반! 빨리 나와서 우리가 빌려준 돈 갚아야지! 엉?! 안 그래?!"
혼자 쇼를 하면서 민국은 불량하게 건들건들거렸다. 어디 드라마에서 본 건 있어 가지고, 꽤나 연기를 기가 막히게 하는 민국이었다.
'아따, 연기자 해도 되겠는데?'
스스로에게 감탄하면서 자뻑을 하던 것도 잠시,
'그나저나 정말 안 나오네.'
민국은 소리나게 문을 두드려도 응답 하나 없는 집의 모습에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설마 이 여자 진짜 죽기라도 한 거 아니야?'
은근 그런 상상을 하면서 민국은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보았다. 철커억.
"어? 이것 보쇼?"
민국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관문이 손잡이를 잡자마자 아주 태연하게 열려버린 것이다. 민국은 쉽사리 열려버린 현관문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입을 열었다.
"설마 문도 안 잠근 건가? 아니면 도둑이라도?"
도둑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도둑이 들어왔다면 도둑이 불쌍하다. 괜히 유이의 가슴 한 번 만져보려다가 생명이 끝날 것이었으니까. 민국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다가 아무도 없자 현관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웬일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민국은 안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의 전등불은 켜져 있었고, 그건 복도부터 거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2층으로 가는 계단 쪽은 꺼져 있는지 어두컴컴했다.
"유이 씨? 안 계십니까?"
민국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그녀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호명한들 그녀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민국은 '와, 미친 듯이 불안하게 하네.'라고 중얼거리면서 신발을 벗고 복도를 걸었다. 성큼성큼, 소리나지 않게 괜히 도둑처럼 걸어가면서 민국은 거실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음, 없는데."
거실의 불은 어제처럼 켜져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유이는 거실에 있지 않았던가? 도둑이 들어왔다고 보기에는 현장도 어질러진 구석이 하나도 없었고, 여전히 사람의 감촉 하나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방이었다.
'가족이 없다는 건 역시 이런 건가.'
민국은 돌연 자신이 자취방에서 혼자 생활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비록 가족이 없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차갑다는 게 무엇인지는 민국도 내심 이해할 수 있었다.
'거실엔 없고 부엌에도 없고, 설마 화장실인가?'
민국은 엇흠하면서 어색하게 기침을 한 뒤 화장실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똑똑똑 노크했다.
"설마 거기서 손목 긋고 죽어 있는 거 아니지요?"
대답은 없었다. 민국은 불안 반 공포 반으로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우 씨발 깜짝이야!"
민국은 무언가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존나 잘 생겨서 놀랐네 와나!"
화장실 문을 열자 그 앞에 바로 거울이 있었다. 졸지에 어두운 화장실 내부에서 자신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보게 된 민국은 저도 모르게 외모에 감탄하고 말았다. 이윽고 쓰라린 가슴을 가라앉히면서 민국은 화장실 문을 닫았다.
'여기 없다면 2층밖에 없다는 건데.'
이거 졸지에 도둑처럼 주변을 샅샅이 뒤적이게 되었다. 분명히 민국이 의도한 것은 이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올라갑니다 유이 씨? 2층 올라가요 유이 씨!"
괜히 소리를 질러 보면서, 민국은 어둠으로 가득한 2층 계단을 성큼성큼 내딛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지 않게 발에 힘을 최대한 뺐지만, 낡은 계단인지 조금씩 끼익끼익 거리는 게 영 불편했다.
'이건 좀 색다른 공포구만.'
공포게임의 주인공이 된 느낌으로 민국은 마침내 계단을 전부 올랐다. 그러자 딱 하나만의 방이 있었다. 2층은 꽤나 좁은 편이었던 것이다.
"왠지 저기 있을 거 같은데."
민국은 천천히 방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손등으로 똑똑 노크를 해보았다. 숨을 죽이고 반응을 듣자니…. 역시 이번에도 없었다.
"허참, 유이 씨? 거기 있죠? 엽니다?"
반응이 없다.
"저 진짜 열어요? 저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들어가서 제 잘 생긴 얼굴 보고 깜짝 놀라지 마십쇼!"
또 한 번 자뻑을 하면서 민국은 방문 손잡이를 세게 잡았다. 그리고 돌리면서 방문을 당겼다. 끼이익!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내부가 펼쳐졌다! 그러자 그곳에는….
