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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39화 (139/369)

139화

<최유이 구하기 프로젝트>

민국이 난데없이 거론하는 최유이라는 주제에 관해 은별은 매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 유이와는 별로 접촉이 없던 것을 알고 있던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민국에게서 최유이에 대한 관심이 언급되자 혹시나 다리 한 짝을 다른 곳에다 더 걸치려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한 편으로는 그의 평소에 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에 물었다.

"최유이 씨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고, 일단 예나부터 보내고 나서 단 둘이 얘기하자."

"……."

은별의 의심을 마치 기존부터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마냥 그렇게 달래면서 말하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졸지에 그에게 속내를 읽히자 조금 분한 감정을 느꼈지만, 얼마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순순히 수긍하는 은별의 모습에 흐뭇하게 미소 지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끙…'하면서 인상을 찡그렸지만 말없이 그 손길을 느낄 따름이었다. 이윽고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언제 은별을 쓰다듬어주었냐는 듯 민국이 잽싸게 손을 회수하면서 몸을 돌려 예나를 보았다.

"예나야 괜찮아?"

"……."

은별은 그런 민국의 등을 따갑도록 노려볼 따름이었다. 또다시 민국의 약(?)으로 말미암아 한 차례 구역질을 했던 예나가 조금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을 가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민국을 보고는 '으응…'하면서 대답하는 모습이었다.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상태를 보니까 영 좋지 않은 거 같은데. 집에다 데려다줄까?"

"뭐어?"

은별이 굉장히 황당하단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허나 예나가 그런 은별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줄 수… 있어…?"

"물론이지. 당연한 거잖아. 소꿉친구인데."

"……."

민국의 문어발에 짜증나서 한 마디하려던 은별이었다. '소꿉친구'라는 단어가 은근히 선을 긋는 단어임을 직감하고 은별은 언동을 멈추었다. 예나는 따스한 배려에 잠시 감동하던 것도 잠시, 그 단어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짐짓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좀 부탁할게."

"그래, 조금만 기다려. 저녁되니까 날씨가 쌀쌀할 거 아니야? 옷 좀 가지고 올게."

"으응."

그리고 화장실 앞에서 입을 가리고 있는 예나를 뒤로하고 민국은 후다닥 안방으로 향했다. 민국이 안방에서 옷을 찾는 동안 단 둘이 남게 된 예나와 은별. 은별은 자신은 뒤로하고 예나를 챙기기 위해 안방으로 향한 민국을 쏘아보다가 예나를 돌아보았다.

예나는 은별과 눈을 마주치자, 가리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때어놓았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그 약을 마시는 순간 안색도 창백해졌고 상태도 영 안 좋아 보였으니까. 이윽고 은별이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홱 돌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오늘 일은 없던 거야."

"말 안 해도 알아요…."

민국에게 대충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언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다 말해준 건 아니었다. 민국이를 거론하면서 투닥투닥 싸웠다던가, 서로 저도 모르게 일말의 호감을 느꼈다던가.

흑마법사가 건네준 제품이 담긴 마법으로 말미암아 생긴 현상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두 사람 딴에선 자신의 일시적으로 생겼던 감정에 대해 심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민국을 기다리길 수 초, 옷 두 개를 가지고 나타난 민국은 한 벌을 예나에게 건네준 뒤 말했다.

"입어. 면연력 떨어졌을 때는 감기 걸리기 쉬우니까."

"고마워…."

늘 민국을 보필하던 예나였는데, 이번엔 그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예나는 민국에게 이런 식으로 배려를 받게 되자 나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아픈 건 둘째로 간다고 할까. 은별은 뾰로통한 얼굴로 이를 불만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민국은 예나를 데리고 현관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선두로 예나를 보낸 뒤, 은별에게 조심스럽게 귓가에 속삭이는 민국이었다.

"예나 보내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주십쇼 마님."

"많이 참아주고 있는 거니까 빨리 갔다 와."

냉랭하게 말하는 은별에게 가볍게 미소 짓고는 민국은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은별은 조용해진 거실 분위기에 터벅터벅 중심부로 향했다. 그리고는 털썩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은 다음 '하아!'하고 옹알거렸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이람."

*

은별을 설득한 뒤 예나와 함께 밖으로 나온 민국이었다. 전철을 타는 역까지 예나를 데려다주면서 민국은 그녀의 상태를 검사했다.

"정말 괜찮아? 부모님 안 불러도 괜찮겠어?"

"으응… 원래 잠시 이러는 것 같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

민국의 친절한 배려에 예나는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확실히 흑마법사가 건네준 그 고리로 말미암아 느꼈던 두근거림과는 차원이 틀렸다. 심장이 가슴팍을 뚫고 나올 것처럼 군다고 할까? 예나는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괜찮아…."

"휘유, 일단 가는 도중에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으응."

그리하여 전첡역에 도착한 두 사람이었다. 개찰구 앞, 표를 찍는 곳에 도착한 예나와 민국은 멈춰섰다. 예나가 천천히 몸을 돌려 민국을 바라보았다. 민국은 짐짓 웃음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잘 들어가라는 표시였다. 하지만 예나는 그런 민국에게서 벗어나지 않고 잠시 동안 뜸을 들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

"왜 그래?"

예나의 이상 행동에 민국이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예나는 '아, 아냐….'하면서 몸을 돌려 표를 찍으려 했다.

"……."

하지만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예나는 불과 어제, 민국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당연지사 민국을 놀라게 만들었고 옆에 있던 은별이에게도 또다시 적개심을 심어주게 만들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자신의 마음! 그 마음을 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국은 여전히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저기… 민국아."

