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사랑의 결실(?)이라 불리우는, 흑마법사가 건네준 제품은 두 여인을 정처없이 시간만 보내게 만들었다. 그동안 민국은 유이를 집앞까지 데려다주다 강철남을 만나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말이다.
'정말… 어째서 선물을 해도 그런 걸 선물하는 거야?'
50일 연애 커플이랍시고 건네주었던 선물에 대한 고마움은 싸그리 잊은 지 오래였다. 하필 줘도 그런 요상한 제품을 줘서… 적이라 부를 수 있는 예나와 이런 시간을 보내게 만든단 말인가. 사실 은별이 오늘 기다렸던 건 이런 상황이 결코 아니었는데….
"……."
테이블에 턱을 괴고 거실을 쳐다보던 은별이 스윽 눈길만 돌려 예나를 보았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켠 후, 반찬거리들을 이용하여 요리를 하고 있는 예나의 뒤태. 마치 몇 년 동안 요리를 숙련해온 노련한 아내 같았다. 그 모습이 은근히 신경에 거슬리는 은별이었다.
'차마 다리까지 치료해준 와중에서 싸울 수도 없고… 어쩌란 말이야 증말!'
심지어 민국에게도 곧잘 보여주지 않았던, 아픔에 징징거리던 모습을 예나에게 그만 보여주고 말았다. 어찌 보면 그건 은별이가 오래토록 남들에게 보이지 않고 꽁꽁 숨겨왔던 나약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다 못해 예나가 마치 자기의 엄마인 양 그만 의지해버린 은별! 기억을 돌이켜보니 은근히 창피하고 쑥스러워 은별은 얼굴이 붉어졌다.
"발은 괜찮아요?"
"괘, 괜찮아!"
울상은 어디가고 부끄러움으로 사무친 은별이 버럭 소리 질렀다. 예나는 그런 은별을 뒤돌아보았다가 다시금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리에 열중하는 모습에 은별은 다시금 그녀를 쳐다보며 궁시렁궁시렁 생각에 잠겼다.
'민국이에게 요리도 많이 해줬다고 했었지?'
민국이에게 듣길, 소꿉시절부터 만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같은 곳을 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같은 반이었던 적이 두 번 제외하곤 항상이었다고 하니… 이거 운명이 맺어준 인연이 아니라고 하면 어색할 지어다.
'요리… 끄응… 난 요리는 잘 못하는데.'
이상하게도 은별은 주부살림 분야에서 빨래 널기나 집안청소 같은 건 능수능란했지만, 요리는 아무리 배워도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일반 여자들보다도 평균 수준이하라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예나의 그런 요리 능력을 조금씩은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휴, 다 됐다."
"……."
한 손으로 요리하느라 은근히 번거로웠는지 이마에 싱글싱글 땀이 맺혀 있었다. 옷소매로 그것을 닦아낸 예나가 후라이펜의 그것을 접시에 톡톡 담은 다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볶음밥이에요. 드셔보세요."
"……."
냉장고에 있는 반찬 중에 김치를 이용하여 만든 김치볶음밥이었다. 햄부터 볶음밥에 필요한 채소들도 가득 들어가 은근히 맛나 보였다.
볶음밥이란 요리는 사실상 후라이펜을 통해 밥을 볶는 류이기 때문에 굉장히 만들기 쉬운 편이었다. 허나 일반인이라면 그 볶음밥의 겉모습까지 디테일하게 신경 쓸 수준은 못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예나는 겉으로 보기에도 맛나 보일 정도로 둥그스름하게 볶음밥을 만들어 은별의 앞에 접시를 놓았다.
치료 후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던 은별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예나가 싱크대에 물을 틀어 손을 닦은 다음 은별을 보며 물었다.
"왜 안 드세요?"
"…너는?"
"저도 먹을 거예요. 제 것도 저기 좀 있어요."
그리고 후라이팬에 남은 나머지 것을 가리키는 예나였다. 이윽고 예나가 자기 것을 덜고 있을 때 은별은 자신의 테이블 앞에 놓인 수저를 찬찬히 들어 은근슬쩍 한 입 먹어 보았다.
'맛있어!'