"……."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어떤 사진들과 더불어 여러 서적들, 침대가 있었다. 민국은 안에 들어온 다음에 벽면을 더듬거리다가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보았다. 그러자 방안이 그대로 드러났다.
"헐."
보고 나서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민국도 자기 방을 조금은 더럽게 쓰는 편이었지만 이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1층에 비해서 2층 방은 어찌나 더럽던지, 침대에 온갖 책들이… 그리고 여러 문서들이 가득이었다. 어디 누워서 잘 곳도 없어 보였다. 민국은 무엇을 밟고 움직여야 할까 하면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아니, 이 사람은 책을 사랑해도 그렇지 침대에서 책을 자게끔 해두면…."
그리고 책들이 2층처럼 쌓여 있는 침대로 향했을 때였다. 민국은 그만 발치에 있던 책에 앞발이 걸려서 중심을 잃고 말았다.
"어어억! 사람 살려!"
허둥지둥대다가 결국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는 곳으로 안면이 충돌하고 만다. 콰당탕탕! 부스르르르륵!
"아이고야!"
비명을 지르면서 그대로 침대에 고꾸라진 민국이었다. 책에 코를 박아서 코가 상당히 시큰시큰거렸다. 민국은 한 손으로는 자기 코를, 나머지 손으로는 침대를 잡았다. 물컹.
"응?"
하지만 나머지 손으로 잡은 침대의 감촉이, 왠지 생각 이상으로 부드러웠다.
"시몬스 침대가 이 정도로 감촉이 좋을 리가 없을 텐데?"
아무리 침대는 과학이라지만, 그 침대가 과학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자면 세 사람이 되기 때문인 것이었다. 침대의 감촉 자체가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었다.
"?"
이윽고 자신의 나머지 손으로 고개를 옮겼던 민국이었다. 그러자 두툼한 두 개의 산봉우리처럼, 침대에서 유난히 솟구쳐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더불어 그 중에 한 개는 민국의 커다란 손아귀에 감싸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면적을 전부 감쌀 수가 없었다. 말캉말캉. 민국은 두어 번 더 그것을 만져보았다.
"이건?"
"……."
"오오, 이건?"
말캉 말캉. 말캉 말캉. 왠지 중독되어서 만지길 수 초, 쓰러졌던 책들 중에 앞에 있던 책들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돌연 보이는 것은….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민국은 뭔가 데미지를 입지도 않았는데 절규 같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화들짝 손을 회수했다. 그리고 구석진 곳으로 몸을 잽싸게 물리면서 두 손으로 싹싹 빌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그만 그쪽에 큰 산이 있길래 한 번 등산만 해보고 싶었습니다! 에베레스트를 등산하는 등산객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네?! 제발!"
"……."
책이 쌓여 있는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다름 아닌 유이였다. 민국은 그것을 보게 되자 소스라치게 놀라서 싹싹 빌었고 말이었다. 하지만 빌기를 어연 수 초…. 왠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민국은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다.
"유이 씨?"
"……."
민국은 뜬 눈으로 유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또한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미동조차 없었다.
"뭡니까 유이 씨? 저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세상에 이런 착한 여자가 다 있나!"
"……."
"유이 씨?"
몇 번이고 불러보았으나 미동도 없자, 민국은 그제야 뭔가 심각함을 느끼고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유이 근처로 얼굴을 가까이 하자, 유이가 그제야 반응하듯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아주 느리게 민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민."
이윽고 민국의 모습을 확인한 유이였다. 마치 그가 왔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는 것마냥, 유이의 초점이 조금은 돌아오는 모습이었다.
"국…."
"……."
말미를 흐리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혹시나 싶어서 유이의 이마에 자연스레 손을 가져갔다. 이마가 불덩이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가 아파 보이진 않았다.
'아니….'
민국은 얼마지 않아 그게 틀렸음을 알았다. 유이는 아팠다. 지금 그 누구보다도 죽을 듯이 아팠다. 그 사실을 얼굴만 보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너스레를 떨려던 것도 잠시, 민국은 진지한 얼굴로 유이의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잡고 올리면서 말했다.
"일어나세요 유이 씨."
"……."
민국을 통해서 천천히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유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