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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36화 (136/369)

136화

이번엔 은별이 차례였다. 공구로는 도무지 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다른 해결책을 내놓아야 했다. 은별은 안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리로 와."

"뭐하시려는 거예요."

볼성사나운 목소리로 물음을 던지는 예나였고, 은별은 민국의 안방으로 다가가 컴퓨터 아래의 서랍들을 차례대로 열어보기 시작했다. '어디 있더라?'하면서 곰곰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은별이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외쳤다.

"여깄다!"

"……?"

"열쇠 꾸러미!"

은별이가 당차게 열쇠 꾸러미를 보여주었다. 예나가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열쇠 꾸러미라니… 민국이만 알 것 같은 걸 당신이 왜…."

"여자 친구의 특권이지. 부럽지?"

대놓고 놀리는 은별이었고 할 말을 잃는 예나였다. 신발 서랍장에 예나의 공구가 들어가 있다면, 민국의 안방에는 은별이와 함께 사용하는 열쇠 꾸러미가 있었다.

이 열쇠 꾸러미는 민국의 집에 있는 각각의 방들, 거실, 부엌, 화장실, 안방, 현관문. 모든 것을 열 수 있는 일명 마스터키였다. 그 외에도 서랍장이나 쓰지 않는 장롱의 열쇠도 섞여 있었다.

이윽고 은별이가 열쇠 꾸러미를 움직이면서 열쇠 하나 하나를 수갑 구멍에 끼워넣으려 하자 예나가 말했다.

"애초에 열쇠가 그렇게 많다 한들 들어가는 건 없을 거 같은데."

"밑져야 본전이지. 안해보고 누가 알아?"

반신반의하는 예나였지만 은별의 말도 사실상 틀린 건 없었다. 어디까지나 제각각 다른 곳에 쓰이는 열쇠들이었지만, 그래도 그 중에 한 개는 수갑을 여는데 사용되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이 세상에도 많이 일어나는 법이었으니까. 철컥.

"앗!"

"!"

이윽고 첫 번째 열쇠를 끼어넣은 은별이었다. 민국의 안방 열쇠였다. 구멍에 아주 잘 맞게 들어간 그 열쇠에 은별과 예나가 깜짝 놀랐다. 이윽고 은별이 왼쪽으로 열쇠를 돌려보았다. 탁.

"……."

돌아가지 않았다. 예나가 보란 듯이 중얼거렸다.

"거봐요… 역시 안 되잖아요."

"아니야! 그래도 첫 번째께 들어갔으니까 다른 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애써 희망을 가지며 은별은 그렇게 여러 개의 열쇠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예나는 그것을 막연히 구경할 따름이었다.

철컥! 탁! 철컥! 탁! 하지만 어떤 걸 넣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예나의 말대로, 우연히 구멍에 맞아 열쇠가 들어간다 한들 돌아가는데 필요한 모양이 달랐기 때문에 수갑을 풀 수 있을 리 전무했다.

"이이이이이!"

열이 뻗쳤는지 은별이 분노의 열쇠질을 하기 시작했다. 탁! 탁! 탁탁탁탁! 탁탁탁탁!

"……."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예나였다. 이 악물고 열쇠질을 하는 은별의 모습은 이해한다 한들, 열쇠를 돌릴 때마다 맞부딪혀 들려오는 소음이 은근히 거슬렸다.

"변태."

"…어떻게 이게 변태야?!"

"포기해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은별은 '으…'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열쇠 구멍에 꽂혀있던 열쇠를 빼내는 은별이었다. 예나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저거로 해볼게요."

예나의 말이었고, 은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한 방법이란 방법은 다 시도해봐야 할 것 같았다.

*

그로부터 세 시간이 경과한 뒤였다. 예나랑 은별은 진이 빠질 대로 빠진 모습이었다. 어느새 두 여자는 바닥에 앉아서 흘린 땀을 말리고 있었고, 입을 놀리는 것도 이제 지겨운지 무겁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은별은 머릿속으로 괴로운 생각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무리 노고한다 한들 방법이 없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이놈의 수갑은 도무지 은별과 예나가 사는 세계의 물건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 방법이 그것밖에 없단 말이야?'