충격이었다. 얼마나 충격이냐면, 은별이 어머니가 만날 해주던 볶음밥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맛있었다. 은별은 요리 대립으로는 결코 그녀를 이길 수 없단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기 보단, 너무 놀라는 바람에 그만 이렇게 묻고 말았다.
"…혹시 꿈이 요리사야?"
"왜요? 맛 괜찮아요?"
예나가 자기 것을 맞은편에 가져오며 물었다. 아청의 고리 수갑 때문에 움직이기 은근히 불편했다. 은별이 눈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모, 몰라."
"……."
예나가 순간 이상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은별은 신경쓰지 않았다. 한 입 두 입 예나의 볶음밥을 입에 담던 은별이 천천히 물었다.
"대학 때 서민국에게 도시락 싸줬다고…?"
"네."
"…얼마나 싸줬는데?"
예나가 스치듯이 던졌던 방금 전의 얘기가 은근히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자신의 요리를 천천히 먹고 있던 예나가 고개를 들었다. 은별이 다친 것을 보고 치료를 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엔 적이었던 것이다. 예나가 노골적으로 질문했다.
"신경쓰이세요?"
"…신경? 하, 신경이 쓰이긴 누가 쓰인다고 그래!"
반발을 하면서 한입 더 떠먹는 은별이었다. 예나가 말했다.
"신경이 안 쓰이면 아까 전에 했던 얘기를 굳이 꺼낼 필요가 없잖아요? 질투하시는 거 맞네요."
"질투라니… 어이없어! 야! 그래봤자 서민국 내 남친이거든? 절대 네 소유가 아니야!"
예나도 다시금 빠직했다.
"민국이를 물건 취급하지 마세요! 아까부터 자꾸 민국이를 장난감마냥 소유하고 있다고 표현하시는데! 그러는 그쪽은 여자 친구로서 대접 받을 자격도 없어요!"
"여자친구로서 대접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어떻게 알아? 민국이에게 고백 받았어? 못 받았잖아! 난 받았다구!"
"받았어도 당신의 핫팬츠로 유혹한 거겠죠! 이 변태!"
"이이… 진짜아!"
휴식 시간은 이제 끝이다. 다시금 기다리고 기다리던 싸움의 시간. 은별이 벌컥 의자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요리 잘하면 다야!"
"당신은 허벅지 예쁘면 다인가요!"
예나도 벌컥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응했다. 예나의 2차 공격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외모 좋고 예쁜 거로 민국이의 마음을 가져가려는 심보가 나쁘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겉으로 보면 누구든지 간에 예쁘다고 인정하겠지만! 그래도 당신 내면은 썩어 있어요! 변태 꾸러미라구요!"
"벼, 변태 꾸러미! 정말 보자보자하니까! 야!"
은별이 숟가락을 놓고 손가락으로 예나를 가리켰다.
"그러는 너야말로 겉모습만 예쁘고 속은 시커먼 애 아니야?!"
"뭐라구요…?!"
"남자들 로망의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바지를 입어도 가려지지 않는 가는 다리! 커다란 눈! 너야 말로 어설프게 가리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부각시키고 있잖아! 이 속 시커먼 애야!"
예나의 눈이 조금 흔들렸고 얼굴이 붉었다. 이윽고 단단히 화난 표정으로 예나가 소리쳤다.
"어쩜 그렇게 부끄러운 말을…!"
"사실인데 뭐가 부끄럽단 거야?!"
"좋아요! 그럼 당신은 그 피부는 뭔데요? 관리도 안했는데 청결한 듯한 윤기나는 피부! 저처럼 긴 머리는 아니지만 어깨까지 내려오는 그 가느다란 머리는요? 당신이야 말로 예쁘게 치장하고 다니잖아요!"
"아니거든! 네가 더 예쁘게 치장하고 다니거든!"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더 예쁘게 치장하고 다니잖아요!"
"으으…!"
"이이…!"
이빨을 드러내면서 분한 듯한 표정을 짓던 둘이었다. 결국엔 화가 쌓이고 쌓여서, 폭발하기에 이르는 둘이었다. 둘은 기다렸다는 듯 잔뜩 붉어진 얼굴로 서로에게 소리쳤다.
"이 예쁜 애야!"
"이 예쁜 여자!"
