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38화 (138/369)

138화

'뭐, 뭐하는 거야 나!'

'뭐하는 거죠 저!'

스스로가 보이는 창피한 행위에 어색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어떻게 하다하다 적인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요상하게 두근두근 요동치는 두 사람의 심장은 절제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근두근….

"어… 흠!"

은별이 입술 쪽으로 손을 가져가면서 어색하게 기침을 하였다. 예나도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두근두근거려하고 있었다. 이윽고 은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두 눈이 손목의 고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까 이거…."

"……."

"풀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고 했지…?"

은별의 물음에 예나가 어깨를 들썩이며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놀란 것치곤 왠지 모르게 기대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예나가 선선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그그, 그랬죠…?"

"다른 방법으로도 다 안 됐고… 이제 어떡할까?"

"저저저저, 저도 원치는 않지만 방법이 하나밖에 없으면…."

정말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면….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해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되지 않았다면…!!

"…미리 말해두는 거지만 절대 너한테 이상한 감정 품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니까!"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 변태!"

예나가 외치는 변태라는 단어가 전과는 다르게 뭔가 낯뜨거웠다. 예나도 스스로 말하고도 왜 이러나 싶어 자기 두 뺨에 양손을 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김치볶음밥도 먹다 말고 두 사람은 무언가 이끌리듯 자연스레 거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톡!

"아흑!"

"어, 괜찮아요?!"

하지만 막 테이블을 나오던 도중 기둥에 발톱을 또 부딪히고 마는 은별이었다. 다행히 약하게 부딪혔지만 그래도 다친 곳을 부딪힌 터라 은별은 자연스레 엄지 발톱을 감싸고 앉게 되었다. 그런 은별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예나가 후다닥 다가갔다. 그리고는 은별이 내미는 손을 자연스레 받는 예나였다.

"아."

"……."

고개를 들면서 올려다보는 은별이었고, 내려다보는 예나도 굉장히 떨리는 눈동자를 보였다.

"……."

이윽고 예나의 손길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은별이었다. 고리로 말미암아 두 여인은 서로 멀어질 수도 없는 터라, 왠지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

얼굴을 붉히고 푹 고개를 내리 숙이며 예나를 따라 거실로 이동하는 은별이었다. 예나 또한 다친 은별을 데리고 거실로 무사히 인도한 따름이었다. 이윽고 예나가 천천히 은별을 돌아보며 말했다.

"앉아요…."

"말 안해도 그럴 거야…."

그리고 조심스럽게 앉는 은별. 조심스럽게 앉는 예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그것이었다. 한참동안 그러고 가만 있길 수 초, 어색하던 끝에 예나가 머뭇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 할 거예요?"

"하지만… 이제 이거 말곤 방법이 없잖아."

그건 정답이었다. 해제 조건은 단지 하나였고, 핵 미사일이 날아온들 절대 흑마법사의 절대 고리는 깨지지 않을 것이었다. 마법이란 건 민국이 사는 세상에는 존재치 않는 것으로, 현실 세상에서 존재하는 어느 물질로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꿀꺽."

은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왜 이렇게 떠는 거람! 애인이랑 키스하는 것도 아닌데!'

이거 참 이상한 감정이다. 분명 이성도 아니고 동성이며,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는 사람인데 지금 이 순간에는 자꾸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마냥 가슴이 떨려왔다.

'안 돼요! 자꾸 이상하게 보면 안 된단 말이에요!'

예나 역시 혼란 그 자체였다. 마치 무언가에 매료된 것마냥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지고 있었다.

"……."

"……."

그리고 그때였다. 조용한 정적 속에서 얼굴이 마주친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눈길을 맞게 되자 마치 커플인 마냥 심장 박동수가 더욱 높아졌고, 서서히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애!'

'안 돼요오!'

절규처럼 비명을 지르는 둘이었지만, 몸은 말릴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매료된 것처럼!!!

"……."

그리고 그것을 멀리서 도청(?)하고 있던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가 만든 제품에는 항상 어디서든 누구가 끼고 있든 도청할 수 있는 마법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으로 현재의 상황을 듣고 있던 흑마법사는 혀를 날름거린 다음 중얼거렸다.