일정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으로 해제가 되거나 하진 않는다. 흑마법사도 돌아갈 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두 여인이 입술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

예나도 반쯤 포기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도 유일한 해결책이 입술을 포개는 것밖에 없음에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느끼는 듯했다.

"안 돼. 다시 찾아보자."

"그래요."

다시금 기운을 내면서 대안을 찾으려고 말을 꺼내는 은별이었다. 예나도 적극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예나와는 달리 은별이 돌연 푹하고 무릎을 꿇었다. 정직하게 일어섰던 예나가 은별의 급작스런 언동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아읏…."

괴롭다는 듯 무릎을 모으고 신음하는 은별이었다. 예나의 눈동자가 더욱 커다래졌다.

'설마…?'

설마 민국의 그 약을… 마셔야 할 때라도 왔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상 어제 마셨던 약 때문에 오늘까지는 안전함이 유효할 텐데? 예나는 혹시나 그녀가 쓰러지면 어떡할까 대안책을 강구하며 은별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정말? 왜 그래요…?"

"…화장."

"네?"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리던 은별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그늘진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붉은 홍조로 가득했고, 푸른 눈망울은 흔들리고 있었다.

"화장실…."

"……."

"…마려워."

애써 손이 그곳에 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참고 있는 은별이었다. 멍을 때리던 예나가 이내 화들짝 놀라는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 변태예요? 어떻게 그런 소리를…!"

"어, 어쩔 수 없잖아! 나도 계속 참았었다고!"

아침에 피부 좋아지라고 물을 잔뜩 마시고 온 게 과오였다. 지금까지는 짐짓 태연한 척하면서 참고 참아왔는데… 이젠 여유가 없었다.

"화장시일…."

"……."

어지간히 급한 지 다리를 계속해서 오므리는 은별이었다. 예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또 한 번 패닉에 빠지는 걸 느꼈다.

"으으…."

하지만 패닉에 계속해서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같은 여자로서 볼 일을 참는 게 얼마나 힘겨운지 이해하는 예나였기 때문에,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잽싸게 은별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빨리 일어나요!"

"앗! 흔들지마! 갑자기 그러면…!"

"그러니까 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보던가 해요!"

후다닥 화장실 쪽으로 달려가 은별의 등을 밀치는 예나였다. 손목의 고리 때문에 같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 들어온 은별이 변기 앞에서 고개를 흘끔 돌려 예나를 보았다. 예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은별은 정말이지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면 안 돼…?"

"……"

얼굴을 붉히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그 모습에 예나도 심금이 조금이나마 울렸다. 이윽고 예나가 빠르게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안 볼게요…."

"……."

그리고 그로부터 2분 경과. 아무리 보지 않는다 한들 소리는 들려오니, 차마 귀를 막을 수 없는 상황. 은별은 창피해 죽겠다는 듯 한참동안 허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예나 역시도 이런 것에 다소 익숙한 사람이 아닌 지라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끝났다는 게 어느 정도 감이 왔는지 예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 보셨어요…?"

"…응."

이윽고 은별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예나는 그제야 한숨 놓게 되었다. 은별도 설마 타인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울상이었다. 이내 화장실을 나가던 두 사람이었다. 퍽!

"악!"

"……?"

창피해 죽겠는지 고개를 떨구고 예나를 따라가던 은별이었다. 그만 화장실을 나오다 문에 발톱을 찍히고 말았다. 거실 바닥에 드러눕듯 주저앉아 발을 부여잡는 은별. 예나는 또다시 은별의 그런 갑작스런 행위에 놀라서 다가갔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발톱을 확인했다.

"하으으…."

"발톱에 상처가… 기다리고 있어봐요. 벤드 가져올게요."

어지간히 세게 부딪혔는지 발톱이 조금 깨진 듯했다. 은별이 울상을 지으면서 괴로워하자 예나가 근처에 있는 신발장의 서랍장 다음 칸을 열었다. 그러자 이번엔 데이벤드를 비롯해 각종 약품이 있는 상자가 드러났다.

그것 역시 예나가 따로 보관해둔 것이었다. 이윽고 그것을 꺼낸 예나가 상자에서 후시딘을 비롯해 각종 연고를, 그리고 데이벤드를 꺼냈다.