그리고 정적. 동시에 찾아오는 요상함. 분명 이 주제로 싸우게 된 게 아니었을 텐데… 어느 순간 흐름이 이상하게 요동쳤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는 둘이었다.
"아…!"
"……!"
그리고 그제야, 두 사람은 속내에 내심 품고 있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사람의 장점을 의식했던 것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냈단 사실을 깨달았다. 둘의 눈동자가 커다래짐과 동시에 보다 더 급격히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푹하고 고개를 내려 숙이면서 서로에게서 시선을 피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늘 진 얼굴 아래로 유난히 붉은 얼굴이 보였다.
'이, 이런 바보!'
'바보예요 전…!'
자기 자신에게 자책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이거 은근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꽁꽁 숨겨 두었던 부러움을 그만 상대에게 말하고 말았으니 말이었다. 은별이 고뇌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버린 거야? 적인 애한테 칭찬을 하면 어쩌자구!'
'민국이 여자친구를 칭찬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정말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건지….'
정말이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서 방금 전 말싸움을 할 때, 스치듯이 지나갔던 서로의 말이 기억 속에서 더듬어졌다.
(이 예쁜 애야!)
(이 예쁜 여자야!)
"……."
"……."
예나의 얼굴이 한층 붉어졌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그녀였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떡해… 살면서 예쁘단 소리를 듣다니. 처음이야….'
예나는 굉장히 예쁜 편에 속했고, 실제로도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청순하고 온순한 분위기는 주변 남자들로 하여금 너무나도 깨끗해서 차마 지저분하게 만들 수는 없다, 고로 나는 안 된다 하는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때문에 먼저 호감 표시를 하면서 다가오는 남자들은 정말이지 적은 편이었다.
왜, 너무 예쁘면 남자들도 오히려 대시를 못하지 않는가. 그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런 예나였기에 칭찬에 낯설 수밖에 없었다.
'바, 바보 같아! 왜 자꾸 의식하는 거야? 어차피 적인데!'
은별도 입술로 작게 투덜투덜거리면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얼굴의 붉은 온기는 자꾸만 사라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은별도 고개를 더 내리면서 한 손으로 눈 근처를 가리고 말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은별의 트렌드 마크(?)인 윤기 있는 허벅지가 보였다.
"……."
(그럼 당신은 그 피부는 뭔데요? 관리도 안했는데 청결한 듯한 윤기나는 피부! 저처럼 긴 머리는 아니지만 어깨까지 내려오는 그 가느다란 머리는요? 당신이야 말로 예쁘게 치장하고 다니잖아요!)
'확실히….'
은별은 눈을 가렸던 손으로 앞머리를 슬쩍 만져보았다.
'머리도 가느다랗고… 피부도 다리를 보면 윤기가 나…. …틀린 말은 아니야.'
예나 역시 은별이 했던 말을 돌이키고 있었다.
(남자들 로망의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바지를 입어도 가려지지 않는 가는 다리! 커다란 눈! 너야 말로 어설프게 가리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부각시키고 있잖아! 이 속 시커먼 애야!)
'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라니… 실제로 피부가 좀 하얗기도 하고 머리가 길기는 하지만… 그래도 부각한 적은 없다고요….'
허나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 창피해!'
'창피해요….'
노골적으로 칭찬을 받게 되면 누구나 쑥쓰러움을 타게 된다. 그와 더불어 누군가를 질투하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되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쑥스러움을 가져온다.
지금 둘은 그 쑥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아주 특이한 일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마음 속에 싹트는 또 다른 하나의 감정이 있었으니….
"……."
"……."
그것이 마냥 좋은 의미의 감정인지는 두 사람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사태로 말미암아 느끼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비호감스러운 감정은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어쩜.'
'하지만 말이죠….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그런 애는….'
'제가 생각한 그런 여자는….'
가리고 있던 손을 서서히 치우면서 두 사람의 고개가 들려지고 있었다.
'몰라….'
'몰라요….'
둘의 시선이 마주하였다. 지극히 부끄러움과 더불어, 적을 경계하는 적개심. 그와 함께 새로운 감정… 일말의 호감! 시선을 마주하고 빤히 몇 초간 있었음에 창피한지 '앗!'하고 고개를 홱 돌려 버리는 은별이었다. 예나 역시도 붉어진 얼굴을 다시금 가리기 위해 반대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