"원한 건 이런 상황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마치 p2p에서 야동인 줄 알고 다운 받았는데 남자끼리 하거나 여자끼리 하는 걸 다운 받은 느낌이었다. 취향에 맞는 사람이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모르다가 신세계에 눈을 뜬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적어도 흑마법사는 이성간의 사랑을 바라고 의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두 여자는 모르고 있었지만, 두 여자가 장착하고 있는 커플 고리에는 또 다른 신비한 마법이 담겨 있었다.

어째서 사이가 안 좋고 서로 적대시 하던 사람들도 그 커플 고리만 끼면 연인 사이가 되었겠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그 커플 고리에는 이성이든 동성이든 막론하고 서로를 사랑하게끔 하는 마법이 걸려 있던 것이다.

"……."

잠자코 도청하던 흑마법사였다. 이윽고 도청기를 내려놓으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사건의 진실은 이러했던 것이다.

"내 여자 친구가 네토라레일 리 없어!"

사건의 결말은 이러했던 것이고 말이다.

*

"그러했던 거로군."

"그래. 그랬던 거라고."

'괜히 그 여자가 이상한 걸 가지고 와서….'라고 투덜투덜대는 은별이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모든 사정을 듣던 민국이 고개를 돌려 예나를 보았다. 예나는 민국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게 되자 도둑이 제 발 저린 마냥 깜짝 놀라더니 진지하게 손사래를 쳤다.

"은별 씨 말이 맞아 오해야 민국아…."

민국은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흑마법사라면 그럴 만하지 엇흠.'

민국도 못 말리는 타입이었지만 흑마법사도 은근 못 말리는 타입이었다. 물론 흑마법사가 민국 일행을 도와준 건 엄청난 것이었고 그건 돈으로도 값을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이 만나본 적은 없지만서도 흑마법사에겐 일반인에게서 볼 수 없는 요상한 끼라는 게 있었다.

민국도 그런 끼가 있었기에 한 눈에 알고 납득할 수 있던 것이다. 왜 싸이코는 싸이코끼리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한 가지는 아쉽구만! 날 좋아하는 두 여자가 한 몸이 되어서 으헤헤헤헼.'

"……."

의외로 네토라레에 큰 충격을 받지 않는 민국이었다. 네토라레 동인지를 하도 보아서 그런 걸까? 아마 그것과는 달리,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했던 두 여인이었다. 그 두 여인이 알몸이 되어서 이러쿵저러쿵 사랑을 속삭인다는 게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심지어 만날 자신을 가지고 싸움만 하던 두 사람이 말이었다!

"너 지금 이상한 생각하지? 때려버린다?"

"어이쿠, 아닙니다 마님. 설마 제가 둘이서 하나가 되길 바랐겠습니까?"

"……."

은별이가 속삭이자, 그만 본심이 나온 민국이었다. 예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둘이서 속삭이는 모습에 잠시 지켜보다가 실망하는 안색을 지었다.

'역시 쉽진 않겠구나….'

민국이의 마음을 자신에게도 열게 하는 건 말이었다. 이윽고 사정도 설명하고 사건도 종료했겠다, 은별이가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약 줘."

수갑의 고리가 끊겨서 그런지 예나와 함께 걸려 있던 마법도 해제된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때 느낀 감정이 아예 배제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은별의 말에 민국이 '아'하고 탄성 짓더니 예나도 잠시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냉장고로 향해서 맨 밑칸을 뒤지기 시작했다. 은별이 그것을 보고는 '뭐야…'하다가 중얼거렸다.

"설마 냉장고 안에 넣어놓은 거야?!"

"아니, 하지만 그냥 놔두면 상할 거 아니야. 차갑게라도 해놔야지."

"…그런 게 상하긴 뭘 상해?!"

하지만 독약도 더운 날에 마시면 더 독약 같다고, 마실 때는 기분이 좋아야 하는 게 사회의 법칙이었다. 이윽고 밑칸을 뒤적이던 민국이 '여깄다.'하면서 그것을 꺼내들었다. 하얀 병 안에 노골적으로 액체들이 훌렁훌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목도한 예나와 은별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

그도 그럴 것이, 어제 마셔본 당사자들로서 영 좋지 않은 맛이 났던 것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 예나야."