"이리 봐요."

"…아파, 만지지마."

"만지지 않으면 어떻게 상처를 치료해요. 줘보세요."

"으…."

은별이 신음하면서 눈을 찡끗 감았다. 발을 용기 있게 내준 그녀. 예나는 기다렸다는 듯 은별의 발톱을 이리저리 확인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참으세요."

하지만 이럴 때만큼은 예나도 누구보다 용기가 있었다. 주로 동생이 다쳐서 오거나 친구가 다쳐서 오면 상처를 소독해주는 게 예나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역할을 우연찮게도 은별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하으윽!"

"……."

눈을 찡그리면서 신음을 토하는 은별이었다. 고통이 심한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상태였다. 예나는 그런 은별을 배려하듯 최대한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독였다.

"……."

아무리 적이라 한들 결과적으로는 민국의 여자 친구였다. 민국이에게 자신보다 더 소중한 여자 친구…. 그런 여자 친구에게 질투와 적계심을 가지고 있다 한들 마냥 나쁘게만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예나도 그리 심신이 나쁜 여자는 아니었고 말이었다.

"……."

한참동안 은별의 발톱을 소독하고 치료해준 예나였다. 연고를 바르고 이제 마지막으로 데이밴드만 붙일 상황. 예나가 천천히 손을 뻗어 데이밴드를 한 겹 떄더니, 그것을 곱게 펴서 은별의 발에 붙여주었다.

"하으…!"

"너무 소리가 야하잖아요…."

"야, 야하긴 뭘 야해…."

잘 보니 이거 꼭 엄마와 딸 같았다. 예나가 엄마. 은별이 딸. 사실상 은별도 약간 엄마 같은 구석이 있었는데, 잘 보면 예나가 좀 더 챙겨주는 듯한 모습을 갖춘 이미지였다. 이윽고 예나가 양손으로 은별을 잡아 부축해주면서 물었다.

"지금은 어때요? 좀 괜찮아요?"

"…괜찮아. 좀 아프지만."

은별도 예나가 상당히 치료를 잘 해주었다는 사실에 조금 당혹하고 있었다. 확실히 예나의 일반적인 생채기에 대한 치료 실력은 간호사급(?)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밥을 안 먹었네요."

"…그러게."

지지고 볶고 싸우기만 어연 3시간이었다. 해결책도 못 찾고, 그저 손목의 고리만을 붙들고 있으니 이제 슬슬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오바였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예나가 입을 열었다.

"제가 요리할게요. 부엌으로 가요."

"…요리? 요리도 할 줄 알아?"

"대학교 다닐 때 민국이가 배고프면 가끔 도시락을 싸오곤 했었어요. 그리고 같이 먹었죠."

이번엔 은별을 질투하게 하기 위함이 아닌, 순수함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은별은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예나가 그런 은별을 부축하고 걸어가면서 말했다.

"자, 가요."

"아, 알았어…. 조심히 움직여줘."

차마 고맙다는 말은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기에, 은별은 궁시렁궁시렁대며 예나를 졸졸 따라갈 따름이었다. 이윽고 부엌에 도착한 두 사람. 은별을 의자에 조심스레 앉힌 예나가 수갑의 고리 길이를 체크한 다음 가스레인지로 냄비를 가져갔다. 부엌의 냉장고를 들춰 반찬들을 확인하는 예나.

'반찬이….'

예전에는 민국의 부엌 냉장고 안이 허름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내부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역시 은별 씨가 챙겨준 거겠지?'

이제 이곳에 예나의 흔적은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예나를 무척이나 슬프게 했다. 은별도 그런 예나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 가만히 침묵했다.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요리해줄 테니까."

"…으응."

고개를 돌려 애써 외면하는 은별. 예나는 양 소매를 걷어 요리할 자세를 취했다.

'오랜만에 해보자.'

비록 민국의 여자 친구에게 해주는 요리라지만, 그래도 요리에는 사람의 정성이란 게 들어가야 했다. 그래야 맛도 사는 법이니까. 예나는 그 신조와 철칙을 지금 이 순간에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열심히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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