"응 예나야."

몸을 돌리면서 다시금 민국을 호명하는 예나였다. 민국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미소 짓는다. 그 산뜻한 미소에 예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급속도로 붉어지는 얼굴을 조금 내리 숙이면서 중얼거렸다.

"저기… 어제…."

"……."

"어제 그 일 있잖아…."

예나가 용기를 내면서 먼저 어제 화제에 관련하여 언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나 자신감이 극도로 하락해서 말미를 흐리고 마는 예나였다. 민국은 역시 어젯일에 관련해 많이 의식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예나를 대신해서 입을 여는 민국이었다.

"고마워."

"……."

"솔직히 기뻐."

민국의 대답이었다. 예나는 내리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놀리면서 토끼눈을 하게 되었다. 민국은 이번에는 진심으로 좋은 의미를 담아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나한테는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

"나도 지금은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어. 하지만 예나 네가 진심으로 나를 그렇게 생각해준 것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해."

거절의 의미라고 보기도 애매했고, 승낙의 의미로 보기도 애매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예나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건 분명했다. 그 마음을 정확히 전달받게 된 예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응, 말해 예나야."

"나…."

예나가 굳은 결심을 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포기하지 않을래…."

"……."

"민국이 네가 은별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을게."

이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예나의 마음이었다. 민국은 그런 예나를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예나의 입속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는 듯.

"고마워."

"……."

"잘 들어가 예나야."

이윽고 민국이 눈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 대답이 결코 나쁘진 않은 대답이었다고 생각했는지, 예나는 언제 아팠냐는 것마냥 조용하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잠깐 기울이더니, 선선히 몸을 돌려 표를 찍고 지하철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 예나의 뒷모습을 향해 가만히 손을 흔들면서 웃고 있던 민국이었다.

"……."

이윽고 예나가 사라진 뒤.

"으아아아아!"

민국은 진심으로 절규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개찰구에 별로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민국은 머리를 쥐어잡고 생각했다.

'왜 눈앞에 있는 설렁탕을 먹지 못하니! 왜!'

이성은 하렘을 꿈꾸었으나 현실은 그것을 반대하고 있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 민국은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지.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예나의 확고한 마음을 보게 되었으니 그것도 나름 좋은 것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최유이.'

사실상 민국이 최유이의 일에 너무 크게 개입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강철남과 최유이의 일이었고, 이제 여기서 그만 손을 놓아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씌빡 우리나라에 D컵 이상의 여자가 얼마나 있을 거라 생각하냐! 내가 손을 놓을 거 같아!'

희귀템은 일단 보존하고 남겨두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아이템이 산산조각으로 박살이라도 난다면 정말이지 멘붕 그 자체일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감이 있는 상대가 무너지는 꼬락서니를 가만히 지켜볼 정도로 민국은 냉랭한 타입은 못 되었다. 민국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

"…예나는 잘 보내주고 왔나 보네?"

집에 돌아가자 은별이 팔짱을 끼고 앉아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국은 신발을 벗은 다음 안으로 들어와서는 앉으며 말했다.

"은별아, 미안하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내가 너무 인기가 많아서 네가 항상 가슴이 불안불안하고 심장이 하릴없이 뛰는 거, 내가 이해한다. 하지만 어떡하겠어? 내가 이렇게 잘 생기고 멋지고 귀티가 나는데!"

"네 다음 정상 아닌 놈."

민국의 행동을 보아 단 둘이서 무언가 큰 일은 없던 거 같았다. 은별은 '하아…'하면서 한숨을 쉰 다음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유이 씨에 관련되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때는 1998년 전."

"1998년 전 돌맹이 가지고 맞아보고 싶으세요?"

"농담이야 농담. 왜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십니까? 꼭 생리하는 여인 같이."

"안하거든 바보야!"

어쨌든 진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민국은 오늘 스폰서에 가던 도중 유이를 만남과 더불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이와 강철남이 스폰서 내부에서 만났던 것. 강철남이 유이에게 속으로는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 그리고 민국과 강철남의 다툼. 유이의 패닉.

"……."

그 이야기를 다 듣게 된 은별은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민국이 이야기를 끝낸 뒤 말했다.

"그런 고로 유이 씨는 지금 멘붕 상태라는 것이지."

"…강철남. 역시 처음 볼 때부터 수상쩍은 인간이다 싶었어."

"난 은별 낭자의 두 눈에 혹시나 옵저버가 달린 건 아닐까 의심했다오."

은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넌 괜찮아?"

"뭐가?"

"상태 말이야! 싸웠다며? 어디 다친 건 아냐?"

은별의 물음에 민국이 내심 놀란 듯이 말했다.

"사랑한다 은별아. 유이 씨보다 나부터 걱정해주다니!"

"당연하지 바보야! 그래도 남자친구인데…!"

별로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아 안심을 한 뒤, 은별은 유이에 관련하여 화제로 돌렸다.

"그럼 유이 씨에 대해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흠, 은별이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이 그 여자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거든."

"……."

"솔직히 말하면 난 좀 도와주고 싶지."

민국의 말에 은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러는 건 아니지?"

"엇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제가 유이 씨에게 플러그라도 꽂으려고 이런 자상함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너라면 그러고도 남지. …어쨌든 그래도."

은별이 강철남이 떠올랐는지 상당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런 바람둥이 때문에 내가 아는 사람이 힘들어지는 건 보기 싫으니까…."

도와줄게, 라고 덧붙이는 은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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