"아… 응. 고마워 민국아…."

"아니야. 그런데 잘 마실 수 있겠어?"

고작 한 방울이었지만 어제처럼 또 화장실에 가서 구역질을 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되던 민국이었다. 반쯤 착한 이미지 코스프레도 있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걱정되어 물음에 예나가 감동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니야. 나야말로 미안하지."

민국의 대우하는 태도에 은별이 울컥한 듯 그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다음 타자로 은별에게 병을 건네주는 민국이었다.

'받으시오 낭자.'

'…….'

'엣헴. 받지 않고 뭐하고 있소? 어서 내 아기씨를 그 입속에 담고 오물오물거리란 말이오!'

'와, 죽여버리고 싶다 이놈.'

눈빛으로 대화하는 것임에도 모든 문장이 다 읽혔다. 은별은 열받는 감정을 참고 일단 병을 받았다. 어찌 됐던 간에 마셔야만 살 수 있었으니까. 의외로 먼저 병을 따는 예나였고, 은별도 그 뒤를 따라서 병을 땄다.

"…윽."

밤꽃 특유의 냄새가 났다. 비록 여자였기에 그 자체에 거부감이 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마셔보아서 그런가 느낌이 영 달랐다. 민국이 앉아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가운데, 어제 일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예나가 눈을 강인하게 감고는 그대로 입안에 털어넣었다.

"……."

은별도 그 뒤를 따라서 후르릅하고 흡입하듯 마셨다. 민국은 이를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눼이트에서 커피에 정액을 탄 남자 사건 기사를 읽으면서 전혀 공감을 못했었는데 말이야.'

회사에서 상사인 여자에게 타주는 커피에 자기 정액을 넣었던 사건! 그만 상사 여자가 그 정액 특유의 맛을 알아차리고는 남자를 잘랐던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왠지 이제는 그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아!'

변태에서 초변태로 진화 중인 서민국이었다.

'고맙습니다 흑마법사느님!'

그렇게 서민국이 흑마법사에게 감동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결국엔 마시는데 성공한 두 여인. 이윽고 은별이가 진득진득한 역겨운 맛에 인상을 크게 찡그렸다. 반대로 예나는 잠시 무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

또다시 입을 가리고는 후다닥 화장실로 직행하는 예나였다. '우욱!'하는 구역질 소리가 들려왔고, 어지간히 체질에 안 맞는지 힘들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별이 그 소리를 들으면서 궁시렁거렸다.

"많이 체질에 안 맞나 보네…."

"예나야!"

그리고 그때 민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예나에게로 향했다. 닫혀 있는 화장실 문으로 중얼거리는 민국이었다.

"괜찮아 예나야? 많이 안 좋아?"

"우욱! 아니야… 괜찮아 민국… 우욱!"

"크으, 큰일이네. 몸에 안 맞아서."

"……."

뭐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있담? 한 번 참아줘도 두 번은 못 참는다. 은별도 어차피 오늘 용건은 끝났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장으로 향하려 했다. 그때 그것을 눈치 챈 민국이 후다닥 은별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

"놔. 사실 한예나가 더 좋지?"

"어이쿠, 또 질투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소꿉친구로서 도리를 지키는 거잖여."

"어휴, 도리 참 좋아하시네요. 네네~ 그 도리 한 번 계속 지켜보세요~."

그리고 신발을 다시 찾기 위해 몸을 돌리던 은별이었다. 민국이 은별의 손목을 당겨서 다시 자기를 보게 했다. 은별이 슬슬 짜증나는지 소리쳤다.

"왜 그래!"

"잠시만. 이따가 예나가 간 뒤에 단 둘이 할 얘기가 있어."

"뭐어?"

은별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네가 하는 생각이 뭔지 모르는 줄 알아?"

"훗, 보통 때라면 네가 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오늘만은 아니다!"

보통 때라면 변태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민국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이 씨 일이야."

"…뭐?"

은별이 다른 의미로 진지해진 표정을 지었다.

"최유이 씨?"

"그래."

민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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